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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드리안과 알파고 그리고 격자

네덜란드의 화가로서 우리에겐 '차가운 추상'으로 잘 알려진 거장 피에트 몬드리안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캔버스 위에 가능한 단순하게 표현하길 원했다. 그리하여 결국은 가로와 세로의 직선(대각선을 매우 싫어했다), 삼원색과 무채색만으로 표현을 단순화했다.

그저 특이한 화풍을 창조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우주의 진리와 근원을 표현하고자 했다는 몬드리안의 주장을 들어보면 아마도 그는 '화소' 또는 '격자'와 같은 이미지 표현의 최소 단위를 원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번에는 시간을 달려 최근의 격자로 가보자. 2016년 3월 인공지능 알파고와 인간 이세돌의 바둑 대국 현장이다.

그날 인공지능 바둑프로그램 알파고는 가로 19줄과 세로 19줄, '겨우 361개' 격자점에 돌을 올려 놓는 대결에서 인간 대표 이세돌을 이겼다.

겨우 361개, 하지만 그 점에 바둑돌을 두어 만들어질 수 있는 경우의 수는 361!(361x360x359x...x3x2x1)로서 무려 769자리 수이며, 바둑의 규칙과 통상의 착수를 고려해 크기를 조금 줄여도 우주의 원자 수보다 많다고 한다. 그렇기에 인공지능과 엄청난 전산자원을 동원하여도 '이제서야' 인간을 앞설 수 있었던 것이다.

격자와 수치 예보 모델의 현실 타협

정보와 현상을 디지털, 즉 수치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격자는 날씨의 표현을 위해서도 역시 활용된다. 기상청의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현재의 날씨 관련 분포도도와 수치 예보 모델의 예측 정보 역시 모두 격자를 기반으로 생성된다.

 수치 예보 모델 격자의 크기에 따른 지형 표현
 수치 예보 모델 격자의 크기에 따른 지형 표현
ⓒ 기상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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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자는 그 크기가 작을수록, 즉 같은 공간을 많은 격자로 표현할수록 실제와 유사한 모습이 구현된다. 그렇다면 정확한 날씨 표현을 위해 수치 예보 모델 격자의 크기를 매우 작게 만들어 해상도를 높이면 예측이 정확해지지 않을까. 참고로 현재 세계 각 국가와 기관의 현업용 전 지구 수치 예보 모델 격자 크기는 약 10km x 10km 수준이다.

하지만 인간의 과학에 대한 이해가 완벽하다고 가정하고(사실은 여기에서부터 함정이다) 기상 관측의 해상도가 뒷받침할 수 있다 하더라도 현실 문제가 따른다. 바둑의 예에서 보았듯이 감당해야 할 계산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이다. 심지어 각 날씨 격자에 담긴 정보의 양은 바둑의 흑이냐 백이냐의 수준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렇다면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슈퍼 컴퓨터의 성능을 최대한 끌어 올리면 될까. 역시나 무리다. 세상의 자원을 모두 날씨 예측에만 투입할 수는 없지 않은가. 따라서 우리네 삶과 마찬가지로 날씨의 예측 수준 역시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

보지 못하는 대상을 표현하라!

프랑스에서 배관공의 아들로 태어나 매우 가난했던 화가 앙리 루소는 이국의 밀림과 야생을 직접 여행할 기회가 없었다. 그는 박물관과 식물원, 동물원 등에서 얻은 제한적 정보를 통해 직접 볼 수 없는 대상을 직관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으로 현실과 타협해야 했다.

예보관도 대상을 볼 수 없다. 눈에 보이는 날씨를 만들어내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와 수증기이기 때문이다. 수치 예보 모델의 후방 지원에도 한계가 있다. 상술했듯 격자의 크기는 여전히 10km x 10km 수준이기에 그 격자 안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모두 담아낼 수 없고 인간이 유체(流體)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결국 예보관은 수치 예보 모델로부터 출발한 체계적 밑그림에 더해 그간의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체제적' 해석(바둑에서 '모양'을 보듯)을 해야 한다. 또한 그러한 경험과 지혜가 근거로 작동할 수 있도록 오랜 시간 통계와 검증을 거치고 비판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 과정 역시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 인원도 지식도 모두 예산, 즉 자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날씨 정보 생산을 위해 어느 수준에서 현실과 타협하고 있을까.

일기예보의 가격

 2023년 8월 8일 서울 동작구 기상청에서 관계자들이 제6호 태풍 카눈(KHANUN)의 예상 진로를 살펴보고 있다.
 2023년 8월 8일 서울 동작구 기상청에서 관계자들이 제6호 태풍 카눈(KHANUN)의 예상 진로를 살펴보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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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발표된 기상청의 2025년 예산(정부안) 편성을 살펴보면 약 4700억 원이며, 이후 국회의 심의를 거치며 변화할 수 있다. 단순하게 계산하면 국민 1인당 연간 약 9천 원, 월간 약 750원의 소중한 세금을 날씨 정보 생산에 지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750원이 모이면 일기예보와 기후 예측의 생산, 국가 기상 슈퍼 컴퓨터와 기상 위성, 다수의 기상 레이더와 자동 기상 관측 장비 운영, 수치 예보 모델 개선, 기상 과학 연구 등의 전통적 업무 뿐만 아니라 기후 변화에 대한 감시와 시나리오 생산, 도심항공교통(UAM) 운행을 위한 기술 개발과 연구 등 미래 사회에 대한 대비까지 가능하게 하는 매우 큰 돈이 된다.

현실 사회에서 어느 나라든 일기예보에 대한 불만은 일상이다. 어쩌면 과학기술의 발전 수준에 우리가 거는 기대감이 과거에 비할 수 없이 높아졌기에 영원히 이 기대감을 충족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다만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사회·경제적 효과, 즉 이용 가치로서 우리의 월간 날씨 구독료(?)를 평가해 보자.

정말 날씨에 대해 아무런 정보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한다면, 평소 만족스럽지 않다고 생각했던 일기예보의 가격으로서 한달 750원의 이용료는 남는 투자 아닐까.

#기상청#예산#수치예보모델#예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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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청 총괄예보관실과 국가기상슈퍼컴퓨터센터를 거쳐, 현재는.. 현재는.. 영업용 화물차를 운전하는 노마드 인생. 그거 아시죠? 운전하는 동안, 샤워할 때 만큼이나 좋은 아이디어가 많이 나온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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