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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그레브에서 가장 유명한 '반 젤라치크 광장' 모습. 1848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침입을 물리친 영웅 '반 조세프 젤라치크'이름을 따서 '반 젤라치크 광장'이라 불린다.
 자그레브에서 가장 유명한 '반 젤라치크 광장' 모습. 1848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침입을 물리친 영웅 '반 조세프 젤라치크'이름을 따서 '반 젤라치크 광장'이라 불린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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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어~"

위 가사는 가수 남진이 부른 '님과 함께'의 첫 구절이다. 지난달 말, 유럽 남동부에 있는 발칸반도를 여행하면서 차창밖 보이는 멋진 모습을 보고 느낀 생각이다. 멋진 호수와 예쁜 고성, 푸른 초원 위에 점점이 펼쳐진 농가와 푸른 하늘이 정말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발칸이란 지명은 19세기 초부터 사용된 것으로 터키어로 '산맥'이라는 뜻이다. 지형적으로 보면 북쪽으로 도나우 강 하류, 동쪽으로 흑해, 남동쪽으로 에게 해, 남쪽으로 지중해, 남서쪽으로 이오니아 해, 서쪽으로 아드리아 해 등에 의해 경계가 이루어지는 반도이다. 

지난 6월 26일부터 7월 4일까지 발칸반도를 여행한 후 돌아왔다.
 
 자그레브의 기념엽서에 자주 등장하는 마르코브 성당 모습.
 자그레브의 기념엽서에 자주 등장하는 마르코브 성당 모습.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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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남자들에게 크로아티아의 존재를 알린 크로아티아 축구 선수들이 크로아티아의 유명한 맥주인 '오쥬스코(Ozujsko) 에 등장했다.
 한국 남자들에게 크로아티아의 존재를 알린 크로아티아 축구 선수들이 크로아티아의 유명한 맥주인 '오쥬스코(Ozujsko) 에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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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의 9일간 여행 일정은 아드리아 해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슬로베니아 - 크로아티아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몬테네그로와 터키 이스탄불공항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때문에 여행지는 발칸 반도 전부가 아닌 일부 국가에 한정됐다.

학창 시절 발칸반도는 '유럽의 화약고'라고 배웠다. 이유가 있었다. 발칸반도는 지리적으로 아시아와 유럽이 충돌하는 곳이었고 기독교와 이슬람, 카톨릭과 동방정교회가 갈등을 빚은 곳이다. 다양한 민족들이 한 뼘이라도 많은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해 싸운 곳이다.

1914년 6월 28일 오전 11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세르비아 한 청년에게 암살된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됐다.

크로아티아의 수도이자 교통요지인 자그레브
 
 자그레브의 노천시장인 돌락(Dolac) 시장 모습.
 자그레브의 노천시장인 돌락(Dolac) 시장 모습.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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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반도와 한반도는 아무런 연관이 없을까? 아름답고 살기 좋은 땅, 그리고 그 주변에 강대국들이 포진해 호시탐탐 공격하거나 약탈을 노렸던 땅이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슬로베니아를 떠나 아드리아해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서도 '님과 함께'의 구절만이 아닌 아픈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왜냐고? 정신차리지 않으면 한국의 운명도 발칸의 역사를 되풀이 할 수밖에 없는 한반도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터키 이스탄불을 경유해 일행이 본격적으로 발칸반도 여행에 나선 곳은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다. 자그레바치카 산의 경사면과 사바 강에 걸쳐있는 자그레브는 13세기 오스만투르크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그라데츠와 16세기에 요새화된 성직자 마을 카프톨의 두 마을이 합쳐져 세워졌다.

1093년 로마 카톨릭 주교관구가 되면서 유럽에 등장했으며 오랫동안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9세기 들어 새 건물들이 생기고 광장이 생겨나면서 시가지를 확장해나갔다.

그 후 아드리아해와 발칸 반도로 이어지는 도로와 철도망이 발달해 동서유럽을 연결하는 교통요지 구실을 했지만 1991년부터 1996년까지 종교와 인종 갈등으로 내전을 겪기도 했다.

가장 번화한 반젤라치크 광장

'반젤라치크 광장'은 자그레브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자 자그레브의 핵심이다. 광장은 현대적이면서도 고풍스러운 건물에 둘러싸여 있다. 처음에는 광장 한쪽에 있는 분수의 이름을 따 불렀지만 1848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침입을 물리친 영웅 '반 조세프 젤라치크'의 이름으로 바꿔 불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정권에 의해 공화국 광장으로 불리다 1991년 독립 후 예전 이름을 되찾았다.

자그레브 대성당은 12~13세기에 걸쳐 건축되었지만 1242년 타타르족의 침입과 1880년 지진으로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현재의 모습은 1990년에 원형을 최대한 살려 복원한 것이다. 아직도 복원공사 중인 성당 내부에는 프레스코화, 르네상스 양식의 의자와 계단, 벽에 새겨진 상형문자가 볼만하다는데 입장이 허락되지 않아 들어가 볼 수 없었다.
  
 자그레브 대성당 모습. 약 천 년의 역사를 가진 대성당 내부는 약 5천명이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있을 정도로 넓다. 타타르족의 침공, 화재, 지진의 피해를 입은 성당은 아직도 보수 공사 중이다.
 자그레브 대성당 모습. 약 천 년의 역사를 가진 대성당 내부는 약 5천명이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있을 정도로 넓다. 타타르족의 침공, 화재, 지진의 피해를 입은 성당은 아직도 보수 공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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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마르코 성당'에서 길을 따라 내려가다 건물옆에 새겨진 부조를 만났다. 교류와 라디오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을 쌓은 과학자 '테슬라' 부조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테슬라가  크로아티아 출신이라는 걸 자랑스럭게 여긴다.
 '성 마르코 성당'에서 길을 따라 내려가다 건물옆에 새겨진 부조를 만났다. 교류와 라디오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을 쌓은 과학자 '테슬라' 부조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테슬라가 크로아티아 출신이라는 걸 자랑스럭게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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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레브의 기념 엽서에 자주 등장하는 '성 마르코 성당'은 마르코브 광장 중앙에 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타일 모자이크의 독특한 지붕이 인상적이다. 갈색, 청색, 흰색의 선명한 타일로 오른쪽은 자그레브의 문장을, 왼쪽은 크로아티아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15세기에 그라데츠 지구의 정신적 지주로 건축된 성당 외관은 고딕 양식이지만 창문만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마무리되었다.

'성 마르코 성당'에서 도로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어느 건물 벽에 교류 전기와 라디오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테슬라 부조가 있다. 현지인들은 테슬라의 고향이 크로아티아라는걸 자랑스럽게 여긴다.

많은 나라 여행했지만 이런 박물관은 처음

자그레브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박물관 중 하나는 '실연박물관(Muzej Prekinutih Veza)'이다.

이곳은 실연을 경험한 사람들한테서 기증받은 물품과 이야기를 전시한 곳으로 실제 커플인 드라젠 그루비식과 올린카 비스티카가 4년의 열애 후 헤어짐을 추억하자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실연박물관 모습. 2011년 가장 혁신적인 유럽 박물관이 받는 '케네스 허드슨 상'을 수상했다. 시간있으면 본격적으로 취재하고 싶었지만 일행의 일정을 따라야하기 때문에 사진만 찍었다.
 실연박물관 모습. 2011년 가장 혁신적인 유럽 박물관이 받는 '케네스 허드슨 상'을 수상했다. 시간있으면 본격적으로 취재하고 싶었지만 일행의 일정을 따라야하기 때문에 사진만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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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죽음, 배신에 의한 이별 등 상실의 아픔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다른 누군가에게는 치유가 될 수도 있다. 전시물은 개구리 인형, 빨간 드레스, 하이힐 등 평범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의미있는 물건들이다.

'실연박물관'은 2011년 가장 혁신적인 유럽 박물관이 받는 상인 케네스 허드슨 상을 수상했다. 재미있는 박물관이라 본격적으로 취재해보고 싶었지만, 다른 일행들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춰야하기 때문에 빨리 둘러보고 나왔다. 재미있는 세상이다.

넥타이의 기원을 보면 2세기경 로마 제국의 병사가 방한용으로 양털 천을 목 주위에 두른 '포칼'이 넥타이의 시초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현대 넥타이와 가장 유사한 형태는 17세기에 등장한 크라바트이다.
  
 세계최초 넥타이 가게앞에는 관광객들이 몰려있었다
 세계최초 넥타이 가게앞에는 관광객들이 몰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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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1638~1715)가 왕좌에 오르기 전, 30년 전쟁 당시 프랑스 왕실을 보호하기 위해 크로아티아 병사들이 용병으로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무사 귀환의 염원을 담은 연인이나 아내로부터 받은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있었단다.

이에 관심을 보인 루이 14세가 저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시종장이 병사에 대해서 물은 것으로 착각해 크라바트라고 대답했고 이후로 남자들의 목에 맨 스카프를 크라바트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좁은 도로를 따라 조금 더 내려가자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 있었다. 넥타이가 최초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곳이란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힐끗 쳐다보고만 왔다. 퇴직한 이후론 넥타이를 거의 사용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했습니다.


태그:#자그레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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