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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파 부엌에 갔다가 참변... 아내와 아이들은 생매장 당했다 https://omn.kr/28yk7

"니는 따라오면 안 된다!" 엄마 치마를 붙잡고 떨어지지 않는 문철이에게 엄마 조봉임은 딱 부러지게 말했다. 하지만 당시 여덟 살 문철이는 집에 혼자 있는 것이 너무 무서워 한시도 엄마 치마폭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6.25때 마을 모래산에서 생매장당한 마을 사람들을 발굴한다며 아버지가 식전부터 나가고, 엄마는 일하는 이들의 새참을 준비하느라 정신없는데, 문철이는 잠시도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수십 번도 더 했을 얘기에도 꿈쩍하지 않는 문철이를 보고 조봉임은 할 수 없다는 듯 문철이의 손을 잡고 모래산으로 향했다. 집에서 1km 떨어진 모래산으로 가니 마을 사람들이 여러 구덩이에서 파낸 유해들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바지게에 담긴 뼈들

문철이는 뼈(유해)를 보자마자 기겁했다. 하지만 이제 와 다시 혼자 집으로 갈 수는 없었다. 어깨와 목을 잔뜩 움츠리고 엄마 치마 뒤에 숨었다.

그런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아버님!" 하는 아버지 표재진의 곡소리였다. 무섭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울음소리였기에 문철이는 목을 빼꼼히 하여 소리 나는 방향을 쳐다qhkT다.

아버지가 부여잡고 있는 할아버지 표복암의 다리뼈에는 약간의 살점이 묻어 있었다. 아버지는 그 뼈를 부여안고 눈물 콧물을 흘리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누나를 포함한 마을 주민들이 같이 울었다. 사실 거기에 모인 이들의 사정이 모두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4개의 구덩이에서 죽임을 당한 이들의 치아나 유품 등을 보고 그렇게 가족을 찾았다. 문철의 아버지 표재진은 그나마 아버지의 유해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나머지 가족들의 유해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제수씨(안금임)는 두개골만을 수습할 수 있었다. 나머지 뼈들이 전부 섞여서다.

표재진은 아버지와 어머니 박인덕(1892년생), 제수씨의 유해를 창호지에 잘 감싼 뒤 지게에 지고 산에 모셨다. 나머지 가족 4명의 유해는 찾을 수 없었다. 여동생 납금(6.25 당시 17세), 조카 달원(6.25 당시 4세)이가 그런 경우다.

그렇게 가족의 유해를 찾은 이들이 그 자리에서 그냥 일어날 수는 없었다. 가족이 몰살돼 유해를 수습할 수 있는 이가 전혀 없어, 주인 없는 뼈들이 숱하게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이 몰살되지 않은 경우라도, 표재진의 경우처럼 가족의 유해가 식별되지 않아 누구의 뼈인지 찾을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임자를 모르는 뼈를 수습하니 일곱 바지게(싸리나 대오리 따위로 만든 발채를 얹어 놓은 지게)의 분량이나 됐다. 지게를 진 이들과 그 뒤를 따르는 이들이 그 뼈를 와우리 사장(射場) 근처에 있는 비살봉 자락에다 묻었다.

비살봉 자락에 묻은 것은 4년 전에 죽임을 당한 와우리 사람들의 뼈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영혼까지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유해를 발굴한 이들이 그날 밤은 대부분 몸져누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은 1954년 봄이었다.

사실 표재진이 몸져누운 것은 그날만이 아니었다. 수비대로부터 사촌 동생의 시신을 수습해 가라는 통지를 받고서 내치에 갔다 온 후에도 그랬다. 내치 모래사장에 누워 있는 사촌 동생 표재호(당시 15세)의 입에는 모래가 가득했다.

사촌 동생이 생매장되는 당시의 상황이 연상되자 표재진은 구역질이 나왔다. 그가 내치에서 사촌 동생의 얼굴을 보며 굵은 눈물방울을 흘린 것은 1950년 10월 말이었다.

'빨갱이의 집이므로 출입을 금한다'
 
1950년 겨울 마을 수비대가 대문에 X자형으로 나무를 박은 표복암 집이 있던 곳
 1950년 겨울 마을 수비대가 대문에 X자형으로 나무를 박은 표복암 집이 있던 곳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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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애들) 고모부가 소를 가져간당께요. 뭐라 쫌 해보소." 안달이 난 아내가 하는 소리에 표재진은 넋이 나간 듯 하늘만 바라보고 아무 말이 없었다. 당시 큰집에 있던 황소를 집안 사촌 매제인 박아무개가 끌고 가는데 아무런 항의나 제지도 하지 않았다.

당시 부역자로 죽임을 당하거나 행방불명된 이의 집에서는 수비대가 소를 포함한 가축, 가재도구 등을 강탈해 갔다. 그런 시대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도 아닌 집안사람이 당시 재산목록 1호였던 황소를 끌고 가다니, 환장할 일이었다. 특히나 박아무개는 일제강점기 암태도 소작쟁의의 핵심 지도자의 아들이었다. 그는 강탈해간 소를 자은면 유각리에 사는 이에게 팔아버렸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그해 겨울에는 와우리 주민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이 발생했다. 불과 한 달 전에 모래산에서 같은 마을 사람 100여 명을 학살한 수비대가 몇몇 집의 대문에 나무를 X자로 박았기 때문이다. 즉 이 집은 '빨갱이의 집이므로 출입을 금(禁)한다'는 것이었다.

일전에는 그 집에서 가축이나 가재도구를 강탈해간 이들이 이번에는 집 대문에 나무를 박아버린 것이다. 비록 그 집들의 주인이 모두 죽었더라도 근처에는 집안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결국 '빨갱이 집안은 이렇게 된다'는 엄포용 행위는 살아 있는 이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격이었다.

표정애(당시 11세)는 1950년 겨울, 넓은 할아버지 집에 얼씬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집에 살던 할아버지, 할머니, 숙부, 숙모, 사촌 동생이 죽임을 당해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그랬다. 빈집은 귀신이 나올 것 같기도 해서 너무나 무서웠다.

당시 살던 집이 비좁아 가족들이 이불 하나에 의존해 한 방에 살았어도 할아버지 집에 가서 잠을 잘 생각을 누구도 하지 않았다. 볼일이 급해도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 집은 변소(화장실)도 넓고 좋았지만 1950년 11월 14일 모래산에서의 사건 이후 그 집에는 얼씬 거리지도 않은 것이다. 더군다나 집 대문에 나무를 X자로 박아 놨으니 더욱이 그랬다.
 
모래산 사건, 그 후


술상 앞에서 흥얼거리는 남편을 바라보는 조봉임은 한숨이 나왔다. 남편은 모래산 사건 이후로 정신줄을 놓았다. 그의 집안에서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시동생, 조카 7명이 모래산에서 죽고 남진창고와 내치 등지에서 7명이 죽어 총 14명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당시 그녀는 분가해 시아버지 집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살았는데, 천만다행으로 수비대가 남편과 자신의 가족들에게는 해꼬지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남편의 넋이 나갔다.

살아 있는 것에 괴로워했고, 특히 시부모의 유해를 수습한 1954년 봄 이후에는 증세가 더욱 심해졌다. 남편은 일체 농사 일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술만 먹으면 광적인 증세가 나타나서 남아나는 살림 도구가 없었다.

냄비, 접시는 물론이고 보이는 살림 도구는 죄다 마당에 던져졌다. 얼마 전에는 톱으로 기둥을 자르기도 했다. 살림 도구나 집 기둥은 그렇다 치더라도 남편의 건강이 걱정이었다.

특히 팔꿈치가 남아나지 않았다. 술만 먹으면 술상을 팔꿈치로 내리치며 흥얼거리는 통에 남편의 팔꿈치는 늘 퉁퉁 부어 있었다. 이러다가 남편이 잘못되는 건 아닌지 덜컥 걱정이 들었다.

남편에게 "이제는 자식도 생각해야 할 게 아니냐!"고도 하고, 두 손 빌며 사정도 해봤지만 허사였다. 사실 남편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자기도 한 식구이기는 하지만 친정아버지, 친정어머니가 똑같은 일을 당했다면 자신도 미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표재진·조봉임 부부
 표재진·조봉임 부부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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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 집안 꼴은 말이 아니었다. 수비대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집에 대못질을 하지야 않았지만, 논 다섯 마지기(1000평)를 빼앗아 갔다. 당시에 자신이 수비대 청년들의 발목을 붙잡고 울며불며 사정했지만 헛수고였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정신줄을 놨으니 가정경제의 책임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

조봉임은 불쌍한 남편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저 건강하게만 살기를 바랬다. 대신 자신은 몸이 부서져라 일을 했다. 오줌과 똥이 섞인 합수통을 이고 다니기도 하고, 아무리 어려운 일도 척척 해냈다. 또한 자신의 땅이 거의 없어서 날마다 날품팔이를 해야 했다. 그렇게 악착같이 일을 해 모은 돈으로 빼앗긴 다섯 마지기의 논을 되찾을 수 있었다.

소년 표문철은 자은서국민학교 6년을 다니는 동안 한 번도 도시락을 싸가지 못했다. 집에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매일 허리가 끊어져라 일을 해도 집안에는 먹을 것이 항상 없었다.

논가에 있는 소나무 껍질을 벗겨 내 송쿠(송기[松肌]의 전라도 방언)로 국을 끓여 먹었다. 밀가루는 전혀 들어가지 않은 송쿠떡국이었다. 밥을 한 그릇도 못 먹는 날이 비일비재했고, 성게로 배를 채우기도 했고, 보리수가 밥 대용일 때도 있었다.

암태도소작항쟁기념탑

군에서 제대 후 마을 서기(리서기)를 맡고 있을 때 자은면 서부지역에 공무원이 없다며 백산리 4개 자연마을(백산, 와우, 신성, 분계)을 담당할 임시직 공무원을 뽑았다. 마을에서 리 서기를 보던 표문철은 당시 면장과 이장에게 좋게 보였는지 임시직 공무원으로 뽑혔다.

그러다가 1973년도에 신안군에서 제1회 공무원 공채시험이 있었다. 당시 자은면에 임시직으로 7명이 근무했는데 전부 공채시험에 응시했다. 목포교대에서 시험을 보는데, '군수에게 뒷돈 5만 원을 주면 합격한다'라는 말이 있어 어렵게 돈을 마련했다. 응시생 모두 그랬는데, 시험 전날 자은도에서 배 타고 간 청년들이 목포여인숙에서 술 파티를 벌였다. 그도 그럴 것이 뒷돈을 주었기에 합격을 자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잠시 후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군수에게 돈을 전달해 준 이가 와서 "군수님이 돈을 안 받더라"는 것이다.

술 파티장의 분위기는 급속히 냉각됐고, 표문철도 암담한 생각에 그날 밤 잠을 못 이루었다. 다음 날인 1973년 9월 20일 목표교대 시험장에서 표문철은 어떻게 시험을 치렀는지 황망하기만 했다. 한 과목이라도 40점 이하가 나오면 불합격이었다. 국어, 국사, 사회는 그런대로 봤는데, 영어와 수학은 채점이 안 될 정도였다.

3시간 걸려 집으로 돌아오는데, '떨어지면 아내와 부모님, 마을 사람들한테 망신일 텐데'라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집에 와서도 마찬가지여서, 며칠 동안 밥을 먹지 못해 입술이 부르텄다. 그러자 어머니가 "야 공무원 안 되면 어떻냐? 농사지으면 되제"라고 했지만, 떨어지면 마을에서 머리 들고 다니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운 좋게도 전통(전언통신문)으로 합격 소식이 날아왔다. 자은면의 고등공민학교 출신 중 두 명이 합격했는데, 그중 한 명이 자신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공무원 생활 중 정년퇴직을 1년 앞둔 1997년도에 생각도 못했던 업무가 자신에게 부여됐다.

암태면사무소에 부면장으로 근무할 때였는데, '암태도소작항쟁기념탑'을 세우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산이 고작 1천만 원이었다. 부가세 10% 빼면 900만 원밖에 안 되는데, 한 걱정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조경석과 조경수를 모두 기증받기로 하고, 설계부터 공사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모두 주관하기로 했다.

조경과 설계, 건축에 문외한 이었지만 전문가들에게 의견을 묻고, 주민들에게 협조를 구하고, 매일 땀방울을 흘리며 공사를 마무리했다. '암태도소작항쟁기념탑'이 완공되는 날, 그는 공무원 생활 중 가장 기뻤고, 주민들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단순히 하나의 공사를 맡아 잘 마무리했다는 것보다는 일제강점기 더불어 살기 위한 농민들의 소작항쟁 정신을 잘 계승했다는 자부심이었다.
 
공무원 시절의 표문철(동그라미 안)
▲ 표문철 공무원 시절의 표문철(동그라미 안)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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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유해발굴, #비살봉, #황소, #공무원, #암태도소작항쟁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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