하도 그 질곡이 지리해서 주변인들이 이제 궁금해하지도 않는 나의 연애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만났던 여자 친구는 다름 아닌 나의 첫사랑이다.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그녀를 서울에서 다시 마주하게 되어 2005년에 처음 만났다 헤어지고, 2011년에 다시 만났다 헤어지고, 2013년에 마지막으로 만났다가 헤어졌다. 아마도 지금으로부터 먼 날 언젠가는, '꽤 중요했던' 연애 정도로 남게 될.
그녀는 효자동에서 친구와 함께 외관이 예쁜 옷집을 했고, 직접 옷을 만들기도 했다. 인터넷으로도 옷을 팔고 주로 자신이 모델을 하였기에 난 아직도 가끔 그녀가 생각나면 사진으로나마 그녀를 볼 수 있다. 그것이 장점인지 단점일지는 애매한 일이나, 소심한 그녀의 성격 탓에 사진에 그녀의 얼굴 전체가 나오지는 않아, 코 아래로밖에 볼 수 없으니 장점이라고 해두자.
그녀는 서촌을 좋아했다. 일을 하는 효자동도 서촌이었고, 집도 서촌이었다. 종로구 누상동, 과거 누각동이란 지명의 위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누상동이다. 이름부터 예스러운 그곳은 아직 한옥들이 많았다. 그녀의 집도 한옥이었다. 밖에서 보면 무너질 듯한 모습이지만, 안에 들어가면 오히려 밖의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았다. 편안했다. 겉은 한옥인데, 안은 '이케아'로 도배가 되어 있어 '난 누군가 여긴 어딘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생활의 경계를 무척 중요시하는 그녀의 성격 때문에 나는 그 집을 몇 번 들어가 보진 못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녀에게 사생활이 아니었나 보다. 하지만 서운할 시기는 이미 지났다.
우리의 데이트는 매우 단조로웠다. 우리집에서 밥을 해 먹고 각자 책을 보다가 그녀의 집 앞까지 함께 가는 날이 절반 정도였다. 나머지 절반 정도 중에서는 서촌, 더 넓게는 종로구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냥 서촌을 걷다가 밥을 먹었고 차를 마셨다(그녀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 동네에 살면서도 그 동네를 걷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나도 걷는 것을 좋아했고, 무엇보다 그녀를 좋아해서 나도 그런 데이트가 좋았다. 저번 주에 걸었던 길을 이번 주에 또 걸었다. 저번 주에 갔던 카페를 이번 주에 또 갔다. 또 가고 또 가던 카페는 'PROJECT29'라는 이름의 카페였다.
그녀가 딱히 좋아하는 카페라서 자주 간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녀의 집에서 거의 제일 가까운 곳이었다. 가고 또 가다 보니 자주 가게 된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왜 이 카페의 이름이 'PROJECT29'인지 아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녀는 모르겠다고 했다. 함께 추측해 보고 싶었지만 그녀는 아마 변변찮은 답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워낙 말이 없었다. 나 혼자 추측했다. 그것은 아마도 이곳의 사장님이 29살을 넘기기 전에 어떤 목표를 세워 놓은 것이 아니었겠냐고, 그리고 이 카페가 그 목표에 포함된 것이 아니겠냐고. 그녀는 "그럴 수도 있겠네"라고 답했다. 우리의 대화들은 20대를 넘긴 나이였기 때문이라고 핑계 대더라도 너무 건조했다. 우리 사이에는 정전기가 많았다. 큰 번개가 쳤던 적은 없었다.
같은 장소, 그러나 다른 날에 나는 '우린 이미 29살을 넘겼으니 39살을 넘기기 전의 목표로 삼은 것이 있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대충 "그으을쎄에-"라고 말했다. 물론 저런 음절들로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어쩐지 기억 속에 저런 식의 음상으로 남아 있다. "너는?"이라는 후속말로 내게 의무를 넘겼다. "일단 멋지게 살고 싶긴 해, 그리고 적어도 어떤 자리를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고..." 등등의 말을 지껄였을 것이다. 아마 그 말이 진심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억이 안나는 것 같다. 어쩌면 기억이 안 나는 건 그 말에 되받아친 그녀의 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넌 원래 앞으로의 계획 같은 거 생각 안 하고 산다며, 거짓말했네?"
그 뒤에 대화가 더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말한 '거짓말'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39살에 대한 나의 주저리주저리 떠듦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인지, 혹은 계획 같은 거 생각 잘 안 하고 산다던 말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인지, 어떤 쪽으로도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후자였다면 더 부끄러웠을 것 같으나 이제 와서 확인해 볼 수도, 그리고 확인 해 볼 마음도 없다.
우리는 그 대화가 있은 뒤 얼마 있지 않아 마지막으로 헤어졌다. 그리고 나는 다시 서촌 쪽에 가본 일이 없다. 헤어진 사람 중에 우연히 길에서 마주쳐 보고 싶은 이도 있고 아닌 이도 있다. 그녀는 전자의 경우이나 서촌에서 마주치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다. 왠지 내가 너무 비굴한 기분이 들 것 같다. 언젠가 다른 누구랑 다시 데이트를 하게 되는 날이면 그곳을 다시 찾게 되려나.
39살이 되려면 4년이 남았고, 이제는 그 정도의 시간은 별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사이에 나는 얼마나 변해 있을까. 계획 같은 거 잘 생각 안 하고 산다는 나에게도 39살까지의 계획이 있다면, 여전히 잘 말하기 힘들다. 결혼이나 취직 같은 구체적인 단어는 아직 내게 추상적이다.
다만 글을 조금 더 잘 쓰고 싶은 생각, 강의를 계속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살 수 있길 바라는 생각들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39살이 되기 전에 우연히 서촌에서 그녀를 마주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약속을 굳이 잡지 않고 우연히. 그러면 아마 우린 'PROJECT29'로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를 하겠지. 아마 그때도 정전기가 일 듯 건조할 것이다.
가능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에 질러두는 약속은 비겁하다. 지금 나의 그 말이 그러하다. 아마도 내가 그녀가 다닐 만한 길목에 굳이 서서 그녀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 한, '우연히' 만나게 될 일은 없을 듯하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건 정말 '거짓말 같은 이야기'이겠지. 아마도 그녀와 나 사이는 이 생에서 있을 만한 인연을 이미 다 박박 긁어서 썼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호기롭게 이것을 나의 'PROJECT39'라고 질러두는 게지. 비겁하지만 아련한 척, 아련하지만 대단히 그립지는 않은 척, 그리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조금은 보고 싶은 척. 그 정도의 척.
이 글을 어떤 식으로 마무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그녀와 나의 마무리도 그랬다. 대충 끝을내야 하는 걸 아는데 서로 어떻게 끝내는 것이 좋을지 몰라, 우리는 '끝'이라는 단어나 '헤어짐', '이별'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헤어졌다. 그런 이별도 어울렸다. 몇 년이 지나 39이란 숫자를 향해 나이를 먹어가며, 원해 왔던 것들이 이뤄져 가고 있다.
나는 더 멋있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고, 오래 바래 왔던, 문단 등단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나의 PROJECT39들이 이뤄져 나가면 그녀와 마주치는'거짓말 같은 이야기'도 일어나게 될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거짓말을 잘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