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하반기에 이뤄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두 회사의 대주주였던 국민연금기금이 손해를 감수하고 찬성 의결한 사건이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당시 청와대와 보건복지부 인사가 국민연금기금 관계자에게 합병에 찬성하라는 압력을 행사했다는 증언이 나온 것이다. 합병으로 인해 국민연금기금이 입은 손실은 주가 변동에 따라 3000억∼1조5000억 원으로 분석되었다. 물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총수일가는 합병으로 인해 통합 법인에 대한 안정적인 지분을 확보하였다.
국민연금기금의 이해할 수 없는 찬성 의결, 이로 인한 이재용 등 삼성 총수일가의 이득 사이에 미르·K스포츠재단 등에 대한 삼성의 239억원 지원이 매개돼 있다. 삼성의 이 같은 지원 행위가 사실상 뇌물이라는 주장은 법적 판단 이전에 지극히 합리적 의심이다. 이 의심이 진실로 확정될 경우, 2000만 국민들이 노후를 위해 적립한 국민연금이 이재용 등 삼성 총수일가의 호주머니로 흘러들어가고 그 중 일부가 박근혜·최순실 일당의 부정 축재 자금으로 제공되었다는 의미이다.
불법정치자금(또는 뇌물) '인류기업' 삼성이 시점에서 삼성그룹, 정확하게는 삼성그룹 총수일가가 부패한 정치권력에 제공한 불법정치자금 내지 뇌물의 역사를 다시 상기해보자. 이 역사는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 이승만 정권으로,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5.16 군사반란 이후 설립된 부정축재처리위원회는 이병철 회장이 자유당 정부에 4억2500만환의 불법정치자금을 제공하고, 33억502만환의 조세를 포탈한 사실을 밝혀냈다. 박정희는 이병철을 비롯한 부정 축재자들을 형사 처벌하지 않는 대신 벌과금을 부과하고 이 자금으로 공장을 지었다.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사건은 1995년 10월 박계동 민주당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문을 통해, 노태우 정권의 비자금이 4,000억원에 이른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이병철 회장은 전두환 정권에 1983년부터 1987년까지 8회에 걸쳐 220억원의 뇌물을 제공했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같은 액수를,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이 180억원,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150억원 등을 제공한 것이 드러났다. 이병철 회장은 1987년 사망해 기소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건희 회장 체제에서 삼성그룹은 노태우 정권에 현대와 나란히 250억원의 뇌물을 제공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당시 "재임 중 재벌들로부터 5000억원을 받아 사용하고 1700억원 가량이 남았다"고 밝혔다. 당시 짜장면 한 그릇 가격이 2,000원, 버스 승차권 300원, 최저임금 일급 1만2,000원 하던 시절이었다. 이건희 회장 등 재벌총수 8명, 기업인 35명이 뇌물공여 혐의로 불고속 기소되었으나 이건희 회장을 비롯 대부분이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05년 <MBC> 이상호 기자의 폭로로 소위 X파일 사건이 드러났다. X 파일은 1997년 대선을 앞둔 시기에 이학수 당시 삼성그룹 비서실장과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이 만나 이회창, 김대중 등 여야 대선 후보 캠프에 100억원대 불법정치자금을 제공하려 모의하고, 일부는 제공했다는 내용의 대화를 안전기획부가 도청한 파일이다. 녹취록에는 삼성이 자동차 분야에 진출하기 위해 강경식 당시 부총리에 대한 금원 제공 관련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이 사건은 불법도청한 자료의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다.
1997년에는 소위 '세풍 사건'이 있었다.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 측이 지지율 급락으로 기업들로부터 선거자금 모금이 어려워지자 국세청을 동원해 정치자금을 모금하려고 시도했다. 재판 과정에서 이회창 후보의 동생 이회성 씨가 삼성그룹으로부터 60억원을 수수했다고 진술했으나 검찰은 삼성그룹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2002년 대선에서는 그 유명한 '차떼기·책떼기' 사건이 있었다. 당시 삼성은 이회창 후보 측에 전달한 340억원을 포함, 여야 대선 후보에 총 385억원의 불법정치자금을 제공했다. 이 후보 측에 전달한 340억원 중에서 300억원은 국민주택채권으로 제공됐으며, 이 채권이 '책'처럼 제본돼 전달된 이유로 '책떼기'라는 별칭을 얻었다. ('차떼기'는 LG그룹이 현금 150억원을 탑차에 실어 통째로 전달한 것에서 얻은 이름이다.)
가장 큰 규모의 불법정치자금을 제공한 삼성그룹이지만, 이건희 회장은 한 차례의 소환 조사도 없이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검찰은 385억원 자금 출처가 이건희 회장 개인 재산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여 횡령 혐의조차 수사하지 않았다. 자금 전달책이었던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은 집행유예 판결로 불구속 상태로 있다가 판결 1년도 안된 2005년 5월 사면을 받았다.
삼성 총수일가와 재벌 권력의 해체 없이 민주공화국은 공염불
지금까지 살펴 본 것은 단지 정치권력과 삼성의 유착이다. 검찰과 판사, 행정 관료, 보수 언론과의 불법 유착 역시 각각 책 한 권의 분량으로도 다 담지 못할 불법과 편법을 담고 있다. 이 모든 일들을 관통하는 삼성 재벌의 목표는 총수일가의 부와 그룹 경영권을 세금을 내지 않고 대물림하겠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주공화국의 기초를 이루는 입법, 사법, 행정, 언론 등 공공의 영역이 사실상 삼성이 뿌린 뇌물에 매수되었다고 말하면 과장일까?
이제 국민연금기금이 천문학적인 손실을 감수하면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찬성한 배경에 청와대의 압력이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된 지금, 삼성 권력, 나아가 재벌 권력의 해체 없이 이 땅에 민주공화국이 가능한지 심각하게 물어야 한다.
노동당은 11월 18일 오전 11시 서울 서초동 삼성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것도 이 정국에서 이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이다.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삼성 이재용 부회장은 구속 수사를 받아야 한다. 노동당은 이날 △박근혜 게이트에 연루된 재벌 총수들에 대한 구속 수사와 경영권 박탈 △3% 안팎의 지분으로 거대한 기업집단 전체를 지배하는 재벌 지배구조의 개혁 △금융, 전자, 자동차, 조선, 석유화학 계열 주요 재벌 기업들의 경영권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18일자로 박근혜 퇴진·구속을 요구하는 광화문 단식 농성을 19일째 이어가고 있는 이갑용 노동당 대표는 이 자리에서 "재벌 권력을 이대로 두면 제2의 박근혜, 제2의 최순실이 다시 나올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