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한가위의 넉넉함이다. 이제 내 나이도 한가위를 지나고 있다. 지나온 삶을 두 손에 가득 담아 본다. 그런데 두 손에 가득 담긴 물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듯 다 빠져나간다. 넉넉함은 그만두고 남아 있는 것은 부끄러움뿐이다.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나무를 하다 보면 자주 손등이나 다리 어디 찢기고 긁혀
돌아오는 길이 절뚝거린다 하루해가 저문다
비로소 어둠이 고요한 것들을 빛나게 한다
별빛이 차다 불을 지펴야겠군
이것들 한때 숲을 이루며 저마다 깊어졌던 것들
아궁이 속에서 어떤 것 더 활활 타오르며
거품을 무는 것이 있다
몇 번이나 도끼질이 빗나가던 옹이 박힌 나무다
그건 상처다 상처받은 나무
이승의 여기저기에 등뼈를 꺾인
그리하여 일그러진 것들도 한 번은 무섭게 타오를 수 있는가
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
내 삶의 무거운 옹이들도 불길을 타고
먼지처럼 날아갔으면 좋겠어
타오르는 것들은 허공에 올라 재를 남긴다
흰 재, 저 흰 재 부추밭에 뿌려야지
흰 부추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
흰 부추꽃 그 환한 인생
- 박남준의 <흰 부추꽃으로>
나도 20대 때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기를 바랐다. 그런데 살아오면서 몸이 서툴러 손등이나 다리 어디가 찢기고 긁혀 상처가 났다. 이 상처들은 온전히 아물지 않고 흔적을 남겼다. 그 흔적들이 옹이로 남아 있다. 이 옹이들은 살아오면서 감추고 싶은 상처가 되었다. 이 옹이들을 어떻게 하지.
내가 어렵고 힘들 때 곁에서 함께하며 손을 내밀었던 지인들이 있었다.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갚으리라고 다짐했지만, 어느 순간 생각의 차이로 거리가 멀어져 외면한 적이 있다. 지난날의 베풂을 잊은 것이, 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한 것이 부끄럽다.
생각이 다를 때 그 관점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공격하며 이기려 했다. 이기기 위해 억지를 부리고, 꼬투리를 잡으려 노력했다. 단지 내 생각이 맞다는 것뿐, 상대가 받을 상처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이 다를 뿐인데 그것이 뭐라고 그랬는지. 참 못났다.
나의 인품이, 능력이 보잘것없음에도 단지 나를 격려해 주기 위해 하였던 지인들의 빈말을, 내가 진짜 그런 인품을,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착각한 적이 있다. 착각도 이런 허황된 착각을. 어리석기가 그지없다. 지금은 경계하고 경계한다.
세상과 맞서는 것이 두려워 타협한 적도 있다. 신념, 가치관을 지니고 살아야 함을 마음으로 뿐만 아니라, 입 밖으로도 내뱉었는데 말이 앞섰다.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잃게 하고, 실망을 안겨주었다. 이럴 때는 나도 내가 싫었다.
이 옹이들은 타인에게서, 세상에서 받은 상처가 아니라 오롯이 나의 어리석음과 성급함에서 비롯된 부끄러움들이다. 그런데 이것이 나만의 부끄러움으로만 끝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준 적도 있다.
나의 옹이들도 시에서처럼 활활 태울 수만 있으면, 그로 인해 나의 노년에 부끄러움과 빚이 없어지면, 그래서 나이만큼 넉넉하고 부드러운 사람으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 옹이들을 흔적도 없이 활활 태울 수가 없다. 아직도 나의 어리석음과 성급함이 되풀이되고 있다. 더구나 이것이 나만의 상처로 끝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이어져 있기도 하다.
상처를 치유하는 길은 내가 변하여 그 옹이들을 감쌀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은 안 변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변하기가 힘들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변하고 싶다. 이대로 나이 들어가면 내 삶이 너무 초라할 것 같다. 논어의 한 구절이 희망을 준다.
子曰 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인이 멀리 있는가? 내가 인을 실천하고자 하면, 인은 바로 나에게 다가온다).
공자의 제자들은 스승에게 인을 실천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공자는 말한다. 그것은 하고자 하는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노력만 한다면 반드시 인에 도달할 수 있다. 힘들고 어렵다고 그만두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사람은 안 변한다지만 변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변한다고 믿는다. 그 변화를 위해 일정 시간 동안 단절이 필요하다.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연과 함께하면서, 자연을 배우면서, 지난날의 상처를 씻어내고, 나이만큼 넉넉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싶다. 내가 시골살이를 선택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이제 내가 어렵고 힘들 때 도와준 지인들에게 다가서고자 한다. 그들은 나보다 훨씬 넉넉한 마음을 지니고 있기에 내가 다가서면 묻지도 않고 안아줄 것이다. 이 일은 뒤로 미루지 않고 할 수 있을 때 바로바로 하려 한다.
말을 앞세우지 않으려 한다. 말을 줄이고 이치에 맞는 말을 하려 한다. 이렇게 말하려고 끊임없이 애를 써야 한다. 이제 말을 허투루 하면 그것을 수습할 시간도 많지 않다. 이해보다는 손가락질받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빈말이 난무할 뿐만 아니라, 정보 홍수 시대에 살고 있다. 필요한 정보를 찾기도 편하다. 이제 그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필요하다. '누가 카드라'가 아니라 내가 판단할 수 있는 판단력을 길러야 한다. 나이 든 만큼 세상을 보는 눈을 길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 책 읽기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욕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겠다. 굳이 이기겠다는 마음보다 '그럴 수도 있어'라는 마음이 필요하다. 넉넉함이란 다른 사람의 실수나 다름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다. 이 나이에 맞서 이겨서 무엇하겠는가?
세상과 거리를 조금 두고, 넉넉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말에 믿음을 주고,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다.
언제부터인가 하회탈이 좋았다. 하회탈에 패인 깊은 주름은 살아오면서 받은 아픔, 상처의 흔적이다. 굳이 이 주름을 펴기 위해 애쓸 필요가 있을까. 살아오면 입은 상처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 또한 힘이다.
상처가 잊히도록 변하면 되지, 그 상처로 주눅이 들어서는 안 된다. 우뚝한 코가 이를 말해준다. 아픔과 상처 시간 속에서도 자신을 지키는 자존감은 살아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눈과 입에서 드러나는 웃음은 여유이고, 그 여유는 멋이고 품격이다. 어렵고 힘든 세상살이를 받아치는 그 여유와 품격을 닮고 싶다.
상처를 온전히 씻어낼 수는 없다. 남아 있는 상처들을 덮어줄 수 있는 삶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렇게 하여 지난날의 상처를 마주하고 웃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부추꽃의 환한 웃음으로 지난날의 상처를 감싸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