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정치인 개인에게 후원금을 송금해본 것은, 지난 4월 25일의 4차 대선후보 TV토론회 후다. 내 적은 후원금도, 이 토론회 직후 사흘 만에 심상정 후보 캠프에 모였다는 약 3억1천만 원에 포함되었다.
이날 토론회에서 나온 문재인 후보의 '동성애를 반대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합법화 찬성하지 않는다' 발언 연발 직후, 심상정 후보는 각 후보에게 주어진 자신의 장점과 정책을 어필할 수 있는 '1분의 시간'을 썼다.
"동성애는 찬성이나 반성을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라고 봅니다. 성정체성은 말 그대로 정체성입니다. 저는 이성애자지만 성소수자의 인권과 자유가 존중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그녀는 "TV를 보고 계신 수많은 성소수자들이 너무 슬퍼할까봐 1분 발언권 찬스를 썼다"고 설명했다.
1분의 '연대'
나에겐 문재인 후보 개인이 동성애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의 문제는 사실 하등 상관이 없었다. 엄밀히 말해, 나에게 이 사건은 '동성애 문제'이기 때문에만 중요했던 것이 아니었고, 난 이때 여유롭게 1위를 달리는 후보의 발언에 고통받을 내 성소수자 친구들의 얼굴만을 떠올렸던 것도 아니다.
나는 그 순간부터 '연대'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대통령에 관한 꿈을 꾸게 되었다. 진보적이거나 보수적,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신념, 정치공학적 사고 따위를 다 떠나서, 적어도 연대라는 것의 의미를 보여줄 수 있는 대통령을 갖고 싶다는 분명한 꿈을 꾸게 되었다. 성소수자, 그리고 거기에 장애인이, 여성이 들어설 수도 있는 '연대'의 자리를 아는 대통령. 그것이 이번 선거기간 모르는 사이 제도 정치에 관한 혐오에 젖어들고 있던 나에게 심상정 후보가 준 선물이었다.
그 토론회는 분명 개인의 '취향' 혹은 성적 정체성에 대한 개인적 인상을 논하는 자리는 아니다. 후보자들 개인이 가진 성적 정체성에 대한 감수성이 어느 정도인가를 평가하는 것보다 내게 이날의 토론회는 기본적인 인권을 사회에서 인정조차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 사회의 대통령은 어떻게 연대할 건지를 보여주는 자리로 새롭게 다가왔다. 그 자리에, 우리 새 대통령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인가? 어떤 태도와, 어떤 말로 거기 서 있을 건가?
때문에, 현재 한국에서 가장 사회적으로 배척받는 (그렇다, 그야말로 "사회적 합의"에 대한 '시도'조차 지극히 힘든) 소수자 집단이라 할 성소수자들이 "너무 슬퍼할까봐" 1분을 썼다는 심상정 후보의 마음에 감동했다. 그가 보여준 연대의 태도에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심상정 후보가 사용한 그 1분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멍 때리다 휙 보내 버릴 찰나의 시간이고, 프라이팬 위에 먹음직스러운 달걀이 순식간에 까맣게 타버리기에 충분한 시간이며, 지금 막 태어난 아이의 생일이 뒤바뀔 수 있는 시간이다.
그 1분은, 또한 한국 사회의 인권 역사에 오랫동안 기억될 귀중한 1분이 되었다. 동시에 나는, 그 시간이 분명 현재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와 그 지지자 중 많은 이들을 각성시켰을 시간이라고도 믿는다.
거리 유세 중인 심상정 후보를 만난 많은 청년들이 그렇게들 눈물을 흘린다는 기사를 보고 '어, 그렇구나' 싶었는데, 정신 차려보니 어느 순간부터 내 얘기였다. 이제는 말해야 할 성소수자의 인권에 대해, 청년의 빈곤에 대해, 슈퍼우먼이 되지 않으면 미안해지는 여성의 고통에 대해, 노동자가 일군 토대 위에서 너무도 일찍 죽어가는 노동자들에 대해, 세월호 유가족의 아픔과 성주군 주민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는 심상정 후보의 당찬 연설을 볼 때마다 눈물이 찔금 난다. 우리는 언제 이런 연대의 의미와, 역할을 아는 대통령을 가질 수 있나? 여전히 '나중에'일까?
다시, '여성' 대통령 말하기
사실 다시 생각해보면, 심상정 후보가 명확히 각인된 것은 그날의 토론회보다 더 이전, 심상정 후보가 여성으로서 겪어온 삶의 경험과 남편과 만들어온 파트너십에 대한 이야기를 안 덕분이다. 남편 이승배씨의 인터뷰는 심각하게 남성중심사회인 한국에서 내게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심상정 남편'이라 불리는 것에 대해 "그게 뭐 어때서? 영광이지!"라고 받아들이는, "심상정의 남편으로 살아가는 게 민심을 제대로 대변하는 진보 정당이 성장하는 데 기여하는 제 방식"이며, "제 처가 긍정적 기여를 하도록 옆에서 돕는 게, 제가 살아가는 존재조건의 핵심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파트너십과 자신을 지지하는 가족을 경험한 여성 대통령을 상상하는 것은 정말 내게 흥분되는 일이었다.
실제로 그들의 꿈, 능력, 노력과 열망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여성들은 자신의 남편/애인의 꿈과 명예를 위해 나를 접고, 옆에 서서 미소짓거나 '내조'하는 보조자로서의 역할로 만족하길 강요받아 왔다. 그것이 우리의 지배적 역사, 정치판, 회사 생활, 학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억압을 헤쳐 나온,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한계 짓는 삶을 거부해온 제대로 된 '여성' 대통령 후보를 가졌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란 허위적인 구호를 달고 선거에 나온 분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사람들 머릿속에 날카롭게 남아있지만, 우리는 이 기회를 통해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에 대한 기억을 바꿀 수 있다. 이젠 말할 수 있다. 심상정을 당당한 '여성 대통령 후보'라고 말이다. 지금 그녀는 나의 '자부심'이 되어있다.
우리 표는 언제 '사표'가 되는가심상정 후보의 지지율이 초반 여론조사 때에 비해 5배 이상 상승했지만, 선거일이 가까워지면서 심상정 후보 지지자들은 또 다시 고질적인 '사표론'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이제껏, 최선을 알고 있음에도 '차선' 혹은 '차악'을 위해 양보하길 수없이 요구 받아왔고, 그리 했다.
우리의 표는 어떨 때 정말로 '죽은' 표가 되었을까? 시민들이 만들어준 정치인들이 제멋대로 난장판을 만드는 걸 보며 견딜 수 없는 정치 혐오에 시달릴 때, 우리가 표로 제시한 소중한 의견이 더 이상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음을 발견할 때, 우리 한 명 한 명이 모두 주권자들이란 사실이 묵과되었을 때다.
'나중'은 없다. 늘 지금이 아니라면, 최선은 언제일지 모를 '나중'으로 무한 연기될 뿐이다. 시민들은 지난 세 계절 동안 눈, 비를 이겨내고 주말 휴식을 반납하며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을 반대해왔다. 이제는 이 역할을 가장 잘 완수할 수 있는 대통령을 뽑을 때다. 이를 위한 나의 선택에 대해 존중 받을 권리가 있음을 난 느낀다.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전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표'가 아니라, 드디어 과거 아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진정한 표다.
나 역시 이 사랑스러운 심상정 후보에 붙은 '심블리'라는 애칭을 즐겨 부르곤 했지만, 우리는 정치인 '덕후' 혹은 정치인의 '팬'이지 않아야 한다. 그들은 우리가 한철 소비하는 셀러브리티도, 그 어떤 발언과 정책을 펼치든 포옹해야 마땅할 묻지마 사랑의 대상도 아니다. 우리는 최악의 대통령 명단에 추가될 또 한 명의 대통령을 이제 막 끌어내린 당당한 시민들이고, 우리를 주권자로 인정하지 않는 정치인을 향해 합당한 존중을 요구할 자격을 지닌 사람들이다. 이 생각이 바로, 내 표를 '사표'로 전락시키지 않을 수 있게 할 자존감이 된다.
마지막으로, 나는 타 후보의 네거티브에 기댄 글을 쓰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 사람' 얘기는 좀 하고 끝내야겠다. 적어도 민주주의, 평등과 인권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의 동등한 대통령 후보로 인정하기 힘든 저 돼지발정제 후보 정도는, 적어도 심상정 후보가 무난히 '제껴야' 하지 않을까? 전근대적 후보는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 버리고 이제는 우리, 2017년의 대통령을 맞자.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사회과학 연구자로, <사표의 이유>,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공저) 저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