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밥돌밥(돌아서면 밥 돌아서면 밥)', '돌밥돌설(돌아서면 밥 돌아서면 설거지)' 코로나 시대 신조어다. 전업주부인 나는 이제 누가 불러도 돌아서기 싫을 정도가 되어버렸다. 아침에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들이 등교하는 것이 오히려 이벤트처럼 여겨진다.
고등학생인 아들은 벌써 자가격리를 두 번 했다. 지금도 기말고사 기간인데 하루 시험을 보고 동급생 확진자가 나와서 나머지는 연기되었다. 이런 불확실성에 몸도 적응이 되어간다. 하지만 단 하나, 세끼를 해결해야 하는 숙제는 여전히 무겁고 버겁다.
영양학을 전공한 탓인지 덕인지 내가 유일하게 탐내는 것은 오로지 건강한 식재료다. 그런데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먹여 살리느라 내가 죽을 지경이었다. 인공조미료를 사본 적이 없으니 맛을 내려고 다지고 채 썰고 육수를 직접 만들었다.
손목이 시큰하고 욱신거리는 건 고질병이 되었다. 뭐 먹을까 검색하고 식재료를 주문하느라 종일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세끼로 하루가, 한 달이, 내 인생이 다 가는 듯했다. 무거운 세끼의 쳇바퀴 속에서 무력해질 즈음,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밀키트가 건강식?
얼리어댑터인 남편은 쇼핑을 좋아한다. 좋아하고 자주 하다 보니 꽤 손맛이 좋은 낚시꾼처럼 물건을 잘 사 온다. 언제부터인가 밀키트를 낚아오기 시작했다. 끼니 숙제를 덜어주겠다는 선의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선물을 전달하듯 나에게 전해주었다.
제발 조미료 가득한 이런 음식은 사양한다고 애원했지만 소용없었다. 남편은 브랜드와 메뉴를 달리하면서 얼리어댑터의 임무를 충실히, 꾸준히 해나갔고 나는 잔반 처리반처럼 밀키트를 체험했다.
올 10월 한 신문사에서 2022년 식품 트렌드 기획 기사를 냈다. 1편이 '모순적인 소비자, 맛·건강·간편성·친환경 다 원한다'였다. 코로나로 집밥이 중요해지면서 가정간편식(HMR)과 밀키트의 판매가 급증했다.
맛과 건강을 넘어서 '미닝 아웃'(meaning out: 개인의 신념이나 가치관을 표출하는 소비 행위) 소비자가 늘어나고 있다 했다. 맛있으면서도 친환경, 유기농을 고수하고 먹고 난 쓰레기까지 신경 쓰게 된 것이다.
지난 일 년 동안 내가 경험한 밀키트는 진화했다. 발전이 아니라 진화! 내가 손수 공들여 장을 본 만큼 식재료는 싱싱하고 조리법은 간단하다. 그리고 재활용 가능한 간편한 포장으로 되어 있어 쓰레기를 만드는 죄책감을 덜어준다.
재료별로 원산지는 꼼꼼히 표기되어 있고 요리별 칼로리는 어떻게 식단을 구성해야 하는지 잘 알려준다. 온몸(?)으로 시행착오를 겪었고, 이제는 자신 있게 추천할 만한 브랜드별 메뉴 리스트가 생겼다.
나에게 건강식이란 건강한 재료로 만든 음식을 즐겁게 먹는 것이다. 밖에서 사 먹거나 배달 음식을 먹고 나면 내 장은 시골 장터보다 더 시끄럽다. 즐겁게 먹어도 속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식탁을 차리느라 내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준비 과정이 길고 험난하면 정작 나에게는 노동일 뿐이다. 밀키트 예찬론자까지는 아니지만 밀키트가 건강식이 될 수도 있다는 데 한 표를 던진다.
올해 연말 식탁(feat.밀키트)
해마다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은 생일보다도 근사하게 준비했다. 온 세상이 한마음으로 서로를 축복하는 때에 우리 가족도 동참하는 의미였다. 그리고 아이들이 당연한 가족 행사로 알아주었으면 했다. 일주일 치 식비를 몽땅 터는 것에도 주저함이 없었고 살아서 배달되어 온 랍스터를 잡는 것도 기꺼이 감수했다.
12월에 들어서자마자 연말 메뉴로 이것저것 떠올랐다. 그런데 기말고사가 연기되고 그로 인해 학원의 방학 특강 일정이 조정되면서 이브도 크리스마스 당일도 아이들은 학원에서 저녁을 보내게 되었다. 네 식구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두 시간 정도의 점심시간뿐. 그래서 고된 노동을 피하고 건강하고 맛있는 요리를 즐기기 위해 밀키트를 선택하기로 했다.
오랜 메뉴 검색 끝에 토마토해산물 스튜와 브루스케타를 주문했다. 여기에 따로 장을 봐서 채끝 스테이크를 굽고 가벼운 샐러드를 곁들일 거다. 그리고 식탁 가운데는 미니 트리를 놓을 것이다. 가족의 눈을 가리지 않고 음식에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은 만큼 조그마한 걸로.
이렇게 밀키트와 엄마표 요리를 믹스 매치해서 건강한 식탁을 차려보려고 한다. 이브날 아침에 정성스럽게 포장된 박스가 문 앞에 도착할 것이다. 그러면 가벼운 아침 식사 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앞치마를 두르고 여유롭게 점심 준비가 시작될 것이다.
올해도 변함없이 건강한 음식을 먹으며 웃고 떠들면서 한해를 잘 마무리할 것이다. 올 연말 구세주 밀키트,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