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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보험 없는 주부들이 쓰는 '점을 찍는 여자들'은 끊임없는 시도를 통해 그 무엇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여자들의 이야기입니다.[기자말]
퇴사 후 13년 만에 옛 직장 동료들을 만났다. 한 명은 퇴사 후 자영업을 하고, 다른 한 명은 예전 회사를 계속 다니며 지금은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대형 학원장이다.

'내가 만약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그의 자리가 내 것이 되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아이들도 키우고 돈도 벌며 사회적 지위도 꽤 괜찮았을 텐데... 아이들의 진학지도와 교육에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선배가 버텨낸 시간을 건너뛰고, 현재의 나를 그의 자리에 대입해 버린 것이다.

육아를 선택한 나

일하러 나가면서 아이들 먹을 간식 준비 아이들 태어나고 난생처음 9 to 6 근무를 하게 되었다. 단 이틀이지만 아이들과 내겐 너무나 커다란 변화였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 일하러 나가면서 아이들 먹을 간식 준비 아이들 태어나고 난생처음 9 to 6 근무를 하게 되었다. 단 이틀이지만 아이들과 내겐 너무나 커다란 변화였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 구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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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전, 나는 육아와 일 중에서 '육아'를 선택했다. 당시 회사는 인수 합병 절차를 진행 중이었고, 회사는 혼란스러웠으며 일도 몇 배로 많아졌다. 입사 8년 차 팀장이었던 나는 가장 바쁘게 활동하던 시기였다. 일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나지만, 이대로 쭉 회사를 다니다가는 출산이 어렵겠다는 판단이 섰다.

아이를 낳고 싶었다. 내 손으로 아이를 키우고 싶었다. 일과 육아를 동시에 병행하기엔 어렵겠다는 생각에 퇴사를 결심했다. 그렇게 한창 일하며 경력을 쌓을 시기에 회사를 떠났다.

아이는 자연스럽게 우리 부부에게 찾아왔고, 육아를 하는 동안 부동산에 눈을 뜨게 되어 자산도 꽤 늘렸다. 나는 어떤 일에서든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이다. 남의 손에 맡기기보다 내 힘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창조하는 데서 살아 있음을 느끼고 동기 부여가 되는 사람이다. 이런 나의 성향은 육아에서도 적극성을 발휘하게 만들었다.

큰 아이 어릴 적에는 부동산 공부를, 둘째를 키울 때는 엄마들과 육아 모임을 만들어 만 2년을 함께 했다. 매주 숲에 모여 계절 놀이를 기획하고, 공동부엌에서 절기 음식을 만들어 먹었던 일, 아이들과 살 부비며 함께 웃고 울던 그 시간들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다.

아이를 키우면서 시작한 대체의학 공부를 집밥과 가족 건강 관리에 적용하며 뿌듯함을 느꼈다. 내 손으로 꾸려가는 나의 세계가 나의 가족을 지키는 일등 공신이라는 생각에 보람을 느꼈다.

그렇다고 내가 일에 대한 갈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문득 찾아오는 나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내 마음을 공허하게 만들곤 했다.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 '어떤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인가?' , '나의 사회적 쓸모는 무엇인가?' 살림과 육아는 분명 가치 있는 일이지만 이런 근원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주진 못했다.

문득 나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물음표가 켜질 때면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결혼 전 돌아가신 친정 엄마에 대한 미움과 원망도 올라왔다. '애 봐줄 사람이 없어서 믿고 맡길 곳이 없어서... 내가 일을 못하지, 내가 능력이 없나? 날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일을 못하지' 이 마음은 나를 피해의식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워킹맘들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 내 처지에 대한 한탄, 이런 것들이 말이다.

영원히 아기일 것만 같던 아이들이 이제 초5, 초2학년이다. 엄마 도움 없이도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진 아이들을 보며 나도 조금씩 사회로 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는 취업 교육도 받아보고, 이력서도 내고, 몇 차례 면접도 보았다. 많지는 않지만 학교에서 수업할 기회도 생겼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나를 불러주는 일, 내 가능성을 타진 중이다.

일을 선택한 나

 육아와 병행하며 지금의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지속해서 발굴하고 도전해 온 나에게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육아와 병행하며 지금의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지속해서 발굴하고 도전해 온 나에게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 lucabrav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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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다시 사회로 나갈 마음의 준비를 하다 보니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모든 것이 나의 자발적 선택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일 대신 육아를 선택한 것도, 직업인의 삶 대신 엄마의 삶을 선택한 것도 바로 나였다.

비록 물질적인 보상과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지 못했지만, 내가 누린 시간들은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귀한 시간이었음을 깨닫는다. 등에 떠밀려, 강요당했다는 억울함으로부터 해방되니 이제야 경력과 바꾼 나의 시간들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출산과 육아로 잘려버린 경력의 공백이 큰 구멍처럼 느껴지지만, 그동안 쌓아왔던 지식과 공부와 경험들이 여전히 굳건히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물론 그전보다 훨씬 낮아진 지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안다.

나의 경력은 멈췄지만 내 삶은 지속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나를 지지하고 있는 밑둥을 확인하며 이를 바탕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들에 다시 도전 중이다. 두 아이의 엄마로, 육아와 병행하며 지금의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지속해서 발굴하고 도전해 온 나에게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가정과 아이들만 바라보던 삶에서, 시선을 확장해 본다. 나이는 훌쩍 들었지만 다시 사회 초년생이다. 때때로 내가 바꾼 시간에 대한 억울함이 고개를 들 것이다. 나와 비슷한 연배, 일을 지킨 선배들을 사회에서 만났을 때 부러운 마음과 쪼그라드는 내 마음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지금 내가 깨달은 자발적 선택의 시간들을 떠올렸으면 한다. 내가 선택한 시간에 누렸던 행복들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끊임없는 시도를 통해 그 무엇이 될 수 있다고 믿는, 4대보험 없는 여성 시민기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육아#경력단절#워킹맘#여성의일#중년여성의취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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