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보이는 765kV의 고압송전을 위한 철탑에 그늘이 드리우면 땅이 수십 갈래로 갈라집니다. 마을은 지금 송전탑 선보다 더 많이 갈라져 있어요. 그게 제일 마음 아프죠."
밀양송전탑 행정대집행 10주년을 하루 앞둔 2024년 6월 10일, 5개 종단 환경단체 연대모임 종교환경회의 '생명평화순례단'을 맞아 보라마을을 안내하던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아래 밀양대책위)' 활동가 남어진씨 얼굴에도 송전탑 그늘이 드리운 듯하다.
"고압 송전탑은 일반적으로 345kV(34만 5천 볼트)인데, 그 이상 용량을 가진 초고압 송전탑은 미국, 캐나다, 호주처럼 면적이 큰 나라에서 주로 사용됩니다. 장거리로 옮겨야 하는 전기손실률을 줄이면서 송전하기 위해 개발된 765kV는 한국에서는 과한 용량이에요. 765kV 송전탑 전선은 얼마나 뜨거운지 피복조차 할 수 없어요. 손목 굵기만 한 전선에서 뿜어내는 열로 고무가 녹아내리니 아예 피복을 못 하는 거죠. 비가 오거나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웅웅'대며 울어대요. 맑은 날씨에도 76만 5천 볼트 초고압으로 전기를 보내니 온종일 기계음이 나요. 밀양 송전탑 주민들은 측정해야 피해 사실을 알 수 있는 전자파보다 시시각각 들리는 소음 때문에 더 괴로워합니다."
2012년 1월 16일 자신의 논에 철탑을 박으러 굴삭기로 밀고 들어온 한국전력(아래 한전) 용역들과 실랑이를 벌이던 산외면 보라마을 이치우(당시 74세) 씨가 분신한 '보라교'를 건너니 논 한가운데 100미터, 42층 높이의 765kV 철탑이 우뚝 서 있다. 양쪽 산등성이에 세워진 철탑 4기가 '타탁 타닥' 소음을 내며 쉴새 없이 도시로 전기를 보낸다.
철탑은 모내기를 마친 논에서도, 고추를 심은 밭에서도, 감을 따는 산에서도 보인다. 집으로 들어가면 마당으로 따라오고 방안에서도 우람하게 솟은 철탑을 피할 길 없다. 밤에는 비행기가 부딪치지 말라고 빨간불까지 깜빡이니 송전탑은 한밤중까지 밀양 주민들을 괴롭힌다. 농사용 항공방제는 언감생심이다.
"2014년 6월 11일 행정대집행 이후 10년이나 지났으니 '잊을 때도 되지 않았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눈만 뜨면 따라다니며, 존재를 과시하는 송전탑 보는 것도 힘들지만 깨진 마을공동체가 더 큰 문제입니다. 송전탑 찬성, 반대 주민은 물론이거니와 찬성 주민끼리도 보상금을 놓고 갈라져 소송도 불사하고 있어요. 집안 제사 불참은 물론 농촌사회를 지탱해 왔던 품앗이도 사라졌어요."
밀양 주민의 강력한 송전탑 반대에 직면한 한전은 마을공동보상과 개별보상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갈등을 키웠다. 남어진씨는 한전의 다층적 보상이 다층적 갈등을 빚었다고 말한다.
2014년 '송·변전설비 주변지역의 보상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아래 송주법)' 제정 당시 밀양 주민들은 이 법이 마을주민들을 갈라놓는 흉기가 될 것이라며, 송전선로의 지중화와 피해보상 범위 확대 등을 요구했지만, 묵살 당했다. 한전은 '송주법'에서 정하는 피해보상 말고도 한전 내규에 의한 개별보상금으로 마을주민들을 또다시 갈라놓았다.
"송전탑 완공 후 한전과 공권력은 떠났어요. 송전탑이 서 있는 이곳도 매년 모내기해요. 주민들은 일상을 살아야 하는데 국가는 갈등만 남기고 떠나버렸어요. 국가폭력은 여전히 밀양을 지배합니다. 회복하기 어렵죠."
밀양 땅 90km를 관통하는 161기 송전탑 중 69기 공사를 위해 박근혜 정권은 2013년 10월부터 2014년 6월까지 38만 명의 경찰을 동원해 쇠사슬을 목에 걸고, 걸쳤던 옷까지 벗어 던진 밀양 주민의 저항을 끊어냈다. 2014년 6월 11일 2000명의 경찰을 동원해 마지막 남은 산속 농성장 101·115·127·129번을 짓부수고 바로 그 자리에 송전탑을 세웠다.
"철탑 심는 일은 행정대집행 다음 날도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그렇게까지 사람들 가슴에 대못을 박아야 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어요. 국가폭력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장면이에요."
그렇게 가혹하고 잔인하게 세워진 밀양송전탑 송전율은 2024년 7월 현재 20% 남짓이다.
밀양행정대집행 10년, 핵폭주 원천봉쇄 결의대회
2024년 6월 8일 '밀양송전탑 6·11행정대집행 10년, 윤석열 핵폭주 원천봉쇄 결의대회(아래 밀양10년)'가 열렸다. 전국 15개 지역에서 22대의 버스가 출발했고, 223개 단체, '밀양의 친구들' 1500여 명이 10년 만에 밀양을 찾았다. 하늘이 뚫린 것처럼 내리는 비를 뚫고 사람들이 밀양으로 몰려들었다.
탈송전탑·탈핵 운동을 한순간도 쉬지 않았던 143가구의 밀양 주민들은 뜨겁게 반기겠다고 다짐했지만, 다시 만난 '밀양의 친구들' 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집회가 끝나고 사진을 모아 놓고 보니 결의대회인지, 송전탑을 뽑아낸 뒤 열린 잔치인지 헷갈렸어요. 싸우자는 결의의 자리를 즐거움으로 채우는 것이 밀양의 힘이에요. 밀양은 앞으로도 전기를 만들고, 나르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누구도 눈물 흘리지 않도록 싸울 겁니다."
남어진씨가 10주년 행사 후 자신의 SNS에 남긴 글이다. '밀양10년'을 제안하고 재연결하며 탈송전탑·탈핵 활동가로 바쁜 날을 보내고 있는 남어진씨를 7월 18일 서울 용산 원불교환경연대 사무실에서 다시 만났다.
"'밀양10년' 행사 이후 품 갚느라 요즘 부르는 대로 여기저기 다닙니다. 9월 7일 열릴 기후행진 기획회의에 참여했고 어제는 춘천에서 열린 '홍천 송전탑 반대 투쟁' 관련 기자회견에 다녀왔어요."
"밀양10년 행사 이후 어떻게 지냈느냐"라는 질문에 남어진씨는 "2주 동안 밀린 목수 일을 하며 허전함과 외로움을 떨쳐내려 했다"라고 한다. 밀양대책위 활동가 남어진씨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은 목수다. 다행히 활동가 목수, 목수 활동가 두 직함 사이에 거리감은 없어 보인다.
"2014~2017년까지 행정대집행 이후 '탈핵탈송전탑원정대(아래 탈탈원정대)'를 만들어 전국을 다니면서 송전탑 뒤에 핵발전이 있음을 알리고, 생산-송전-소비까지 불평등하고 정의롭지 못한 전기를 어떻게 정의롭고 평등한 전기로 만들 것인지 고민했어요. 밀양은 탈송전탑·탈핵운동을 쉼 없이 이어갔지만, 행정대집행 이후 관심도 멀어지고 돈도 떨어지더라고요.
2018년부터 먹고살기 위해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했어요. 건설 현장 노가다도 뛰고 택배에서 상하차 일도 하면서 밀양대책위 일을 병행했어요. 그러면서 지속가능한 일을 찾다가 나무를 만지면서 설계대로 자르고 붙이는 목수 일을 만났는데 저한테 딱 맞는 거예요. 그때부터 차에 연장을 싣고 다니면서 프리랜서 목수로 살았어요. 밀양대책위 활동가에서 주민1로 밀양 할매·할배들 곁에서 살게 됐죠."
남어진씨는 2년 전 밀양에 작업장을 연 목공소 대표이다. 그동안 동료 목수도 생겼고 목수 7년 차 경력도 쌓였다. 밀양 10주년 행사 준비를 위해 3개월 정도 일을 접었더니 매달 생기는 적자가 부담이다. 돌아보면 차에 연장 싣고 일을 접었다, 폈다 했던 때가 마음은 편했다.
그래도 목수라는 직업은 필요할 때 탈송전탑 현장을 지킬 수 있으니 남어진씨에게도, '밀양대책위'에게도 고마운 일이다.
"밀양송전탑 반대투쟁(아래 밀양투쟁) 이후, 한전이 더는 마음대로 송전선로 공사를 강행할 수 없게 되었어요. 765kV급 공사는 포기하고 500kV 이하, 전자파가 덜 나온다는 초고압직류송전(HVDC)으로 바꿨어요. 밀양투쟁으로 만들어진 '송주법'으로 한전이 부담해야 하는 피해보상 금액이 커졌죠.
'탈탈원정대'나 '탈탈낭독회'를 위해 전국을 다니면 밀양 덕분에 지원금을 받게 되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많이 받아요. 20여 년 동안 이어진 처절한 밀양투쟁을 보면서 '보상금이 아무리 많아도, 송전탑이 우리 마을에 들어오는 것은 막아야 한다'라는 인식도 자리 잡은 것 같아요. 밀양투쟁의 성과죠.
한전도 밀양투쟁을 교훈 삼았는지 송전탑 예정지 주민들을 예전처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을 부담스러워해요. 그렇지만 여전히 주민을 갈라치기하고, 돈으로 환심을 사려는 한전의 행태는 변하지 않았어요. 2026년 완공을 목표로 송전탑 공사를 진행하려는 홍천, 봉화, 평창 등에서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공익법률센터 '농본'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2년부터 2022년까지 송전선이 지나는 마을에 지급한 한전 지원금 규모는 전체 2649억 원으로 이 지원금은 국민이 낸 전기 요금에서 나간다.
7월 21일 <경향신문>은 '한국전력이 동해안-신가평 500kV 송전선로 사업을 진행하면서 10년 동안 식사와 여행 등에 25억 이상을 썼다'라고 보도했다. 울진 2억 8087만 원, 삼척 1억 8697만 원, 봉화 1억 5993만 원, 영월 1억 5358만 원, 정선 2억 5276만 원, 평창 2억 7203만 원, 횡성 4억 6902만 원, 홍천 2억 4500만 원, 양평 4억 4020만 원, 가평 4612만 원 등 총 25억이 송전탑 예정지에 뿌려졌다. 밀양 주민들은 한전의 '돈지랄'이 마을공동체를 망쳤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공기업인 한전이 돈으로 주민을 매수하고, 마을공동체를 파괴하는 일이 밀양에서와 같이 10년 후 강원도에서도 반복되고 있어요. 밀양처럼 돈 때문에 마을공동체가 깨지는 일도 반복될 거예요."
'전기는 여전히 눈물을 타고 흐른다'라는 '밀양10년' 주제처럼 탈송전탑 운동은 여전히 지역주민의 눈물을 타고 전국으로 흐르는 중이다.
'345㎸ 북당진-신탕정 송전선로'는 11년이나 지연되었고 동해안 핵발전소, 화력발전소와 수도권을 잇는 '500kV HVDC 동해안~신가평 송전선로'도 2019년 완공 목표를 훌쩍 넘었다.
"'밀양10년'은 지역에 갇히지 않고 밀양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연결하고 다음 투쟁을 약속하는 자리였어요. 탈송전탑 운동은 해당 지역, 특정 사람들만의 일이 아니라 기후위기 시대, 정의로운 에너지전환을 향한 운동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목공소는 동료 목수에게 맡기고 지난 2월부터 밀양 시민사회단체와 고민을 나누기 시작했다. 당연히 밀양대책위 어른들과 먼저 상의했다. 남어진씨는 밀양 어른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일이 그려지고, 주제어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오랜 시간 밀양 어른들 곁에서 일하며 배운 지혜이다. 4월 말 전국에 퍼져있던 '밀양의 친구들'이 재연결 되었고 전국구 '밀양10년' 기획단이 완성된다.
"기획팀·조직팀·홍보팀으로 구성된 '밀양10년' 기획단에 50여 명이 모였어요. 기획단은 '밀양 송전탑 투쟁이 나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느끼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연결'에 공을 들였어요. '탈송전탑·탈핵'을 외치는 자리에 오랜만에 많은 사람이 참여했고, 참여자 중 절반이 밀양을 처음 찾은 사람들이었어요. 청년들도 꽤 많이 왔는데 '무엇'이 제 또래 청년들을 '밀양10년' 행사에 오게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연락처라도 알면 묻고 싶어요."
밀양은 아픈 관절
'밀양10년' 행사를 '윤석열 핵폭주 원천봉쇄 결의대회'라고 내세운 것은 건설을 재개한 핵발전소든, 수명을 연장하려는 핵발전소든, 신규이든 핵발전소는 전부 틀어막겠다는 야심 찬 결기였다. 송전탑을 증설하지 못하면 삼척 블루파워 1·2호기 석탄화력발전소도 못 돌리고, 울산 울주군에 짓겠다는 신규핵발전소 계획도 물 건너간다. 탈송전탑 운동이 '윤석열 정권의 핵폭주를 막을 수 있는 주요한 투쟁'이라는 것이다. 10년 전 밀양 철탑 예정지 움막 하나를 지키는 것이 신규핵발전소를 막는 길이라고 했던 산속 농성장 밀양 주민들도 그리 말했었다.
"'다시 타는 밀양희망버스'에서 밀양투쟁을 담은 영상도 보고, 나에게 밀양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보는 '엽서쓰기'를 했어요. 엽서를 쓰고 돌아가면서 인사 겸 엽서 읽기를 했어요. '서로 각자가 맞이하는 밀양 10주년'의 의미를 나누자는 취지였죠. 800장의 엽서가 밀양대책위 사무실에 있는데 내용이 엄청나요. 제가 꼽은 베스트 엽서는 '밀양은 나에게 아픈 관절이다'였어요. 송전탑이 뼈마디처럼 생겼잖아요. 밀양 할매·할배들의 상한 마음과 아픈 몸을 상징하는 것 같아 웃기면서도 왠지 슬펐죠."
'밀양의 친구들'은 억수같이 퍼붓는 비를 맞으며 10년 만에 움막이 있던 자리, 철탑이 꽂힌 현장을 찾아 '웅웅' 거리며 돌아가는 송전탑 아래 섰다. 밀양 주민이 현재 감내하고 있는 '고통'의 체험이었고, 다시 싸우자는 연결의식이었다.
AI, 반도체 등 전력 과소비 산업이 기승을 부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송전탑을 피해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탈송전탑 운동은 '핵발전'을 '재생에너지'로 전환한다고 끝나지 않는다. 호남지역은 태양광, 풍력, 해상풍력 등 대규모 재생에너지 발전소가 만들어내는 전기를 도시로 보낼 송전탑을 건설 중이고 수백 개의 송전탑 건설이 예정되어 있다.
'더 이상 누군가의 희생과 고통을 바탕으로 만든 전기를 쓰지 말자'는 각성제 역할을 한 밀양투쟁은 '에너지 생산은 소비지와 가까워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했고 '지자체별로 전력자급율을 높이는 분산형 발전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고 논의를 진전시킨다. 남어진씨가 '탈송전탑운동이 기후정의'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전기'에 끌려 들어온 밀양
열여덟 살이었던 남어진씨를 밀양으로 이끈 것은 '전기'였다.
"밀양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군위에서 살고 있었어요. 밀양 투쟁에 대해 간간이 듣고 있었는데 '전기'라는 말에 꽂혔어요. 저도 전기를 쓰잖아요. 밀양에서 '전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했어요. 2013년 10월, 밀양 너른마당에서 행사가 있다길래 무작정 밀양 가는 버스를 탔어요. 핸드폰을 집에 두고 와서 밀양까지 오는데 고생 좀 했어요."
전기 때문에 싸우고 있는 밀양에 오면서 핸드폰을 사용한다는 것이 꺼림직했던 18세 소년은 핸드폰 없이 밀양에 도착했고, 누군가 바드리 마을 101번 농성장으로 가라고 했다. 산비탈에 있었던 바드리 마을에 도착한 소년은 한전 용역과 경찰이 막고 있는 길을 트면서 101번 농성장에 올랐다.
물도, 먹거리도 사람이 짊어지고 오르내려야 해서 자연스럽게 적은 것에 만족하는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생활이 몸에 익을 즈음 2013년 12월 2일 상동면 고정리에서 돼지를 키우던 유한숙(71세) 씨가 '살아서는 내가 저것을 못 볼 것 같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을 시도했고 4일 만인 12월 6일 숨을 거뒀다.
밀양대책위 사람들은 이치우씨에 이어 두 번째 피해자가 나타나자 "동료를 지키지 못 했다"라며 참담함을 감추지 못했다. 밀양대책위와 고 유한숙씨 장례위원회가 밀양시 삼문동 영남루 맞은편에 분향소를 설치했다. 그러나 분향소는 차리자마자 경찰에 의해 뜯겨나갔고, 천막 기둥을 잡고 안간힘을 쓰던 남어진씨는 기둥 사이에 머리가 끼이면서 실신해 병원으로 실려 갔다.
"앰블런스에 실려 갔는데 2분 만에 병원에 도착했어요. 다시 병원을 나와 분향소로 갔어요. 그때부터 60여 일 동안 유한숙 어르신 영정을 들고 길바닥이나 다름없는 분향소를 지켰어요. 사람이 죽는 것도 처음 봤는데, 죽음마저 사수해야 하는 현실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눈과 이슬, 한기를 가리기 위해 비닐이라도 칠라치면 경찰과 한바탕 밀고 당겨야 했고, 박스로 허름한 벽을 치고 하루하루 분향소를 지키는 것이 투쟁이 되었다. 죽음을 둘러싼 한전과 공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을 경험하며 18세 남어진씨는 학교를 자퇴하고 밀양대책위 활동가가 되었다.
"유한숙 어르신의 죽음과 분향소 사수 투쟁은 제가 경험한 12년 '밀양투쟁'에서 가장 잊혀지지 않는 비극적 장면이에요. 학교로 돌아갈까 고민하던 제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되었죠."
밀양대책위와 유족은 59일 만에 밀양시와 협의를 거쳐 1월 28일 삼문동 강변둔치 공영주차장에 컨테이너 분향소를 설치할 수 있었다.
한전은 사람이 죽든 말든 송전탑 공사에 열을 올렸다. 밀양시 4개면 전체 52개 송전탑 현장 가운데 9기가 완공되고 20곳에서 공사가 진행되었다. 한전은 6월 11일 행정대집행을 향해 돈으로 주민들을 가르며, 맹렬히 송전탑을 밀양 땅에 박아댔다.
돈 든 탑이 무너진다
"'밀양10년' 행사에서 밀양할매가 1500명의 사람들을 보고 감격했는지 '우리는 졌지만, 사람을 남겼다'라고 말씀하셨어요. 평상시에도 '우리는 늙어서 죽겠지만, 너희들은 송전탑을 꼭 뽑아라'라고 말씀하세요. 송전탑이 마을에 존재하는 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삶을 망가뜨리는지 잘 알고 있는 거죠."
'밀양할매'들의 언어는 통찰을 담았고 표현은 직관적이다. 남어진씨는 '밀양10년'은 '여전히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는 명제를 내세웠고 '우리가 밀양이다'는 구호를 되살려 10년 전 '희망버스' 감성을 일깨우고자 했다. 감성은 건드리되 밀양의 기억을 추억에만 그치지 않게 하자는 전략이었다. 일부러 '밀양할매'의 어록을 쓰지 않았는데 최근 온라인 기록관을 둘러보니 왠지 아쉽다.
"2021년 온라인 '밀양⸱청도 송전탑 반대 투쟁 기록관'을 만들었어요. 마음이 힘들 때, 용기가 필요할 때 들락거리는 곳이에요. 박배일 영화감독, 이재각 사진작가와 밀양을 기록한 수십 명의 사람으로 '기록관 준비팀'을 꾸렸어요. 3개월 정도 계획했는데 그해 12월에 개관했으니 기록관을 만드는 데 6개월 정도 걸렸어요. 그때도 목수 일을 잠시 접었었죠. '밀양10년'을 마치고 오랜만에 기록관에 들어가 보니 밀양할매들의 '입말'이 살아 떠도는 거예요. 예를 들면 '돈 든 탑이 무너진다' 이런 말들은 구호로 외칠 걸 하는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온라인 기록관은 "밀양·청도가 왜 싸워야 했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라고 말하기 위한 공간이다. 수많은 사진과 자료 중 '밀양·청도 송전탑 반대투쟁' 액기스만 모은 76.5장면은 '1장 이 산이 진짜 좋아예 / 2장 갈 산이 없다 / 3장 밥은 먹고 가라 / 4장 버티는 거죠, 배짱이 있어야 되거든, 사람은'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76장의 사진과 글을 배치했다.
목에 쇠사슬을 걸고 된장국에 밥 먹는 밀양할매들과 송전탑이 곧 박힐 산을 뛰어다니는 어린아이, 경찰과 한전의 거침없는 공권력에 맞선 주민과 연대자의 단단한 뒷모습, 연대의 비밀병기였던 비빔밥까지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2014년 6월 이전으로 돌아간 듯하다.
여느 농촌 마을 일상과 풍경이 다르지 않았던 밀양은 이제 765kV 송전탑이 빽빽이 박힌 살풍경으로 남았다.
단호하고 다정한 연대
밀양주민들은 "연대자들하고 같이 먹었던 밥, 나누었던 이야기의 힘으로 지금껏 버텨왔다"라고 말한다. '밀양투쟁'을 통해 세상을 배웠고, 아픈 사람들끼리 기대니 덜 아프다는 것을 알았다. 폭력의 기억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쇠사슬만 있지 않았다. 누룽지, 고구마, 라면도 있고 너나없이 둘러앉아 먹은 밥상도 있었다. 고생스러웠던 산속 움막에서 구워 먹었던 고등어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라는 것도, 까만 밤 산길을 헤치고 달려온 연대자들이 내민 바나나가 그토록 달콤한지 산 아래로 내려오고서야 알았다. '밀양투쟁'을 일군 동력은 '연대'였다.
여전히 밀양대책위 활동가로 살아가는 남어진씨에게 '연대'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때론 처절하고, 때론 지루할 수 있는 하루를 지켜내야 하는 산속 농성장 싸움을 하면서 곁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어요. 지금은 산속 움막 같은 현장은 없지만, 사람을 대하는 밀양주민들의 '태도'가 연대를 잇는 힘이라고 생각해요. 행정대집행 이후에도 꾸준히 밀양을 찾는 연대자들이나 처음 밀양을 찾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밀양주민들의 한결같고 꾸준한 '태도'는 산속 농성장이나 산아래 마을에서나 다를 바 없었어요."
밀양 산속 농성장에 한 번이라도 다녀온 사람이라면, 하룻밤 움막에서 불편한 잠을 자 본 사람이라면 밀양할매들의 매력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자기 일처럼 먹을 것 양손에 들고 공권력을 밀치며 산속 움막을 찾아오는 연대자들을 맞아 본 밀양 주민이라면 그들이 내민 따뜻한 손을 잊을 수 없다.
"경찰, 한전용역과 싸울 때는 목숨까지 걸 정도로 단호했고, 연대자들과 산속 움막에서 일상을 나눌 때면 세상 다정한 할매·할배로 돌아와요. '밀양투쟁'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단호하고 다정한 연대의 힘'이었어요."
'돋보이는' 탈핵
신규핵발전소 터를 찾기 어려운 것처럼 밀양투쟁 이후 송전탑 터 또한 찾기 어려워졌다. 에너지 수요를 감당하려면 핵발전 수명연장도 해야 하고, 송전탑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대규모 송전에 의지한 전력 정책을 바꿔내지 않는 한 누구든 '전기'로 인한 희생자가 될 수 있다. 밀양주민과 남어진씨가 여전히 탈송전탑·탈핵 현장을 지키는 이유다.
"'이번 9월 7일 기후행동은 탈핵 대오가 돋보였으면 좋겠어요. '탈핵이 기후정의다'라는 구호 아래 3만 명의 탈핵 깃발 대오가 신나게 퍼레이드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영광, 월성, 고리, 울진 등을 돌면서 탈핵 기후행진을 벌이는 거예요. 어때요?"
'탈핵'을 돋보이게 하고 싶다고 눈을 반짝이며 말하던 남어진씨는 체감온도 50도에 육박하는 밀양목공소에서 혹독한 8월의 여름을 나고 있다. 피할 길 없는 더위와 맞서며 "이번 생은 망했다"라고 외치면서도 탈송전탑·탈핵 연대 요청에는 두말없이 현장으로 향한다.
"500kV송전탑 반대운동을 하는 홍천 주민은 '홍천 다음에 또 강원도에 송전탑이 들어설까 봐 싸운다'라고 말해요. 탈송전탑 운동하는 사람들은 다음 세대가 싸울 때 지금의 싸움이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싸우는 거죠. 밀양 주민들은 제2의 송전탑 반대를 외치고 강원도에서는 제3의 송전탑은 절대 안 된다고 소리쳐요. 탈송전탑 투쟁은 '다음'과 '미래'를 잇는 투쟁이에요."
'지금 내리는 이 결정이 향후 후손 7세대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아메리카 선주민 이로쿼이족의 '7세대 원칙'처럼 남어진씨와 탈송전탑 현장에 선 사람들은 다음 세대와 제2, 제3의 피해지역을 위해 오늘도 현장에서 고군분투 중이다.
'밀양10년' 행사에 온 초등학생이 남긴 엽서에는 "밀양은 나에게 큰 산입니다. 나는 밀양을 위해 큰 소리로 외치겠습니다"라고 썼다. 고등학생이었던 남어진씨가 버텨낸 밀양투쟁은 이렇게 세대를 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