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잡지나 이미 수명이 다 한 물건, 잊힌 사람들을 찾아 넋 놓고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이상하게 그런 것들이 궁금하고, 궁금해서 찾아볼 수밖에 없는 사람의 '이상한 구경기'를 시작합니다. [편집자말] |
"요즘 트렌드인 Y2K 패션 아이템은 다들 마련했겠지?" "그게 뭔데?" "티셔츠는 짧고 딱 붙어야 돼! 그리고 바지는 통이 넓어야 해! 성수동, 연남동 가면 다들 그렇게 입고 있다구~!" "뭐? 그게 정말이야? 그럼 나도 이제 Y2K 입으러가야지!" 가을 옷 구경을 위해 들어간 자라 홈페이지를 보고 세기말을 콘셉트로 한 브랜드 광고가 흘러나오는 공상에 빠졌다.
패션 브랜드들의 Y2K 컬렉션
물론 자라의 홈페이지는 이런 상상보다 더 '힙'하다. 'Y2K, METABUS' 카테고리를 클릭하니 색색의 헤어스타일을 한 아바타들이 나를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Y2K CREATURES'. 세기 말을 만들어가는 존재들이란 뜻일까? 자라의 Y2K 컬렉션은 3D아바타를 기반으로 하는 가상현실 플랫폼 제페토와 협업한 결과다.
패션커머스 지그재그에서도 관련 아이템을 큐레이션 했다. 카고팬츠와 함께 진과 쇼츠의 합성어인 '조츠(Jorts)'를 트렌드로 제시한다. 마침 더운 여름이 지났기 때문에 주머니가 달린 카고팬츠와 조츠에 어울리는 웨스턴 부츠를 착용하기 딱 좋다. 여기에 은색 테의 선글라스와 실버 액세서리를 착용해주면, 당신은 부정할 수 없는 트렌드세터다.
2000년대 당시 이런 패션 아이템을 애용했던 이들이 돌아온 이 유행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다. "역시 다시 유행이 올 줄 알았지!"라며 카고바지를 꺼낼까? 아니면 "대체 이게 왜 다시 유행이지...?" 하고 의문을 품을까?
자라의 Y2K 페이지에서 소개하는 아이템은 초커 디테일의 박시한 니트, 일부러 옷감을 빈티지하게 만든 크롭니트, 핑크색 아기공룡모양 가방, 청키 힐 부츠 등이다. 스크롤을 조금만 내리면 이 아이템들이 빙빙 돌면서 마치 게임 서버에 접속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한두 마디로 어떻다고 정의하긴 어렵지만, Y2K패션을 '3줄 요약' 느낌으로 접하고 싶다면 이런 큐레이션을 참고하면 될 것 같다.
이것으로 Y2K패션에 대한 나의 아리송함이 모두 해소된 건 아니었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서 'y2k aesthetic(미학)'을 검색했다. 여러 톤의 핑크색 아이템과 체인, 벨트, (90년대에 '쫄티'라고 불렸던 핏의) 크롭 탑, 투명한 CD플레이어, 펄 립글로즈가 등장했다. 더 전문적인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끼던 찰나, 'y2k aesthetic'을 10분여내로 설명해주는 영상이 눈에 띄었다.
패션 뿐 아니라 음악이나 인테리어에도 Y2K 무드는 반영되었고,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아직 눈에 보이지 않았거나 만들어지지 않은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크롬, 아이스블루 등의 색상이 뮤직비디오나 의상에 활용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 유튜버가 일러준 내용을 잘 기억하면서 오래된 잡지를 다시 뒤적거렸다.
크롭탑, 90년대엔 쫄티였어
2000년 1월호 <엘르>에는 'Y2K 패션 오디세이'라는 코너가 있다. 영화 속 장면들에 근거해 몇 가지 패션 키워드를 제시하는데, <매트릭스>에서 키아누 리브스가 입은 블랙 롱 코트 스타일이나 실버, 홀로그램 광택이 도는 의상, 몸에 달라붙은 점프수트가 1990년대 말 영화에서 자주 등장한다는 점을 짚는다.
1996년 6월호 잡지 <오렌지룩>과 2001년 3월호 잡지 <싸가지TV>에서도 '한마디로는 설명 못하지만 유행하는 그 스타일'의 기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싸가지TV>에서 2001년 봄 스타일로 제안하는 건 골반에 맞춰 입는 패턴 스커트와 가디건이다. 하의는 오버사이즈로, 상의는 몸에 딱 맞는 핏으로 입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내가 구한 잡지 <오렌지룩>은 1996년에 발행된 것이지만 소개된 스타일링은 'Y2K'스럽다. 이 잡지에 따르면 민소매와 팬츠를 매치할 때는 다음 사항을 명심해야 한다. '상하의 색상 배합에 주의한다. 같은 소재로 매치할 경우에는 산뜻한 느낌을 줄 수 있다. 통이 넓은 팬츠에는 몸에 꼭 맞는 슬리브리스를 매치 시키는 것이 좋다.' 모델들은 배꼽과 골반라인에서 시작되는 바지를 입고, 렌즈나 테에 컬러풀한 색감이 들어간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중고거래에서도 핫한 'Y2K' 키워드
이렇게 잡지에서 아이템을 보고 구매하던 유행의 탄생을 지나온 지금, 2000년대 초반의 디자인이 살아있는 중고 아이템을 구하는 이들도 많지 않을까? 물건들의 톤과 취향이 일관되지 않은 채 무작위로 모인 당근마켓이나 번개장터 등에서 'Y2K' 키워드는 더욱 과감하게 재현됐다.
색색의 퍼가 트리밍 된 바지나 카모플라쥬 패턴의 미니스커트, 나일론 소재의 긴 바람막이, '갸루(특유의 화장법을 한 여성을 지칭하는 일본어)', '하이틴' 스타일의 키링 등. 사실 난 워싱이 심한 청바지는 절대 다시 유행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방금 이 아이템까지 Y2K 콘셉트로 팔리는 걸 봐버렸다. 역시 유행은 '존버'가 답인가보다.
옷으로 시작해서 정서로 완성되는 게 스타일이다. <오렌지룩>의 앞쪽 페이지를 장식한 나인식스 뉴욕과 인터크루 광고에서 모델들은 딱 붙는 민소매 티셔츠나 수영복, 오버롤을 입고 있는데, 사진 속 포즈나 빛의 노출 정도가 어쩐지 최근 인스타그램에서 자주 보이는 사진의 특징을 공유하는 듯하다.
거기 말고도 어디서 본 것 같아서 계속 보고 있자니, 아까 자라 홈페이지에서 날 쳐다봤던 제페토 아바타들의 표정과 똑같아서 흠칫 놀랐다.
<오렌지룩>의 거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1950년대 아메리카의 여유로운 낭만과 세련된 개성을 표현하는 복고풍 패션잡화 FOSSIL.' 소개된 파슬의 선글라스들은 패션 커머스에서 본 제품들이나 힙한 아이템으로 꼽히는 사이파이 선글라스와 비슷한 디자인 요소를 공유한다.
그렇다. '복고'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는 사실을 'Y2K'에 빠져 잠깐 잊고 있었다. 세기말 패션을 잘 들여다보면 또 다른 시대의 복고와 유행이 겹쳐져 있음을 알게 되지 않을까. 스타일을 세세히 해부하는 건 돌아온 Y2K 아이템을 구경하는 것만큼이나 즐거운 엔터테인먼트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