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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외지서장 신아무개는 산외국민학교에서 좌익계 청년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했다.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면 과거에 남로당에 가입했던 죄를 깨끗이 씻어 주겠다"며 그가 내민 서류에는 '보도연맹 가입서'라는 제목이 있었다. 그곳에 모인 청년들은 특별한 의구심 없이 서류에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1949년 말 충북 보은군 산외면 좌익계 청년들을 보도연맹에 가입시키는 데 지대한 성과를 낸 신 지서장은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보은경찰서로 발령을 받았다. 지금의 정보과라 할 수 있는 사찰계에 소속되어 속리산을 근거지로 한 빨치산을 토벌하는 일과 보은군 관내 국민보도연맹원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다.

대한민국의 역군 되려    
 
일제강점기 형무소에 수감되었때의 박원근
 일제강점기 형무소에 수감되었때의 박원근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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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군 보도연맹원은 약 200명이었는데 사무실은 군청 앞의 식량영단 건물이었다. 간사장은 송철헌이었고, 과거 남로당 간부였던 이들이 보도연맹 간부를 맡았다. 보도연맹원들은 6.25 전쟁 전 정기적인 소집을 통해 반공교육을 받기도 했다.

사찰계에서는 보도연맹 간부들을 불러 사상 전향 방법 등에 교육을 실시했다. 신아무개는 각 면으로 출장을 가 보도연맹원 조직 확대 사업을 점검했다. 지서 경찰들은 마을에 직접 나가 "우리가 너희들을 처벌하려는 것이 아니고 경찰과 함께 협력해서 대한민국의 역군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라며 조직 확대를 꾀했다.

한국전쟁 전 보도연맹원들에게 '대한민국의 역군이 되게 해 주겠다'던 약속은 정작 전쟁이 터지자 휴지쪼가리가 되었다. 전쟁이 나자 육군 G-2대원 10여 명이 보은으로 와 수리조합 사무실을 본부로 삼아 보도연맹원들을 심사했다. 당시 보은군 보도연맹원 명부는 충청북도 경찰국, 보은경찰서, 보도연맹 사무실에 있었는데, G-2 대원들이 보도연맹 사무실에 있던 명부를 압수해, 살생부 작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런 '피의 제전'을 위한 기초작업이 마무리되었을 때 2사단 16연대 헌병대가 보은에 도착했다. 보은경찰서와 마로지서 등지에 구금되었던 보도연맹원들이 죽음의 골짜기로 끌려갔는데, 보은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던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보은면 길상리(일명 미륵뱅이)로 향했다. 경찰서에서 4km 떨어진 곳이었다.

지금은 장례식장이 들어선 자리에 보도연맹원 약 50명이 세워졌다. 그들에게는 자신을 변호할 기회는커녕 입도 뻥끗할 수 없었다. 헌병대의 지휘 아래 군경의 총구가 보도연맹원들을 겨냥했다. 50명이 죽음에 이르기까지는 아주 잠깐이었다. 그런데 그 주검 중에는 보도연맹원이 아닌 이가 있었다. 박원근이었다.

청춘을 민족해방운동에

아버지 박치호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박원근((1912년생)은 보은 삼산국민학교를 나와 서울로 유학을 했다. 1927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1930년 3월에 퇴학당했다. 이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영향으로 보인다. (진실화해위원회, '박원근의 항일독립운동의 건', 2008)

박원근은 중앙고등보통학교를 퇴학한 다음 해인 1931년 12월 말 삼인회 사건으로 본정(本町)경찰서에 검거되었다. 공산주의 제도의 실현을 목적으로 조직된 '삼인회'는 삼인(三仁), 신로(新路)를 비밀리에 출판해 회원 등에게 배부했다.

곧바로 석방된 그는 삼인회의 지하활동을 하며 하야사카(早板)인쇄소 동맹파업을 주도하였고, 이로 인해 1932년 9월 7일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었다. 경성지방법원 예심청구서에 나와 있는 박원근의 죄명은 '치안유지법 위반'이었고, 혐의 사실은 삼인회가 사유재산제도 부인, 착취가 없는 자유·평등한 신사회 건설, 즉 공산주의 사회제도를 실현하고자 하는 단체인 줄 알면서 가입했다'는 것이었다.

박원근은 1934년 11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의 판결을 받았다. 오랜 기간의 감옥생활로 고초를 겪었지만 박원근의 항일운동에 대한 의지는 식지 않았다.

일본 제국주의의 만주 침략(1931년)과 중국 본토 침략(1937년)으로 국내 민족주의자들의 사상 전향과 독립운동 포기가 붐을 이룰 때, 그는 세파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보안과에서 발행한 고등외사월보에 따르면 '박원근은 중일전쟁이 반드시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것이고, 공산주의 운동을 실현할 날이 다가왔다'고 확신했다.

박원근과 그의 동지들은 항일 비밀 결사체 '신인구락부'를 조직해, 반전사상과 지원병제도 반대를 선전하고, 일본이 패전할 것임을 역설했다. 그는 이러한 활동으로 검거되어 1941년 10월 전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의 판결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말 사회주의자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한 세력의 주류를 형성했다. 박원근 역시 청춘을 경찰서 유치장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식민지 시절 내내 항일독립 운동에 애를 쓴 박원근은 해방 후부터 정치·사회운동과는 거리를 뒀다. 가정생활에 몰두한 그는 그렇다고 자신의 젊었을 적 꿈꾸었던 가치를 포기하지도 않았다. 즉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 대한민국에 충성을 바친다'는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보도연맹원이 아니었던 그가 6.25가 나자 왜 보은경찰서에 예비검속되었을까? 사실 그뿐만 아니라 전국의 경찰서에서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전향하지 않은 사회주의자나 좌익세력을 모두 제거(학살)할 계획아래 예비검속했다. 보은에서는 그 타킷이 박원근이었고, 그는 보은군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길상리에서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내내 청춘을 바쳐 독립운동을 한 이가 너무도 허무하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가 꿈꾼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세상'도 1950년 7월 15일 보은군 보은면 길상리에 묻혔는지 모른다.

풀리지 않는 부부의 죽음
 
청년 시절의 박원근
 청년 시절의 박원근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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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남쪽에 있는 충북 옥천군에서도 전쟁 발발 후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이 이루어졌다. 청산면 백운리 최양순이 경찰들에 의해 청산지서에 연행된 것은 1950년 7월 14일경이다. 최양순은 앞서 살펴본 보은군 보은면 교사리 박원근의 장모이다.

청산지서에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은 당일 저녁까지 지서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다가 GMC 트럭에 실려 어딘가로 갔다. 지서로 연행된 이후 74년이 지난 여태까지 감감무소식이니 정확한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청산지서를 포함한 옥천군 내 지서에 소집된 보도연맹원들이 동이면 평산리, 군서면 월전리 말무덤재, 용머리바위 등지에서 학살되었기 때문에 최양순도 같은 운명에 처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보도연맹원이었던 최양순이 6.25 직후에 청산지서에 소집되었다면, 그의 남편 이세영(당시 54세)은 1950년 9월 15일 청산면 지전리에서 학살되었다고 한다. (월간조선사, '6.25사변 피살자 명부', 2003) 이세영이 학살되었던 시기는 인민군이 점령하던 시절이기에 가해자는 인민군이거나 지방좌익일 것인데, 이세영의 후손들은 그가 국민보도연맹원 이었다고 한다.

이세영의 아내 최양순이 보도연맹 사건으로 예비검속되었는데, 같은 보도연맹원 이었던 남편이 적대세력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에는 의아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어쨌든 한국전쟁 직후 박원근의 장모·장인 역시 난리 통에 죽임을 당했다.

박원근 집안의 전쟁 고통은 이로써 끝난 것이 아니었다. 박원근의 동생 박원홍(1925년생)은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 수학물리학과에 입학했다. 1946년 학원계의 뜨거운 이슈였던 국대안(國大案) 반대 투쟁에 참여했다. 전쟁 전 보은농고 수학 교사와 서울 명성여고 교사를 한 그는 한국전쟁 발발 후 의용군에 입대했다. 그때 이후 그의 소식은 두절 되었다.

전쟁 당시 서울에서 출판인쇄업을 하던 박원근의 아버지 박치호(1895년생)는 UN군의 서울 수복 때 인민군 대열을 따라 월북하다가 길이 막혀 중도에 되돌아왔다. 이후 경찰에게 붙잡혀 조사를 받고 훈방되었다. 그렇다면 장남 원근에게 사상적 영향을 준 박치호는 어떤 인물인일까.

통일을 위한 평양행
 
박치호가 자주독립대책협의회에 참여한 신문기사
 박치호가 자주독립대책협의회에 참여한 신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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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여름부터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바람이 솔솔 불었다. 그러다가 두 차례에 걸친 미소공동위원회가 결국 1947년 8월 12일에 결렬되었다. 한국 문제는 미국의 제안으로 9월 23일 유엔총회 본회의로 채택되었다. UN 감시 하의 남북 총선거는 북한에 의해 거부 되었으며, 결국 남만한의 단독선거로 귀착되었다.

이렇게 한반도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UN의 도마에 오르기 직전 남한의 좌파와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1947년 6월 한독당이 중심이 된 12개 정당이 '자주독립대책협의회'를 구성해 통일의 원칙과 방도를 제시했다. 민주주의 선거기구를 중앙과 지방에 조직하고, 미·소 양군 즉각 철수 등이 그것이다. 박치호는 신진당의 대표로써 이 논의에 참여했다.(1947년 6월 9일자 <독립신문>)

우리는 흔히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운동이 미소공동위원회가 좌절된 후에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위의 자주독립대책협의회가 결성된 시점이 그것이다. 하지만 해방 후 박치호의 정치활동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박치호는 좌·우 정당의 즉시 합작과 남북 단일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1946년 2월 결성된 통일정권촉성회에 이름을 올렸다. 좌우익이 모스크바삼상회의를 둘러싸고 치열하게 찬반탁 투쟁을 벌일 때다. 후일 통일국가 건설을 위해 3.8선을 넘은 김구도 이때는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을 때이다.(1946년 2월 4일자 <조선일보>)

그러한 정치활동의 연장선 속에서 박치호는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여했다. 사실 박치호는 일제강점기부터 항일운동을 전개한 이다. 1924년 니혼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보은에서 야학 설립을 위해 현금을 기부하고 집 일부를 야학 장소로 제공하기도 했다. 그는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1927년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대회에도 참여했다.

그의 행적은 윤치호 일기에서도 확인되며, 잡지사 개벽에도 몸담았고, 대동문화사를 설립, 운영했으며 선만일보 경성지국장을 하면서 좌익계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해방 후에는 신진당 감찰위원을 맡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충북 보은의 청년운동, 교육운동을 후원하고 서울에서 진보적인 출판·문화운동에 전념했던 박치호는 해방 후 좌우합작과 통일국가 건설운동에 몸바쳤다.
아버지의 정신을 이어받은 박원근은 일제강점기 삼인회와 신인구락부 활동을 하며 민족해방운동에 몸 바쳤다. 하지만 그 결과는 아들 박원근이 예비검속되어 대한민국 군경에게 학살되었고, 아버지 박치호는 평생을 경찰서 사찰과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항일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의 모습이 박치호·박원근 일가의 모습에 투영된다.
 
좌측 원안의 인물이 박치호
 좌측 원안의 인물이 박치호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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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예비검속, #보은경찰서, #삼인회,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박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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