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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문화운동을 열게 된 개혁적이고 민족적인 계몽잡지 '개벽'을 발행하던 터. 천도교 중앙 대교당으로 드는 대문에 표식이 붙어 있음.
▲ 개벽사 터 신 문화운동을 열게 된 개혁적이고 민족적인 계몽잡지 '개벽'을 발행하던 터. 천도교 중앙 대교당으로 드는 대문에 표식이 붙어 있음.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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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3.1혁명의 거센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긴 했으나 조선민중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깊어졌다. 해서 통치의 전략전술을 바꿨다. 더 이상 헌병경찰의 힘만으로는 조선민중을 다스리기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이른바 '문화정치'를 내세웠다. 속셈은 더욱 간악하고 치밀한 무단통치 이면서 내세우기는 '문화'를 앞세웠다. 두 개 일간신문을 허용하고 도서의 출간을 허용하였다. 

춘암이 지도하는 천도교도 때를 놓치지 않았다. 내부 분열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민족문화를 잇고 선배들의 유훈을 되새기며 문화사업을 벌였다. 인내천 사상은 후천개벽인 동시에 인문개벽운동, 즉 인류의 신문화운동이라 했다. 1920년 천도교청년회의 교리연구부가 중심이 되어 언론기관으로 개벽사를 설립하고 이해 6월 25일 <개벽> 창간호를 냈으나 총독부에 압수되는 시련이 따랐다. 

창간호의 <세계를 알라>의 창간사는 "눈을 크게 뜨라 귀를 크게 열라, 그리하야 세계를 보라 세계를 들으라. 세계를 암이 곧 자기의 죄악을 암이요 자기의 장래를 암이요, 자기의 총명을 도움이요, 자기의 일체를 개벽함이로다."고 선언하였다. <개벽>은 1926년 8월 1일 발행금지를 당할 때 총 72호를 발행하는 동안 발매금지 34회, 벌금 1회, 정간 1회의 탄압을 받았다. 

이 시기 천도교는 <개벽>에 이어 1926년 11월 1일 <별건곤(別乾坤)>, 1931년 3월 1일 <혜성(彗星)>, 1921년 1월 6일 여성잡지 <부인>과 1923년 3월 25일 <신여성> 그리고 천도교소년회의 기관지로 <어린이>를 각각 발행하였다. 모두 민족문화와 국민계몽을 위한 목적이었다.
이 사진은 1931년 7월 23일 서거한 방정환의 장례식장(1931.7.25) 이 장소는 천도교중앙대교당 앞마당(경운동88)으로 방정환이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창립한 곳이고, 1922년 5월 1일 최초의 어린이날 행사를 거행한 곳이다.
▲ 방정환 장례식장( 이 사진은 1931년 7월 23일 서거한 방정환의 장례식장(1931.7.25) 이 장소는 천도교중앙대교당 앞마당(경운동88)으로 방정환이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창립한 곳이고, 1922년 5월 1일 최초의 어린이날 행사를 거행한 곳이다.
ⓒ 박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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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창간을 주도한 방정환은 창간호 첫머리의 <어린이 예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부흥민족의 모든 새 건설 노력 중에 있는 우리 조선에 있어서, 아무것 보다도 긴절한 일로 우리의 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더 할 수 없이 억지없는 곤경에 처하여 가진 박해와 가진 신고를 겪으면서도 그래도 우리가 안타깝게 무엇을 구하기에 노력하는 것은 오직 '내일은 잘 될 수가 있겠지, 내일은 잘 살 수가 있겠지' 하는 한 가지 희망이 남아 있는 까닭입니다.

'금일의 생활은 비록 이러하여도 내일의 생활은 잘 될 수가 있겠지' 하는 다만 이 한 가지 희망을 살리는 도리는 내일의 호주 내일의 조선일군 소년소녀들을 잘 키우는 것 밖에 없습니다. 당신의 한 가정을 살리는 데도 그렇고, 이것 뿐만이 확실한 우리의 활로입니다. (주석 1)
  
천도교는 1929년 3월 1일 <학생>을 발행하였다. '어린이'가 성장하여 '학생'이 되면서 이들을 주 독자층으로 삼은 것이다. 1930년 11월 12월호로 총독부에 의해 폐간되었다. 천도교는 이외 각종 도서를 간행했다. 

출판물은 <농민세상>, <대중독본>, <대중산술>, <비료제조법>, <최신 양장법>, <소년지도자요람>, <조선 및 국제조약집> 등이 있었다.

천도교가 여차하면 압수·삭제·등록취소 등의 탄압 속에서도 꾸준히 잡지를 발행할 수 있었던 것은 춘암의 민족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 국민계몽을 자주독립의 길로 인식한 역사의식이 있었기에, 물적 뒷받침으로 가능했다. 

1920년대 천도교청년당의 편집부 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된 '개벽사'의 신문화운동은 실로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개벽사'가 밟아온 역사는 그대로 민족사였으며 일제로부터 받은 상처는 그대로가 민족수반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창간호부터 압수를 당하여 창간 임시호를 내면서 출발한 <개벽>이 계속 압수·발행정지·드디어는 발행금지로 쓰러지자 비록 성격은 다르지만 <별건곤>(어느 의미에서는 <개벽>의 뜻과 유사성을 가진)을, 또 이어서 <혜성>, <제1선> 신간 <개벽>으로 이어지는 '개벽4'의 끈질긴 잡지활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청년당의 여성부를 후원하던 <부인>(후의 <신여성>), 유소년부의 활동을 돕던 <어린이>, <학생>이 모두 개벽사 발행이었다. 개벽사 발행의 월간잡지 호수만도 무려 400호에 육박하는 셈이다. 여기에다 조선농민사 발행의 <조선농민>, <농민> 등을 합친다면 청년당이 직·간접으로 발행한 출판물은 엄청난 것이었다.

따라서 청년당의 신문화운동은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중기까지의 민족주의 사상 운동의 주류를 이루었다 할만하다. 물론 이는 천도교라는 종교적 배경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주석 2)


주석
1> <어린이>, 1923년 3월, 천도교 개벽사.
2> 이정복, <천도교청년당과 신문화운동>, <한국사상총서>1, 453쪽, 한국사상연구회, 1975.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박인호평전, #박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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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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