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 갖게 되는 소소한 즐거움들이 있다. 자식들의 분가 이후 자기 개발, 등산이나 요가 등... 미루어 두었던 취미 생활을 시작하기도 한다. 내 경우엔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들이 자라고 나서 부엌에서 즐거움을 찾게 되었다.
한참 커가는 아이들을 양육하고 먹고 사느라 하루가 어찌 지나는지 몰랐다. 정신 없던 시절, 하루 한끼 메뉴를 선정하는 것조차 버거웠었다. 혼자 살았다면 까짓거 한 끼 굶어도 되고 여차하면 찬밥에 물 말아서는 김치 반찬 하나만으로 떼울 수도 있을 것이지만, 초롱 초롱한 눈빛으로 엄마 밥을 기다리는 아이들과 하루 종일 업무에 찌들은 남편을 위해 감기에 걸려도 제대로 앓아 누워본 기억이 없다.
어쩌다 감기에 걸려 약을 먹고 드러누워서도 혹은 온몸에 열이 펄펄 나거나 수도꼭지 같이 콧물을 질질 흘려가면서도, 한끼 식구들의 밥을 놓치지 않기 위해 버둥댔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내게 부엌은 강박과 조바심의 현장이었다. 즐거웠던 기억이 가물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아이들이 커가며 언젠가부터 나혼자 밥을 먹는 일이 잦아졌고, 세 식구가 모여 앉아 밥먹는 시간의 귀함을 느끼게 되면서 나는 생각을 바꾸게되었다. 의무감으로 매 끼를 준비하면서 시간에 쪼들리고 종종대던 부엌에서의 날들을 뒤로하고, 여유 있는 한끼 밥상과 아기자기한 테이블 세팅을 준비하고픈 열정이 살아난 것이다.
시대가 좋아져 사회생활로 바쁜 주부들 혹은 혼밥족들에게 트렌드로 자리 잡은 밀키트도 꽤나 매력적이긴 하다. 하지만, 완성된 한 접시를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마켓에서 재료를 사 와서 다듬고 송송 썰거나 채를 치고, 준비된 음식을 접시에 옮겨 담아 멋진 세팅을 하는 것까지. 그 모든 과정이 요리의 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함께 밥을 먹을 대상자가 늘 같이 지내는 가족일 수도 있고, 오랜만에 찾아온 분가한 자식들일 수도, 혹은 알콩달콩 지내는 연인일 수도 있다. 그런 대상자를 생각하며 요리하는 시간은 그 자체가 행복으로 기억될 인생의 한 순간임을 의심치 않는다.
나의 18번 요리, 주꾸미 볶음
아웃도어를 즐기는 내겐 십팔번 요리가 있다. 어느 누구와 함께 캠핑을 떠나도 내가 해오길 청하는 음식은 딱 한가지, 주꾸미 볶음이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특별히 손맛을 타고 나지 않은 나도 부끄럽지만 주꾸미 볶음만큼은 자신있게 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주꾸미는 봄이 제철이다. 하지만, 통통 터지는 듯한 식감의 알과 씹히는 식감만 고집하지 않는다면 어느 때 어느 곳에도 어울리는 음식이 주꾸미이다. 한국 음식 양념 대부분의 것을 넣어 버무려 준비해 놓고 어느 정도 양념이 주꾸미에 배어 들 때쯤 팬에 구워 먹거나 숯불에 구워 먹으면 훌륭한 한 접시 메뉴로 완성이 가능해진다. 양념도 쉽고 요리하기도 간단해서 누구가 해 먹기 쉬운 주꾸미다.
조금은 귀찮을 수도 있으나, 주꾸미를 맛있게 먹기 위해선 양념 전 주꾸미를 부드럽게 해주는 과정이 조금 필요하다. 내가 사는 미국에서 판매되는 주꾸미는 모두 냉동 상태라고 보면 된다.
냉동 상태의 주꾸미를 해동시킨 후 가장 먼저 할 작업은 깨끗이 씻는 과정이다. 밀가루 한줌과 굵은 소금을 넣고 빨래 빨듯이 박박 문질러 희멀건 물이 없어질 때까지 깨끗이 닦는다. 세척이 끝났으면 팔팔 끓는물에 소금을 한 스푼 넣고 주꾸미 머리까지 모두 잠기게 한 후, 집게로 뒤적거리며 5~7분 정도 삶아내 체에 받혀 식힌다.
주꾸미가 식을 동안 각종 채소를 준비한다. 내가 즐겨 쓰는 채소는 각색의 파프리카. 노랑, 녹색, 주황색의 파프리카를 어른 가운데 손가락 크기로 잘라 준비하고, 양파와 파는 넉넉히 썰어 준비한다. 식힌 주꾸미를 넓은 그릇에 담고, 미림과 후추를 뿌린 후 마늘 간 것과 고춧가루를 조금씩 넣으며 버무린다.
고춧가루는 고운 것과 적당한 굵기 것을 반반씩 넣어 색감이 예뻐지도록 조절하며, 참기름은 3~4 방울 정도만 넣어 강한 향이 나지 않게 한다. 매실청을 조금 넣고 가는 소금을 넣어가며 간을 하는데 되도록이면 간을 심심하게 하려는 편이다.
불에 굽다 보면 양념이 쪼그라들고 간이 강하게 되는데 혹시라도 싱거울 경우 나중에라도 소금을 좀 더 넣으면 간은 적당해진다. 매콤한 맛에 먹는 음식이므로 굳이 간이 세지 않아도 먹을 수 있어 적당한 간이 오히려 맛나다.
누룽지가 된 볶음밥까지 한 입... 이 환상의 코스
마지막으로 주꾸미의 맛을 좌우하는 게 불맛이 아닐까 한다. 물론 숯불에 직접 굽는 것도 맛있겠지만, 집에선 매번 숯을 준비하기도 번거롭고, 짧은 일정의 캠핑에서 숯이 만들어지기까지 기다리는 것 또한 만만치 않다.
내가 늘 쓰는 불판은 미국에선 'Cast Iron'이라 불리는 무쇠 불판이다. 아직도 Cast Iron 팬만을 고집하는 미국 주부들이 여전히 있긴 하지만, 장성한 남자들이 들어도 무거울 만큼 손목이 나가기 십상인 이 불판은 상당한 수고가 따라야 하는 요리 장비이다.
또, 매번 쓰고 난 후 세제 없이 뜨거운 물로 세척한 후 기름을 발라 불에 굽는 시즈닝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이런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두꺼운 불판 전체의 온도가 천천히 달아오르고 오래도록 유지되는 탓에 쉽게 타지 않고 불맛을 낼 수 있는 이 무쇠 불판은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다.
나도 무쇠 불판을 오랫동안 쓰느라 손목이 남아나지 않긴 했지만, 불맛을 내는 데는 이만한 게 없다 생각하기에 아직까지 포기하지 못하고 애용하고 있다.
간편한 요리기구와 일회용품이 난무하는 캠핑장에 나타나, 이 무쇠판에 주꾸미를 구우면 모두들 와~ 하는 감탄사와 함께 마치 비싼 일본 철판구이집의 셰프를 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준비 과정에서 어느 정도 삶아진 주꾸미인지라, 10여 분 정도 익히면 이미 완성된다. 준비해 간 야채에 밥을 조금 넣고 한 줌에 싸서 입에 넣고 들이키는 한잔 소주의 맛. 안 먹어본자는 있어도 한 번 먹어본 자는 없다는 내 이름 석자 달린 '마징가 아줌마표 주꾸미'.
건더기를 모두 건져먹고 조금 남아있는 재료에 찬밥을 털어 넣은 후, 바삭한 김가루 부수어 뿌리고 깨소금 솔솔 뿌려 볶아주다가 무쇠판에 꾹꾹 눌러 밑바닥이 바삭하게 익도록 해먹는 볶음밥을 한 번쯤은 먹어봤을 것이다. 제 아무리 다이어트 중인 사람도 그 유혹을 떨치긴 가히 어려운 일이다.
사막의 나라 캘리에도, 어느덧 맹렬한 더위가 물러나고 유칼립투스 나무 그늘 아래로 선선한 간간히 바람이 불어오다가 한 번의 가을비가 내리고 나니 서늘한 밤 기온이 체감되는 날씨가 곧 이어지고 있다. 이런 모습으로 짧게 잠깐 머물고 떠나는 것이 캘리의 가을이다. 인간도 짐승도 살찌게 되고 한없이 따뜻한 것을 찾게 되는 이러한 계절에 이루어지는 캠핑 메뉴에는 어김 없이 나의 주꾸미가 등장한다.
가을이 깊어지고 어쩌다 한밤 중 기온이 화씨 30도 이하로 떨어지는 날이라도 될 때면 여지없이, 맛있게 익어가면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불판에서 살짝 그슬려진 검붉은 빛의 주꾸미가 뜨겁게 유혹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둘러앉아 마시는 한잔 소주만으로도 얼큰히 취하기 십상인 가을밤에, 나를 홀리는 주꾸미의 자태며 그 맛은 자못 치명적이기까지 하다. 이런 맛을 제철에만 느끼긴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