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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봉황각으로 오해하시는 분들도 있다. 이 건물은 옛 천도교 중앙총부 건물로 원래 종로 경운동에 있던 것. 1969년 수운회관을 짓게 되자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지금은 봉황각 별관으로 쓰고 있다고.
▲ 옛 천도교 중앙총부 건물 이곳을 봉황각으로 오해하시는 분들도 있다. 이 건물은 옛 천도교 중앙총부 건물로 원래 종로 경운동에 있던 것. 1969년 수운회관을 짓게 되자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지금은 봉황각 별관으로 쓰고 있다고.
ⓒ 이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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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나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조직·단체에는 이견과 이해관계에 따라 분파현상이 나타난다. 천도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손병희 서거 후 파벌현상이 심화되었다. 뒷날이지만 1933년 총독부 경무국 자료는 당시 천도교 각파의 정치적 성향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신파는 인도의 스와라지운동을 모방하여 합법적 불복종적 비폭력적 정신에 의한 민족자치운동에 매진하고 있으며, 구파는 급진비타협적 사회운동 방면에 진출하여 이전에는 신간회의 조직에 관여한 바 있고, 근자에는 민족단일당 결성에 분주하고 있다. 또한 연합파는 좌경적 공산운동의 색채가 현저하여 여러차례 공산당사건에 연좌된 자가 많으며, 육임파 (六任派)는 고루적 순종교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교도수에 있어서 타종교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력인 까닭에 양자의 특별한 길항은 특별히 치열한 바… (주석 1)

춘암은 이같이 분열되어가는 천도교를 이끌면서 각종 언론·문화·청소년·농촌 운동의 조직을 지원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천도교청년당(청년당)이다. 1923년 9월 2일 "천도교의 주의·목적을 사회적으로 달성코자 이에 시종할 동덕(교우)으로서 하나의 전위체를 조직한다"고 선언하면서 '정신개벽'을 내세웠다. 이와 관련 천도교측의 해설이다. 

정신개벽이란 인간으로서 재래에 가지고 있던 일체 정신상태를 변혁시킨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원시적 잡신, 봉건적 세력 급 각분념, 오늘의 금전 및 강권만능염, 그리하야 세상은 밤낮 이러하거니 하는 단락없는 관념 등을 제거하고 인내천주의에 의한 보국안민·포덕천하·개벽정신 등의 새 의식을 환대하는 것"이며, 민족개벽이라 함은 "일본제국주의에 빼앗긴 주권과 자유를 찾고 우리 민족이 해방을 얻자는 것"이 제1의 목적이었고, 사회개벽이라 함은 "천도교의 사인여천을 체행함으로써 동귀일체의 사회를 이룩하여 지상천국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주석 2)

'청년당' 산하의 농민부는 3대 강령을 내걸었다.

 1. 농민대중의 현실적 불안에 대한 생활권 확보를 기함.
 2. 농민 대중의 의식적 훈련을 기함.
 3. 농민 대중의 견고한 단결로서 전적 운동을 지지함.

표현이 완곡했을 뿐이지 사회운동 단체의 의지를 담았다. 1910년대 천도교 내부의 비밀결사 '천도구국단'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했을 터이다. '청년당'은 춘암의 아들과 조카 그리고 측근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아 그의 배려와 지원이 컸을 것이다. 

천도교 구파의 전위정당 역할을 한 '청년당'은 1926년 4월 구파 계열의 청년당 간부인 박래홍·손재기·조정호 등과 일부 지회가 탈퇴하여 별도로 '천도교청년동맹'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또 신간회 창설의 주요 역할을 하였다. '청년당'은 조직을 확장하여 1925년에는 지방당부가 120여개 당원이 3만여 명에 이르렀다. 조직이 확장되면서 농민부·노동부·유소년부·청년부·여성부·학생부·성인부 등 7개 부서를 두고 활동을 개시하였다.

우선 천도교를 통하여 미조직 민중의 조직화와 기성단체의 지도로서 문화계몽과 사상계몽에 주력하였고, 민중의 사회적 경제적 일반 생활상의 당면 이익 획득에 노력할 것을 실천목표로 삼았다. 이것은 지금까지 천도교에 부속되어 산재해 있던 단체들을 청년당 산하에 두면서 체계화시키고자 하는 의도였다.

그러나 각 단체는 청년당 내에 설립 되어지는 것은 아니었고, 활동도 각 부에서 정한 질서와 방법에 따르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각 단체는 반드시 청년당의 일정한 지시를 받으면서도 어느 정도 그 활동에는 독립성이 부여되었다. (주석 3)

당시 천도교는 신파와 구파로 분파되었다. 총독부가 분석한 대로 구파가 비타협적 민족노선을 견지했다면 신파는 자치론적 민족노선으로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다. 

천도교 신구파의 활동을 놓고 어느 쪽의  활동이 최선이었는지의 판단은 유보되어야 한다. 고 함석헌 선생의 '민족이 바루처럼 쓰러지는데 누굴 탓하랴' 말처럼 그 시절 민족의 좌절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고 보아야 한다. 바로 그 시절 마치 불꽃처럼 열정을 불사르다 산화하는 모습과 들불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아 의지를 속으로 승화하는 모습이 양 파의 비유적 모습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들이 이념적·사상적 갈등으로 분열된 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랬기에 양 진영의 통합은 훨씬 수월했다. (주석 4)

천도교청년당(천도교청년동맹)은 이후 6.10만세운동, 신간회운동 등 항일민족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하고, 1927년 10월 청년동맹 대표이던 춘암의 아들 박래홍이 피살되는 참극을 겪는다.

박래홍은 1920년대 중반 신간회 활동을 통해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2월 신간회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제휴하여 비타협적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대표단체로 발족되었다. 신간회 조직 구성 당시 박인호의 지시로 천도교에서는 박래홍을 포함하여 수백명이 참여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박래홍은 신간회 발기인, 간사를 맡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이처럼 1920~30년대 독립운동을 다각도로 전개하던 박래홍은 1928년 10월 5일 서을봉(徐乙鳳)에 의해 피살당하였다.

일제는 친일 노선을 갖고 있던 신파를 육성하려고 계획하였는데, 이러한 계획에 걸림돌이 되는 구파의 대표 박인호를 대신하여 아들 박래홍을 제거하기로 한 것이었다. 박래홍의 장례식은 청년총동맹과 신간회본부에서 연합장(聯合葬)으로 거행되었고, 천도교월보에는 박래홍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문이 수십건 게재되었다. (주석 5) 

주석
1> 조선총독부경무국, 1933년, <동학혁명 백주년 기념논총(下)>, 478쪽.(주 345)
2> 앞의 책, 470~471쪽.
3> 앞의 책, 472~473쪽.
4> 임형진, 앞의 책,(주석 28), 210쪽.
5> 정을경, 앞의 책, 130쪽(종합 인용)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박인호평전, #박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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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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