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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암 박인호 어록비
 춘암 박인호 어록비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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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의 초창기는 일제강점 초기와 겹친다. 세계 식민지 역사상 유례가 없는 폭압적인 무단통치가 자행되었다. 그런 시기에 천도교가 자리를 잡고 조직을 신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동학교문은 갑오혁명에 실패하여 막대한 희생을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참한 수난의 길에서도 근대적인 모습을 거듭 갖추어 제기할 수 있었다. 이의 가장 중요한 모멘트는 러일전쟁의 중대변국에 처하여 그들이 능굴능신하는 태도를 취한 것이 첫 단계요, 다음은 일제의 침략으로 국가가 패망하는 그 위기에서도 민족 종교로서의 신념과 자주의식을 상실하지 않고 적 앞에 굴복하는 옛 동덕(同德) 즉 일진회의 이용구를 중심한 시천교 일파를 감연히 결별하며 '천도교'에로 재편 재건할 수 있은 사실이요, 셋째로는 제3세 교조 손병희를 중심으로 일제의 포악한 식민통치하에서도 내실에 있어 굴하지 않고 교단을 중심한 민족정신의 앙양과 민족교육·민족문화의 보급에 주력함으로 드디어 기미독립운동의 주도세력을 형성하여 우리들의 빛나는 근대국가 - 대한민국의 창건에 적극 참여할 수 있은 것이니 어느 모로나 청사에 길이 빛나는 성과인 것이다. (주석 1)

춘암 등 천도교 지도부는 종교단체라는 특성으로 일제의 감시를 피해가면서 내실을 다져야했다. 그리고 조직을 통해 도인은 물론 일반인들을 상대로 각종 교육을 실시하였다. 손병희는 멀리 큰 '사업'을 구상하면서 천도교 내부 관리는 전적으로 춘암에게 일임하고 있었다.

손병희가 이 시기 천도교 조직 밖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했다면 박인호는 천도교 조직 안에서 나라의 인재를 키우는 교육운동이나 문화운동에 힘썼다. 둘은 천도교 안과 밖에서 서로 협력하며 활동했다. 그 결과 천도교 조직에 대한 지도력은 박인호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이 시기 박인호는 천도교 교역자 양성을 위해 지방에 교리강습소를 개설했다. 교리강습소에서는 천도교 교리와 함께 보통학교 수준의 일반 교육도 실시했다. 일반 교육은 총 3개의 과가 있는데, 본과는 3년, 특별과는 2년, 속성과는 3개월 과정이었다. 과목으로는 역사, 언어(조선어, 한문, 일본어), 농업, 산술, 이과, 체조, 도서, 창가가 있었고, 교리강습소에서 배출한 졸업생들은 이후 3.1혁명의 핵심으로 성장했다. (주석 2)

일종의 역할 분담이었다.

손병희는 민족사적인 과제를 위하여 외부 일에 매진하고, 춘암은 이를 뒷받침하면서 내부 업무에 전심전력하였다. 춘암은 교육문제에 남다른 관심과 집념을 갖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미개했던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게 된 것은 국민이 근대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까닭이로 인식하였다.

박인호는 천도교 내의 조직을 통한 교육운동 뿐만 아니라 천도교 밖에서도 교육운동에 활발한 투자를 벌였다. 박인호의 교육철학이 교육의 공공성인 까닭에 과감한 투자로 교육기관을 인수하고 교육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보성학교(보성전문, 보성중학, 보성초등)와 동덕여학교를 인수하여 근대 교육을 체계를 갖춰서 시작한 것이 대표 사례다. 보성전문학교와 보성초등학교가 경제 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박인호의 지시로 천도교는 채무 청산으로 8천 원을 지불하고, 보성 3교와 보성관, 보성사까지 인수한다. 보성학교는 1923년 6월 졸업생 600여 명, 재학생 700여 명에 달하였다.

동덕여학교 인수와 경영에서는 여성교육에 대한 박인호의 열의를 볼 수 있다. 박인호는 재정이 어려워진 동덕여학교를 인수하여 천도교 교주인 자신을 명의로 하여 설립자를 변경하고 천도교에서 운영하고, 그 해에 법률상업학교 30여 명과 고등과정 28명이 졸업했다. 여성교육에 큰 관심이 있는 박인호는 동덕여학교에 입학을 독려하기도 했다. (주석 3)

박인호는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사람이었으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거시적인 안목과 뛰어난 상황판단으로 고비 때 마다 큰일을 해냈으며 교계에 큰 희망적 인물이었다. 춘암이 첫 번째 시도한 것이 교의 체제정비였다. 현울님 밑에 교역자를 체계화하여 구체적 신앙체계를 세우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그는 우선 중앙총부의 공의에 부처

(가) 계층구조의 확립을 위하여
① 수운을 대신사로 ② 해월을 신사로 ③ 의암을 성사로 추존하여 하이어라키(Hierarchy)를 세웠다.

(나) 교회를 중앙총부라 하여 남부 홍문동으로 이전하여 무거운 공기를 일신하였다가 3월에 대사동으로 이전하였다.
(다) 장실을 만들어 의암을 모시고 좌봉도에 김명배를 임명하였다.
(라) 중앙총부 고문에 오세창을
(마) 전제관장에 김완규를
(바) 금융관장에 윤구영을
(사) 신도사에 라용환을
(아) 법도사에 양한묵을
(자) 전제관장에 이병호를 임명하였으며
(차) 천지인 삼통대계를 세워 종문 삼대 기념일로 삼으니

4월 5일은 천일 8월 14일은 지일 12월 24일은 인일로 정하고 3월 10일과 6월 2일은 기념일로 12월 1일을 교일 기념일로 정하였다. (주석 4)


주석 
1> 이선근, <동학운동과 한국의 근대화 과정>,이현희 엮음, <동학사상과 동학혁명>, 436~437쪽, 청아출판사, 1984.
2> 박세준, 앞의 책, 93쪽.
3> 앞의 책, 94~95쪽.
4> 이상재, <춘암 박인호연구>, 13쪽, 예산문화원, 1997.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박인호평전, #박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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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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