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잡지나 이미 수명이 다 한 물건, 잊힌 사람들을 찾아 넋 놓고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이상하게 그런 것들이 궁금하고, 궁금해서 찾아볼 수밖에 없는 사람의 '이상한 구경기'를 시작합니다.[편집자말] |
1994년 2월 1일 경향신문의 '드라마 <마지막승부>, <농구대잔치> 여파 청소년 농구열풍'이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이 같은 농구 신드롬은 SBS가 방영하는 NBA농구와 농구경기를 소재로 한 일본만화 <슬램덩크>, 그리고 <마지막 승부>로 이어지면서 열기를 더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드라마를 보기 위해 청소년들이 학원도 빠졌다고 하니,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기점으로 <슬램덩크> 덕질이 풍부해지는 지금 <마지막 승부>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보는 것도 '농놀('농구놀이'의 준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들어가기에 앞서 나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로 <슬램덩크>에 빠졌고, 영화 4차 관람을 앞두고 있다. 그리고 리마스터링된 <슬램덩크>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다는 점과 전권을 아직 읽진 못했지만, <챔프> 슬램덩크 특별판으로 대강의 줄거리를 익혔음을 밝힌다. 오래된 <슬램덩크> 덕후는 아니지만, <슬램덩크>의 여운을 즐기고 싶은 이들에게 '농놀' 친구로서 <마지막 승부> 속 농구를 소개해본다.
드라마 삽입곡 '마지막 승부'의 마법
사실 처음부터 <슬램덩크>와 <마지막 승부>가 겹쳐보였던 건 아니다. 옛날드라마를 좋아하긴 하지만, <마지막 승부>는 문턱이 있었다. 스포츠를 다룬 작품도 잘 안 보는데, 1994년에 방영한 농구드라마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 승부>를 정주행 했다. 그리고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고 집에 가는 길에 김민교가 부른 '마지막 승부'를 찾아들었다(곡의 표절 여부 및 이후 벌어진 해프닝은 이 글에서는 생략해야 할 것 같다).
'힘이 들면 그대로 멈춰 눈물 흘려도 좋아, 이제 시작이란 마음만은 잊지 마, 내 전부를 거는 거야, 모든 순간을 위해…'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강렬한 사운드트랙만큼이나 북산의 모든 멤버에게 어울리는 가사라고 생각했다. 영화의 'N회차' 관객들에겐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두근거림이 차오르는 귀갓길에 '마지막 승부'를 들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다.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곡인만큼, 드라마는 OST를 십분 활용한다. 농구부원들이 학교에서 연습 할 때도, 대회에 출전했을 때도, 기합으로 운동장을 몇 바퀴나 뛸 때도, 한 회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도 '마지막 승부'의 도전적인 인트로는 그 장면을 뮤직비디오로 만든다.
피아노 등 다른 악기로 연주하거나 BPM에 변화를 주어 구슬픈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하는데, 신기하게도 질리지 않는다. 장면 곳곳에서 OST의 흔적을 찾는 것도 드라마를 감상하는 포인트가 될 것이다.
농구가 하고 싶어요
시원시원한 OST가 주는 첫인상과 달리, <마지막 승부>는 적극적으로 인물들의 비극을 그린다. 복잡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기억해야할 한 가지는 철준(장동건)이 속한 한영대학교와 동민(손지창)이 속한 명성대학교 간 대결구도다.
과거의 어떤 일로 농구를 하지 못하게 된 철준과 성인이 되어서까지 농구를 하는 동민은 드라마 내내 비교된다. 두 인물의 '인생 그래프'가 드디어 교차하는 때는 바로 철준이 한영대 농구부를 찾아가 "농구를 다시 하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이다. 수많은 경기에서 고전하던 한영대 농구부는 이 때를 기점으로 활력을 되찾는다. 여기에, 역시 과거의 어떤 일로 앙숙이 된 선재(이종원)와 철준의 관계도 개선된다.
승자가 불 보듯 뻔했던 가을농구 대학 리그가 재밌어질 타이밍인데, 안타깝게도 이 생기는 오래가지 않는다. "난 그렇게 훌륭한 선수가 아냐. 4년 내내 벤치에서 지낼지도 몰라." 오랜만에 농구공을 잡은 철준의 자조와 달리 문제는 실력이 아니다. 한영대 농구부는 어떤 사건으로 출전정지라는 수모를 겪는다. 그 여파로 농구부가 해체되고, 철준은 크게 좌절한다. "제대로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내가 하는 일이라는 게 원래 이렇지 뭐. 내가 뭘 하려고 한 게 잘못이었어."
'제0감각'이 말해, 이젠 농구뿐이라고...
농구부 해체 후 철준은 건설현장에서, 선재는 어둠의 조직과 연결된 나이트클럽에서 일하고 다른 부원들은 당구장 등에서 시간을 보낸다. 이들은 좋아하던 농구로 한 번 이상 아픔을 겼었다. 특히 농구로 여러 번 삶의 경로가 바뀐 철준과 선재는 그 두려움으로 농구부 재창단을 하자는 동료들의 설득에도 코트로 쉽게 복귀하지 못한다.
다시 정주행을 하는 동안 이 부분에서 자꾸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정대만과 송태섭이 떠올랐다. 하지만 청춘들은, 적어도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농구뿐이다. 어렵게 농구부를 다시 꾸리는 과정이 중요하게 그려지고, 해체 후 공백기동안 체력은 물론 멘탈 관리도 안 되어있는 한영대 농구부는 전지훈련으로 각오를 다진다.
드라마는 이렇게 농구 경기 자체보다는 경기를 성사시키기 위한 노력, 농구가 너무 그립지만 돌아가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슬픔에 주목한다.
이후 방황하던 이들은 농구라는 구심점을 통해 인간관계를 회복하고, 일상의 루틴을 되찾는다. 총 16회차 드라마에서 12회에 와서야 한영대 농구부가 부활하는데, 고된 훈련을 마친 부원들은 머리까지 짧게 자른 채다. 드라마의 대단원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남은 5회 안에서 운명의 역전을 하는 건 가능할까? 그건 직접 확인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물론 드라마를 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선재와 철준, 그리고 한영대 농구부는 운이 없다. 이들은 할 수 있는 게 농구뿐이라고 굳게 믿었기에 농구가(사실은 운명이) 자신의 노력을 배반한다고 느낄 때 크게 상처받았을 것이다. 부원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훈련으로 맞선다. 약한 팀에 마음이 가는 이들이라면, 스토리에 이입하게 된다.
사실 <마지막 승부>는 <슬램덩크>와 달리 의외로(?) 농구 지식을 얻기도 어렵고, 장르 특성상 경기가 다양한 각도로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농구공에도 사이즈가 여러 개 있다는 걸 <더 퍼스트 슬램덩크> 덕질을 통해 알게 됐듯, <마지막 승부> 속 동민이 <슬램덩크> 속 해남의 홍익현처럼 고글을 쓰고 경기한다는 걸 발견했듯 농구 팬이라면 자신만의 '이스터에그'를 찾을 수 있다.
또, 삶의 한때 농구가 너무나도 절실했던 사람들이 나온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원작 <슬램덩크>로 그 절실함에 공감했다면 <마지막 승부>는 분명 흥미로운 작품일 것이다. 한영대 농구부 감독은 다시 코트에 입성한 선수들을 이렇게 격려한다.
"우리가 다시 여기 서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잊지 말자. 후회 없는 경기를 하자. 우리한텐 이게 시작이야."
마지막이기도, 시작이기도 한 승부의 표정을 <슬램덩크>로 배운 이들에게 <마지막 승부>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