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역대정부 출범때마다 내놓은 단골 경제 공약은 '재벌개혁' 이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말할것도 없고, 박근혜 정부도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을 말했다. 하지만 결과는 '역시나'였다. 오히려 재벌의 경제력 집중은 더욱 심화됐고, 이들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은 더 커졌다. 국민경제는 양극화로 몸살을 앓았고, 시민들의 삶은 팍팍해졌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21세기 한국을 70년대 '정경유착' 시대로 되돌려 놓았다.
재벌과 정치권력의 적나라한 불법 동맹이 드러나면서, 한국사회에서는 또 다시 '재벌 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진보진영 뿐 아니라 보수쪽도 마찬가지다. 현직 대통령의 탄핵으로 조기 대선이 가시화되면서, 여야 대선후보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과연 이번엔 어떨까.
야당 대선후보로 꼽히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재벌개혁'에 대한 의지는 전보다 훨씬 강했다. 10일 오후 서울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재벌척폐 청산, 진정한 시장경제로 가는길'이라는 토론회 자리였다. 이날 토론회 기조연설자로 참석한 문 전 대표의 연설은 사실상 재벌개혁의 공약이나 다름없었다.
문재인 "단호하게 정경유착 고리 끊고 재벌적폐 청산해야"우선 그의 재벌경제에 대한 인식은 매우 비판적이다. 반칙과 특권, 부정부패로 서민경제를 무너뜨렸다고 했다. 그는 "(재벌경제가) 경제성장의 걸림돌이 되고 재벌 자신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기에 이르렀다"면서 "이번에 단호하게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재벌적폐를 청산해야 우리 경제를 살리고, 국민 모두 잘 사는 나라로 갈 수 있다"고 말했다.
문 전 대표는 "그동안 역대정부마다 재벌개혁을 공약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라며 "정부의 의지가 약한 탓도 있었고, 규제를 피해가는 재벌의 능력을 정부가 따라가지 못한 측면도 있다. 그래서 저는 이것만큼은 꼭 하겠다는 실현가능한 약속만 하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이날 발표한 재벌개혁은 크게 세 가지 방향이다. 하나는 지배구조 개혁을 통한 경영구조를 투명하게 하는 것. 또 하나는 재벌의 확장을 막고, 경제력 집중을 줄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재벌과 중소기업간 불공정 거래를 금지하고, 각종 조세감면 특혜 등을 폐지,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그의 재벌 개혁은 당장 모든 재벌에 해당되지는 않을 듯하다. 그는 "재벌도 양극화돼서, 경영이 어려운 재벌도 많다"면서 "재벌 가운데 10대 재벌, 그중에서 4대 재벌의 개혁에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벌 소유지배구조 개선에 대해선, 총수일가 전횡을 막기 위한 집중투표제, 전자투표 등을 도입하고, 공정한 사내 감사위원과 이사가 선출되도록 제도화 하겠다고 했다. 또 공공부문부터 노동자추천이사제를 도입하고, 재벌에도 확대하겠다는 것. 그는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하는 길을 열겠다"고 했다.
또 소액주주 권리 강화를 위해 대표소송 단독 주주권을 도입하고, 다중대표소송과 다중 장부열람권의 제도화도 약속했다. 재벌의 중대 범죄에 대해선 '무관용의 원칙'을 세우겠다고 했다.
범정부차원의 '을지로위원회' 구성, "재벌의 골목상권 침해 강력 규제할 것"문 전 대표는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막기위해, 지주회사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했다. 그는 "무늬뿐인 지주회사로 오히려 재벌의 문어발 확장의 수단이 되고 있다"면서 "지주회사 요건과 규제를 강화하고, 자회사 지분 의무 소유 비율도 높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벌의 서민 골목상권 침해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규제하겠다고 했다. 일감몰아주기, 부당내부거래 등 재벌 갑질 횡포에 대해 전면적 조사와 수사를 강화하겠다는 것. 또 검찰과 경찰, 국세청, 공정위, 감사원 등 범정부차원의 '을지로위원회'를 만들겠다고도 했다. 그는 "중소기업에 적합한 업종은 중소기업이, 서민기업에 적합한 업종은 서민기업이 경영하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재벌과 금융을 분리하는 금산분리와 함께 통합 금융감독시스템도 구축하겠다고 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불공정거래를 개선하기 위한 제도 개선도 약속했다. 그는 "중소기업이 살아나는 경제로 전환해야 한다"면서 "재벌 대기업의 700조 사내유보금이 중소기업과 가계로 흘러가게 해야한다"고 말했다. 재벌 갑질 횡포에 대해선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강화하는 등 특단의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했다. 소비자 보호를 위한 강력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도 강조했다.
국민연금을 비롯한 기관투자자들이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법도 보완하겠다고 했다. 그는 "삼성물산 합병에 국민연금이 동원되는 것과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재벌에게 그동안 주어졌던 각종 특혜구조도 폐지하거나 축소하겠다고 했다. 재벌에 주어졌던 각종 조세감면 제도는 폐지 또는 축소해서,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에게 지원하겠다는 것. 대기업에게 혜택이 집중되는 산업용 전기료도 현실화하겠다고 했다.
"재벌개혁으로 새로운 경제질서 만드는 것이 정부 할 일"문 전 대표는 "재벌개혁이야말로 기업에게 새로운 성장동력"이라며 "경제정의와 함께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는 "소수 재벌 대기업만이 아니라 중소기업과 골목상권, 가계 등이 함께 성장하는 국민성장을 이루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또 "재벌개혁으로 새로운 경제질서를 만드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라면서 "그러나 정부의 힘만으론 부족하다. 시민이 공정한 시장경제질서를 만드는데 참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문 전 대표는 이어 "위기가 기회"라며 "우리가 정경유착,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고 재벌개혁을 제대로 해낸다면, 우리의 경제 잠재성장율을 더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전문가들도 재벌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구체적인 추진방향과 대안을 제시했다.
최정표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재벌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다"면서 "재벌의 집중과 횡포를 막기 위한 제도를 개선하고, 최종적으론 재벌 대신 새로운 기업체제로 가야한다"고 주장했다. 최 교수는 현행 공정거래법상의 재벌 지정 방법부터 바꾸고, 출자총액제도를 반드시 도입해야 한다고 했다. 또 지주회사의 재벌 세습 악용 방지를 비롯해 총수 전횡 방지를 위한 집중투표제 도입 등 10여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박근혜 대통령도 후보시절에 재벌개혁을 약속했었다"면서 "대통령 후보의 약속보다는 개혁에 대한 의지와 리더십을 보여주고, 국민이 신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진보진영의 재벌 개혁 방법론도 변해야 한다"고도 했다.
또 "삼성도 법앞에 예외적이선 안 된다"면서 "이재용 부회장도 불법행위를 하면 감옥에 갈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이어 차기 정부에선 공정거래법과 상법 등을 보완하고, 대기업집단법이라는 특별법 형태로 재벌을 규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