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회 광복절이다. 정부에서 주최한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과 대한민국 광복회가 주관한 서울 용산구 백범기념관 두 곳에서 올 광복절 기념식이 동시에 열렸다.
유튜브 화면으로 두 경축식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참으로 비통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아마도 하늘에서 내려다보셨을 선열님들의 마음도 결코 편치 않으셨을 것이다.
나는 20여 년 전부터 이종찬 광복회장과 자주 만났다. 새천년을 앞둔 1999년 여름, 독립운동가 후손 두 분(경북 안동 출신의 석주 이상룡 선생의 증손 이항증 선생, 그리고 일송 김동삼 선생 손자 김중생 선생)의 알뜰한 안내를 받으면서 중국대륙에 흩어진 항일유적지를 순례한 뒤 <항일유적답사기>란 책을 발간했다.
그런 뒤 2004년 6월, 그 답사기를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다. 우리 독립전사의 산실이었던 중국 지린성 유하현 고산자와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 답사기를 게재할 때, 우당기념관 윤흥묵 상무님으로부터 꼭 한 번 우당기념관에 들러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그 이듬해(2005) 봄, 안동문화방송국에서 그해 8.15 특집으로 경북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의 행장을 담은 <혁신 유림>이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는데, 나에게 코디(길잡이) 역할을 부탁하기에 마침 은퇴 후인지라 흔쾌히 승낙한 바 있었다.
안동 문화방송국 담당 PD는 한일병합 후 독립지사 망명 초기 인사 가운데 신흥무관학교를 세우신 우당 이회영 선생 얘기는 뺄 수 없다면서 중국으로 출국에 앞서 우당 기념관을 들르자 하여, 그분과 함께 우당기념관을 방문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종찬 이사장(우당 이회영 선생 기념 사업회)이 우리 일행을 정중히 맞아주면서 기념관 내 전시물들을 일일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나는 그 전시물, 특히 숱한 독립지사들의 사진을 보고 감탄했다. 관람 후 감사의 말씀과 함께 한 마디 보탰다.
"이 귀한 사진들을 이사장님 가보로만 전시하지 마시고 전 국민들이 볼 수 있게 하십시오."
그러자 이종찬 이사장이 정색을 하면서 요청했다.
"제가 미처 생각지 못한 아주 좋은 방안입니다. 박 선생이 한 번 주선해 보십시오."
그 우연찮게 오간 말이 씨가 돼 이종찬 이사장과 나는 공동으로 <사진으로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라는 책을 눈빛출판사에서 발간했다. 사진 자료는 우당기념관 측에서, 간추린 독립운동약사는 내가 숱한 독립운동사 서적들을 들춘 뒤 초고를 만들어 출판사로 넘겼다. 초교부터 3교까지는 내가 노트북을 들고 아예 우당기념관 서재로 가서 마주 앉아 교정 작업을 했다.
이종찬 광복회장과의 인연
이종찬 광복회장이 누군가. 한때는 여당 원내총무요, 대한민국 국정원장으로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막강한 분이 아니신가. 그런데 내 앞의 이종찬 이사장은 그 나이에도 컴퓨터 사용이 나보다 훨씬 능수능란하고 독립운동사에는 무소불능이었다.
같이 일을 하다가 식사 때가 되면 짜장면을 시켜 먹거나 가까운 설렁탕 집에 가는 등, 교정 기간 내내 마치 동기간처럼 가까워졌다. 이후 집안행사 때도 초대해줘서 아버님 이규학 지사의 묘소도 참배하고, 우당기념일 날에도 참석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내가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 현지 답사를 떠날 때도, 호남의병 전적지 답사 때도 노자에 보태 쓰라면서 꽤 많은 성금을 보태 주기도 했다.
'노병'의 마지막 봉사
지난 해 3월, 이종찬 이사장은 광복회장 후보 출마 선언식에 참석해 사자후를 토했다.
"제 나이 어느 덧 내년이면 미수(米壽, 88세)를 앞두고 있습니다. 이제는 인생을 정리할 시점입니다. 그래서 이즈음 아내와 같이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가까운 독립유공자 후손 및 광복회 회원들의 대한민국 광복회가 난파선처럼 가라앉고 있습니다.
광복회는 여느 단체와 다릅니다.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 싸워온 지사들의 모임입니다. 나라의 어려움이 있으면 앞장서 나가고, 후진들에게 모범을 보인 선열들의 애국정신을 가르치는 단체입니다.
지금 광복회가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데, 누굴 지도하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회원들이 갈가리 찢겨 있습니다. 회원들의 상호 고소, 고발로 재판정에 가야 답을 얻는 단체로 전락하였습니다. '나라에 어른이 없습니다. 나라에 원로가 없습니다'고 저에게 난파선 광복회를 구해 달라는 거듭된 애소에 차마 외면할 수 없어 노병이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런 그가 노구를 이끌고 광복절날 백범기념관으로 가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절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