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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태지서 유치장에 구금된 암태면 W마을의 박아무개 형제와 조카 3명은 자포자기하다 못해 담담하기만 했다. 6.25 전 암태도의 유력인사였던 박아무개의 동생이 인민군 점령 시절 완장을 차고 활동을 하다가 군경수복 후에 부역 혐의로 구금된 것이다.

실제 완장을 찬 이는 인공시절 무엇에 씌였는지 인간으로서는 하면 안 될 짓을 저질렀다. 특히 북한군 후퇴 시절 경찰 가족, 우익가족 100여 명을 암태면 뒷구섬에서 학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끝나지 않은 죽음의 행진

사실 그 100여 명 중에 성인 남성은 그리 많지 않았고 아기, 여성, 노인들이 대다수였다. 더군다나 그들을 죽이는데 죽창이나 몽둥이를 동원했기에 시신은 엉망이었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몹쓸 짓을 저질렀다. 살아 있는 이의 성기를 자른 것이다. 군경수복 후 자신의 가족들을 수습하면서 학살 정황을 연상한 유가족들은 치를 떨었다.

그 상황을 주도한 이가 박아무개라는 것을 안 암태면 주민들이 그를 가만둘 리가 없었다. 군경이 수복하자마자 첫 번째 체포대상이 되었다. 그의 형과 조카도 더불어 말이다. 그러니 박아무개는 자신의 행동을 되돌이켜 보았을 때 자신의 목숨이 유지될 것이라는 기대를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다만 형과 조카한테는 죄스러운 마음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덜컹' 유치장 문이 열리면서, 경찰들이 손짓을 했다. 뒷결박 당한 이들이 지서 마당에 세워졌다. 근처 해안가로 가는데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고 울음을 터뜨린 이도 없었다. 다만 깊은 한숨 소리만이 바람결에 바다로 향했을 뿐이다.

암태도(암태면) 박달산 근처 바닷가에 세워진 이들에게 경찰은 피의 살육제를 벌이기 시작했다. 사건 현장 근방에 있던 이들이 자신의 가족이 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죽창으로 뒷결박 당한 이들의 배를 내질렀다.

그런데 그곳에서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살아 있는 이를 톱으로 썰은 것이다. 톱은 나무를 썰기 위한 용도이지 사람의 피부와 뼈를 자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톱을 갖고 나온 이가 그런 일을 벌였는데, 그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피가 사방으로 튀고 톱이 살에 씹혀 꼼짝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톱을 든 이는 팔을 전후로 흔들었다. 살에 톱이 씹힌 이는 피눈물을 흘렸고, 톱으로 써는 이의 눈에서는 광기가 흘렀다. 그 와중에 박아무개 형제와 조카도 죽임을 당했다. 그런 후에 시신은 바닷가에 버려졌다. 물고기 밥이 된 것이다. 1950년 11월 초 무안군(현재의 신안군) 암태면 한 바닷가에서 있었던 일이다.

죽음의 행진은 이로써 끝나지 않았다. 작은아버지의 인공시절 활동으로 인해 참변을 맞이한 박아무개 집안에서는 또 한 번의 비극을 맞이했다.

아버지와 형이 해안가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변한 뒤 자은면 y리 고모 집에 피신했던 박〇〇이 학도병에 입대하기 위해 목포에 나오려다가 붙잡혀 지서로 연행된 뒤 깜깜무소식이 되었다.

인민군 후퇴 시절 완장 찬 이들에게 뒷구섬에서 떼죽음을 당한 이도, 군경수복 후에 바닷가에서 총과 죽창, 그리고 톱으로 썰려 죽임을 당한 이도 모두 암태도 주민들이었다. 죽임을 당한 이들 중에는 어린아이, 여성, 노인이 상당수 있었다.

"자수하면 안 돼"
 
6.25 전 서북청년회에서 암태도 주민들을 연행해 뺨때리기를 강요했던 장소
 6.25 전 서북청년회에서 암태도 주민들을 연행해 뺨때리기를 강요했던 장소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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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암태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한 암태초등학교의 교가를 만든 이는 박아무개로 알려졌다. 그는 인공시절 암태도의 인민위원장이었다. 당시 민청(민주청년동맹) 위원장은 SK가 맡았다. 하지만 완장 찬 이들의 세상은 3개월에 불과했다. 집에 있다가는 해코지당할 것을 우려한 S는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구원의 손길을 내민 이가 있었다. 바로 천후빈으로 암태도의 대지주였다. 그는 S에게 "나가지 말고 우리 집에 있어라, 지금 자수하면 안 된다"며 재삼재사 당부했다.

S는 생명의 은인인 천후빈에게 그저 감사의 뜻으로 머리만 조아렸다. 그렇게 암태면 신석리 천후빈의 집에 은거하고 있던 S에게 아내가 찾아왔다. "당신이 자수하지 않으면, 아버님이 죽게 생겼어요"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 때문에 아버지를 죽게 할 수는 없는 법, 바로 암태지서에 자수했다.

암태지서에서는 눈에 불을 밝히고 찾던 S가 자기 발로 찾아오니 환호성을 질렀다. 경찰들은 S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천후빈이 S를 숨겨 주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암태지서에서는 천후빈을 '범인은닉죄'로 처벌할 수는 없었다.

천후빈(1870년생)은 암태도에서 문재철(1883년생) 다음의 대지주였고, 암태도에서는 주민들의 신망을 받는 지주였다. 그렇다면 천후빈은 지주이면서도 왜 주민들로부터 신망을 받았을까? 그가 일제강점기에 소작료를 적게 받거나 소작인들에게 특별히 잘해준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주민들의 신임을 받은 것은 1923~24년도의 소작항쟁 때의 처신에 기인한다.

당시 소작료가 6~8할(수확물의 60~80%)에 달했는데, 암태소작인회(회장: 서태석)에서는 문재철, 나카시마 세이타로, 천후빈을 상대로 '소작료는 4할로 지정, 지주는 암태소작회에 2,000원 기부' 등을 요구했다. 문재철이 소작인들의 요구를 철저히 외면하고 깡패들을 동원해 폭력을 행사한 반면, 나카시마 세이타로와 천후빈은 소작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특히 천후빈은 소작인들이 목포에서 단식농성을 끝내고 암태도로 돌아갈 때 뱃삯을 전액 지원했다. 사실 뱃삯이 천후빈이 소작인들에게 걷어 들인 소작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소작인들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천후빈의 송덕비를 세우자는 여론이 뜨거웠다.

이런 연유로 천후빈이 주민들의 신임을 받고 있었으니, 암태지서에서는 그를 실정법 위반으로 몰아 처벌할 수는 없었다.

"나는 공산주의자다"
 
암태도 농민항쟁 사적비
암태도 두번째 대지주였던 천후빈은 소작인들의 인심을 얻었다.
 암태도 농민항쟁 사적비 암태도 두번째 대지주였던 천후빈은 소작인들의 인심을 얻었다.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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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서 근방 창고에 구금되었던 S가 지서 마당으로 끌려 나왔다. 잠시 눈을 감은 그는 해방 직후부터 지금까지 5년간의 상황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기쁨은 잠시였고 친일파들이 득세하면서 세상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었다.

특히 서북청년회가 암태도에 들어오면서 농민항쟁의 전통을 갖고 있던 섬은 나락으로 치달았다. 서청은 좌익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면 소재지의 사장에 주민 100여 명을 모이게 했다. 모인 이들을 2열 횡대로 세워, 서로를 마주 보게 했다.

"앞에 사람 뺨을 사정없이 때려" 사람들은 주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방의 나이가 비슷한 이도 있었으나 아버지뻘, 할아버지뻘 되는 이도 있었고, 여성인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뺨을 어떻게 때린단 말인가! 그러자 서청 책임자가 한 노인의 뺨을 거세게 때렸다. 노인의 몸뚱어리가 공중에 붕 뜨더니 팩 고꾸라졌다.

그렇게 두세 차례 시범을 보인 후에는 주민들 간의 뺨 때리기가 격화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그 와중에 이성(理性)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했던 S는 한국전쟁이 터지자마자 예비검속되었다. 암태지서와 목포경찰서를 경유해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전쟁 직후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소집되었는데, 이와는 달리 일부 인사들은 반정부인사라는 혐의로 예비검속되었다. 즉 대한민국에서 영원히 격리시키겠다는 의도로 붙잡아 들인 것이다. 여기에 S도 그 대상이 되었다.

인민군의 남하에 급작스럽게 후퇴하던 군경이 목포형무소 재소자들을 학살했는데, S는 천만다행으로 살아났다. 암태도로 돌아온 그는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 인민위원회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3개월 만에 상황은 역전되었고,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지기 직전의 상황이 된 것이다.

'누구를 원망하랴' 라는 심정으로 하늘을 잠시 바라본 그는 경찰에게 마지막 부탁을 했다. "나는 공산주의자다. 하지만 나의 부모·형제는 나와 사상이 완전히 다르다. 그렇기에 나는 죽여도 상관 없지만 부모·형제는 절대 건드리지 말아라" 또 그는 "내가 당신들에게 하나라도 해코지를 했으면 얘기해 달라"고 했다. 경찰들의 입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자신의 신념은 굽히지 않되 가족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애쓴 S는 1950년 11월 암태도 고산 건너편 바닷가에서 죽임을 당했다. 똑같이 군경에 의한 학살이었지만 앞의 박아무개와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인민군 옷으로 위장한 백부대

6.25가 발발한 지 한 달 만인 1950년 7월 24일 목포가 인민군에게 점령되었다. 그런 직후 무안군이 인민군에게 점령됐다. 하지만 인민군이 무안군의 각 섬에 진주한 것은 아니어서 전쟁을 겪은 이들 대부분은 인민군을 구경도 하지 못했다. 짧은 인공생활을 뒤로 하고 목포가 그해 10월 2일 수복되었다. 하지만 무안군(현재의 무안군과 신안군)은 금방 치안이 확보되지 못했다.

현재의 신안군 대부분이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수복이 원활하지 못했던 것이다. 목포에 진주했던 해병대 백부대가 현재의 신안군 임자도를 수복한 것은 10월 19일이었다.

각 섬에서 사태를 관망하던 완장 찬 이들은 무안을 거쳐 함평군 군유산과 영광 불갑산으로 후퇴하기에 급급했다. 그런 상황에서 1950년 10월 4일 석양 무렵 백부대 1개 소대가 비금도로 향했다. 전쟁 전 목포와 비금도 사이를 오가던 남영호를 탄 백부대는 원평항에 상륙했다.

희한한 건 한국군 백부대가 인민군 복장으로 위장을 했다는 점이다. 자신들을 인민군으로 오인하고 환영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들을 빨갱이로 간주하고 처벌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이른바 함정수사였다.

원평항에 상륙한 군인들은 당시 면사무소가 있었던 덕산리 덕대로 이동하여 국군의 배지를 뒤집어 단 채 불을 켜고 마을을 다니면서 주민들을 마을 앞에 집결시켰다.
주민들은 군인들을 인민군으로 오인한 채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 마을 앞에 집결하였고, 노〇〇의 할아버지 노장석을 비롯하여 아버지 노상길, 숙부 노충길 등 가족도 집결하였다.

배지를 거꾸로 달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인민군이 아닌 것을 눈치챈 한 청년은 백부대원의 "신촌에서 동무들이 회의를 하고 있을 것이니 데려오라"고 한 심부름을 자원하여, 그길로 도망쳐 학살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금면사무소 앞에 모인 이들은 백부대가 인민군인 줄만 알고 태평스럽게 있었다. 어떤 술 취한 이는 춤을 추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면사무소 앞 민가를 개조한 창고에 구금되었다가 경찰에게 학살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 '신안광주지역 민간인 희생사건', 2010)

성기를 잘라 죽이고, 톱으로 썰어 죽이고, 인민군 복장으로 위장한 이들의 말을 고분고분 따른 이들을 죽인 일은 소설이 아니라 역사였다. 1950년 암태도와 비금도에서 있었던 현실이었다.
 

태그:#암태도, #톱, #인민위원장, #펀후빈, #백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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