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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 내 독립유공자 어록비 공원 내에 4일 백산 우재룡 선생의 어록비가 세워졌다.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 내 독립유공자 어록비 공원 내에 4일 백산 우재룡 선생의 어록비가 세워졌다. ⓒ 조정훈
 
"조선이 일본의 통치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다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하여는 생각한 바 없다. 다만 국권 회복을 도모하는 것은 조선인의 의무다."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백산 우재룡 선생의 어록비가 세워졌다.

백산우재룡선생기념사업회는 4일 충남 천안시 동남구 독립기념관 독립유공자 시·어록비 공원 내에 백산 선생의 어록비를 세우고 선생의 뜻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제막식에는 백산 선생의 장남인 우대현 선생과 유족들이 참석했고 김능진 광복회 부회장, 한시준 독립기념관장, 최봉태 기념사업회 회장 등 60여 명이 참석했다.

어록비는 1921년 11월 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신문조서에서 조선총독부 판사가 "무력으로 일본의 통치를 벗어나는 일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국권을 도모하는 것은 조선인의 의무"라고 한 답변을 적었다.

어록비 제막식을 앞두고 백산의 장남인 우대현(80) 선생은 "아버님은 목숨을 내놓고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당당하셨다"며 "검사가 사형을 구형한 상황에서도 일본에 당당했던 분"이라고 말했다.

우 선생은 "어릴 적 아버님은 뒷모습만 봐도 두루마기가 휘날리고 멋있는 분이었다"면서 "2번이나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1년 동안 감옥에 계셨지만 독립운동을 하시면서 사진도 한 장 안 찍었다. 당시는 밀정이 많아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하셨는데 돌아가신 후에도 사진이 한 장도 없다"고 했다.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본받아야 할 정신"
 
 4일 독립기념관 독립유공자 어록비 공원 내에 백산 우재룡 선생의 어록비 제막식이 열린 가운데 백산 선생의 장남인 우대현 선생이 인사를 하고 있다.
4일 독립기념관 독립유공자 어록비 공원 내에 백산 우재룡 선생의 어록비 제막식이 열린 가운데 백산 선생의 장남인 우대현 선생이 인사를 하고 있다. ⓒ 조정훈
  
김능진 광복회 부회장은 이종찬 회장을 대신한 축사에서 "생전에 일본인 판사 앞에서 당당하게 밝힌 의병장님의 추상과도 같은 말씀은 예나 지금이나 좌고우면하는 기회주의를 배격하고 독립 쟁취라는 시대정신 실천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명제"라고 찬사했다.

이어 "오랜 기간의 수형생활을 이겨낸 의병장님의 올곧은 신념이 느껴져 참으로 고귀하고 값지게 생각한다"며 "나라사랑 정신의 귀감으로 승화시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강조했다.

한시준 독립기념관장은 "우재룡 선생은 대한제국 군인으로서 의병을 했던 분"이라며 "대한광복회를 조직해 만주에 가서 독립군을 양성하려고 했던 분"이라고 소개했다.

한 관장은 "해방된 후에도 그런 정신을 잊지 않고 평생을 독립운동 하셨던 대표적인 분"이라며 "오늘 제막된 어록비가 후손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는 자료로 이용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봉태 기념사업회장은 "오늘은 7.4남북공동을 선언한 뜻 깊은 날"이라며 "백산 선생은 독립운동가의 상징 같은 분으로 해방 이후에도 완전한 독립을 위해 노력하셨다"고 말했다.

이어 "백산 선생의 정신은 일제시대 때 필요한 정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본받아야 할 정신"이라며 "교과서에 백산 선생의 어록을 담을 수 있도록 노력 하겠다"고 덧붙였다.
  
 4일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 내 독립유공자 어록비 공원 내에 세워진 백산 우재룡 선생 어록비 제막식에서 참가자들이 테이프를 커팅하고 있다.
4일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 내 독립유공자 어록비 공원 내에 세워진 백산 우재룡 선생 어록비 제막식에서 참가자들이 테이프를 커팅하고 있다. ⓒ 조정훈
 
1884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백산 우재룡 선생은 18세가 되던 1902년 대한제국 군인으로 대구 진위대에 입대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하자 산남의병장 정용기를 만나 산남의진에 합류한다. 산남의진 연습장과 선봉장을 맡아 팔공산을 본거지로 하는 영천 서부 지역의 의병 책임자로 활동했다.

백산 선생은 1908년 5월 고령의 유격대로부터 구입한 무기를 건네받아 팔공산으로 돌아오다 미리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에게 체포돼 종신유형(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가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합방하면서 합방 특사로 풀려났다.

이후 1913년 박상진을 만나 만주와 국내를 오가며 동지를 규합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다시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1915년에는 박상진, 채기중, 권영만 등과 함께 대구 달성공원에서 비밀결사 무장항일 단체인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고 지휘장을 맡았다.

경주에서 우편 마차를 습격해 군자금 8700원을 탈취하고 만주 길림에서 길림광복회를 조직해 중국 서간도의 부민단과 신흥무관학교를 대한광복회와 연결시키는 활동을 벌였다.

백산 선생은 일본의 수배를 피해 1917년 만주로 망명했다가 1919년 3.1운동 이후 다시 서울로 돌아와 같은 해 군산에서 조선독립군정서와 중국 상해임시정부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했다.

1920년 서울에서 주비단을 결성하여 활동하다 1921년 임시정부 지원을 위한 자금모집 활동 중 군산에서 붙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37년 감형되어 출감했다.

백산 선생은 출감 후 다시 독립운동을 모색하다 1945년 해방되자 광복회 동지를 규합하여 재건 광복회를 조직하고 부회장을 맡아 항일투쟁기록 '광복회'를 출간했다. 선생은 72세이던 1955년 서거해 달성군 유가면에 안장되었다가 1968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이장했다.
 
 대구 달서구 두류동 두류공원 내 인물동산에 세워진 백산 우재룡 선생 흉상.
대구 달서구 두류동 두류공원 내 인물동산에 세워진 백산 우재룡 선생 흉상. ⓒ 조정훈
  
정부는 1963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수여하고 2009년 1월 국가보훈부(당시 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에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또 대구시는 2011년 두류공원 인물동산에 백산 선생 흉상과 기념비를 세웠다.

한편 독립기념관은 독립운동가 후손의 어록비 건립신청서를 받아 심의위원회와 위치선정위원회를 거쳐 매년 2기의 독립운동가 어록비 설치를 허가하고 있다. 백산기념사업회는 지난 2022년 어록비 설치 신청을 해 지난해 4월 심의를 마치고 5월에는 장소를 선정했다.

#백산우재룡#어록비#우대현#독립기념관#두류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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