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빌리어드의 <위그든 씨의 사탕 가게>는 최근까지도 전문을 읽지 않았다. 교과서에 실린 <이해의 선물>이라는 소설 같은 수필을 읽고 가르치면서 참 따뜻한 글이라고만 생각했다.
이 책은 작가가 서문에 이야기한 대로 '한 개구쟁이 소년이 어른이 되면서 체험했던 삶의 기쁨과 슬픔에 관한 이야기이자 살아가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이며 '지금은 사라진 고유한 삶에 대한 어린 시절의 추억'이다. 모든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니 소설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정말 소설 같은 내용이 많다. 작가는 이 글이 호기심으로 세상을 배워나간 삶의 방식이자 어른이 되기 위해 겪어야 했던 성장통이라고 말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해의 선물>에는 어른 시절의 화자와 어머니와 자주 들르던 위그든씨의 사탕 가게에 홀로 가서 먹고 싶은 사탕을 다 고른 후 은박지로 싼 체리 씨 6개를 위그든씨에게 내미는 내용이 나온다. 당시 너무 어려서 돈에 대해 개념이 없었던 화자는 어머니가 계산대에서 동전을 주고 물건 담은 봉지를 건네받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서로 어떤 것을 교환한다는 사실만을 조금씩 알고 있었을 뿐이다.
화자가 내민 6개의 체리씨를 받은 위그든씨는 한참 동안 조심스럽게 아이를 바라보다가 '돈이 모자라냐'는 화자의 질문에 부드러운 한숨을 쉬고 '돈이 조금 남는다'며 거스름돈을 내주셨다. 화자는 그 일을 곧 잊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화자와 그 아내와 운영하는 열대어 가게에 꼬마 아이 둘이 들어오면서 그 기억이 생생히 살아나게 된다. 그 아이들은 열대어를 고른 다음에 움켜쥔 손을 펴서 화자에게 5센트짜리 동전 두 개와 10센트짜리 동전 하나를 올려놓았다. 당시 아이들이 고른 열대어는 30달러가 넘은 상태였다.
그 순간 아주 오래전 위그든씨가 자신에게 해줬던 일이 어떤 것이었는지 충격으로 다가왔고, 화자는 두 아이의 순진무구함과 그것을 지켜줄 수도 무너뜨릴 수도 있는 어떤 힘을 이해하게 됐다. 위그든씨에 대한 추억으로 목이 메었다.
'돈이 모자라냐'고 걱정스럽게 묻는 여자아이에게 화자는 1센트까지 동전 두 개를 거스름돈으로 쥐어 주고 그들이 집으로 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상황을 묻는 아내에게 위그든씨 얘기를 들러줬다. 그러자 아내도 눈시울을 붉히며 화자의 뺨에 부드럽게 입 맞추었다. 화자는 아직도 위그든씨 사탕 가게의 박하사탕 향기를 맡을 수 있고 어항을 닦으려는 순간 위그든씨의 너털 웃음소리가 들렸다.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때, 아이의 순수함을 지켜주려는 위그든씨의 마음에 뭉클했다. 그리고 또 화자가 옛날 위그든씨가 자신에게 베푼 선의를 대물림하는 장면에서 사람 사는 동네의 따뜻함이 전해져 왔다. 어른이 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린이의 순수를 지킬 수도 허물어 버릴 수도 있는 힘을 가질 때 독자인 나는 어떤 어른이 돼야 하나를 고민하며 읽는다.
시간, 철자, 다람쥐 먹이까지... 묻고 또 물어도 진심이었던 그녀
이 책 <위그든 씨의 사탕가게>에서 내가 주목한 다른 작품은 <안내를 부탁합니다>였다.
어린 시절, 전화가 있는 집이 몇 안 됐을 때 화자의 집에는 전화가 있었다. 2층 계단 옆 벽 아래에 붙어있는 참나무 전화기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자 화자는 이 신기한 상자 안에 사람이 산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녀의 이름은 '안내를 부탁합니다'였고 다른 사람의 전화번호도, 시계가 고장 났을 때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기도 했다.
화자가 처음으로 수화기 안의 사람과 친분을 맺게 된 것은 집에 아무도 없을 때 망치로 손가락을 찧었을 때였다. 화자는 전화기에 대고 안내를 찾아 손가락을 다쳤다고 말한다. 집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안내를 부탁합니다'는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 손가락에 대고 있으라고 말해주었다. 그녀의 말대로 하니 아프지 않아 나는 '안내를 부탁합니다'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 후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기면 화자는 항상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녀는 항상 인내심과 이해심을 가지고 내 질문에 대답해줬다. 필라델피아가 어디에 있는지, 오리노코 강의 위치가 어딘지,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을 때 내가 취해야 할 방법과 다람쥐에게 주는 먹이에 대해서도 알려줬다.
어느 날 사랑하는 카나리아 죽어 슬플 때 '안내를 부탁합니다'에게 전화를 걸어 그 이야기를 하자 내가 깊이 상심한 것을 안 그녀는 '그 새가 노래 부를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라고 말해주었다.
화자는 그녀에게 모르는 철자도 물어보고 이사할 때까지 필요할 때마다 전화를 걸었고 그녀는 늘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답해줬다. 새로 이사하는 집의 전화기 안에 그녀가 없을 거라는 생각하지 못해서 작별 인사도 하지 못했다.
세월이 지나, 10대가 돼 전화기의 작동 원리를 알고 난 화자는 예전 집의 '안내를 부탁합니다'가 끝없이 질문을 던지는 꼬마에게 얼마나 큰 인내심과 이해심으로 친절하게 대답해줬는지를 깨닫자 가슴 벅찬 감사를 느꼈다.
화자의 결혼한 누나가 다시 옛날 동네에 살게 되자 며칠간 그곳을 방문한 화자는 누나의 집 전화기에서 '안내를 부탁합니다'와 재회한다. 화자가 모르는 철자법을 묻자 그녀는 숨을 고르고 잠시 후에 나를 알아보고 대답했다. 나는 그날 그녀에게 만나고 싶다고 말하고 그녀의 집으로 가게 된다. 그녀의 집에서 과거의 이야기를 하며 정겨운 시간을 보낸 후 대학 학기가 끝나면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진다.
몇 달 뒤 돌아와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그녀가 5주 전에 세상을 떠났고 화자에게 전해줄 메모를 남겼다는 말을 들었다. 화자는 거기 어떤 말이 적혀 있을지 알았지만 모른 척 물었고, '나에게는 아직도 노래를 부를 또 하나의 세상이 있다고. 그러면 무슨 뜻인지 알 거라고'라는 말을 들었다. 화자는 '안내를 부탁합니다'가 남긴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가슴이 먹먹한 감동이 밀려왔다. 어린이의 질문에 인내심과 이해심을 갖고 친절하게 대답해줬던 '안내를 부탁합니다'가 없는 세상에 상심할 화자를 위해 남긴 말. 그 마지막 역시 화자를 위로하는 지극히 따뜻한 말이 아닌가. 그녀가 지금까지 보여준 모든 시간과 말이 한 덩어리로 압축돼 내 눈가를 눌렀다. 그러자 눈 주위가 뜨거워졌다.
이 책은 아이의 눈으로 본 세상과 그 세상에서 만난 어른들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아이의 순진무구함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어른을 보여준다. 아이는 아직 자기의 세계를 이루지 못했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고 혼자서 일어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런 아이에게 어른의 역할은 무엇일까. 우리는 어떤 어른이 돼야 할까.
한 세계를 지속할 수도, 파괴할 수도 있는 힘이 나에게 있다면 나는 어떤 대응을 할까. 위그든씨와 '안내를 부탁합니다'와 같이 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린이날이다. 모처럼 가족이 푸르른 5월의 공기를 마시며 나들이를 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어린이를 위한 어른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고 아야기를 나눠보는 시간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선의가 대물림되는 사회. 주변에 나를 포함해 선의를 실행하는 그런 어른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책장을 덮을 때, 위그든 씨의 웃음과 '안내를 부탁합니다'의 친절한 말투가 내 귓가에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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