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층 취준생 63만 명, 고립 청년 54만의 시대다. 이들은 점점 좁아지는 '취업문'에 꿈, 결혼, 출산 등 미래를 하나씩 포기한다. 이젠 '힘내'라는 응원도 버겁게 느껴진다. 청년들은 대신 더 소박한 것을 원한다. 그저 지켜보고, 들어주고, 믿어주기를. 있는 그대로 공감해주기를 바란다. 나 또한 청년층의 한 구성원으로서 부탁한다. 서재를 핑계 삼아 하는 내 일상 이야기를 들어주기를.[기자말] |
"누나. 안 되겠어. 먼저 갈게. 나는 내가 왜 살아야만 하는지 그걸 전혀 모르겠습니다. 살고 싶은 사람만 살면 됩니다. 인간에게는 살 권리가 있음과 동시에, 죽을 권리도 있는 겁니다."
위 내용은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사양>에서 주인공의 남동생인 나오지가 죽기 직전에 쓴 유서의 한 부분이다. 그와 가족들은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전한 후, 귀족 계층에서 몰락했다. 정신적으로 의지하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끼고 자살을 택했다.
나오지의 죽음은 시대적, 사회적 요인에서 비롯된 무기력증 때문이었지만, "왜 자살하면 안 되는가?"라는 물음은 많은 이가 한 번쯤 고민해봤을 법한 주제다. 하지만 그에 대해 명확한 답을 들어본 기억은 없다. 어릴 적부터 자살은 나쁜 행위며, 주변 사람을 슬프게 한다는 이야기만 접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는 엄연히 죽어야 할 이유를 구속한 것이지, 삶의 의미를 찾아준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자살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나라에서 평소 자살과 관련한 논의가 적다는 것은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다.
심리연구소 '함께'의 김태형 소장은 <자살공화국>에서 "1990년에 인구 10만 명당 7.6명이었던 자살자는 IMF 경제위기 직후인 2001년에는 14.4명으로 증가했고, 2011년에는 31.7명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또 세계보건기구(WHO)에서 발표한 2022년 한국의 자살률은 25.2명에 이른다. 지금으로부터 약 70년 전 유대인들의 자살 현상을 조사하던 사회학자들은 "인구 10만 명당 자살 건수가 30건에 이르면 전염병이 창궐한 것과 같다"고 말했다. 우리는 '자살 전염'의 위기 속에 사는 것이다.
보건복지부의 '2023 자살에 대한 국민인식조사'에 따르면 '평생 한 번이라도 자살 생각을 해 본 사람'은 14.7%에 달하며, 연령대가 높을수록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자살 생각이 들 때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자살 생각 시 도움 요청의 장벽'에 대한 질문에서 57%가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라 생각했으며, 그 다음으로 '도움받을 방법을 몰라서(40.9%)', '희망이 부족해서(35%)', '주변 사람을 실망시키는 것에 대한 두려움(28.9%)' 등을 꼽았다. 이 또한 자살에 관련한 이야기를 꺼리는 문화적 배경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자살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터부화
한국 사회에서 '자살'은 금기어 수준이다. 서종한 교수의 <심리부검>에서는 "많은 사람이 자살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물론 생각하기조차 꺼려. 자살에 대한 현실적인 위험성 감지나 예방 조치가 어렵다"고 말한다. '관계 중심' 사회인 한국은, 자살이 일어나면 관계망 안에 있던 가족과 연인 등의 측근을 비난하거나 안 좋게 보기 일쑤다.
실제로 자살 사망자 유가족의 반 이상이 고인의 사인을 알리지 않거나, 다른 사유를 들어 덮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자살에 대한 논의는 더욱 축소됐다.
역사적으로 자살이 금기시된 건 종교서부터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약 400년경에 <신국론>을 쓰며 중세 교회의 도덕적 기초를 다졌다. 그는 십계명 중 "네 이웃을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을 재해석해 인간을 죽이는 모든 행위를 살인으로 봤다. 그는 자살자를 "악마에 미친 자"라고 비판하며, 모살죄보다도 더 큰 중범죄로 다뤘다.
이후 유럽 법령은 교회법 기조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8세기 프랑스는 교회법에 따라 실정법을 도입했고, 독일어권은 자살자를 교회 묘지에 묻을 수 없게 법제화했다. 영국은 누구에게도 자신을 파멸할 권리가 없음을 법령에 명시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각 문화권에서는 자살자를 경멸하는 '자살의 터부화'가 일어났다. 인류학자 하르트무트 크라프트는 "터부란 금지 규칙을 규제하는 중요 수단이자 사회적인 공동생활의 정체성이며, 위반 시에는 공동체로부터 제명당할 위협을 받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곧, 자살은 공동체를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된 것이다.
이처럼 자살에 대한 논의를 막은 건 종교와 관습, 사회와 문화적 요소 등이 결합된 복합적인 문제다. 그러나 자살은 특수한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나 자살 위험을 경험할 수 있고, 또 누구나 극복할 수 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살 생각을 터놓는 대화 환경이 마련되는 게 중요하다. 이는 자살을 예방하는 강력한 보호 장치이자 삶의 의지를 새롭게 갖는 계기가 된다.
자살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사회가 필요하다
자살에 대한 논의는 시대별로 있어 왔다. 고대 스토어학파는 불치병으로 고통받거나 지독한 가난 속에 살아야 한다면 더 이상 이성적으로 살 수 없기에 죽음을 택할 자유를 인정했다. 그들은 '죽음을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삶이 오래 지속된다 해서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중세에는 종교의 영향으로 인해 논의가 잠시 중단됐으나, 근대에 와서 다시 활발해졌다. 볼테르, 루소, 흄 같은 계몽주의 학자들은 자살이 망상이나 우울증 등 정신적 질환에 의해 발생한다고 확신했으며, 이에 자살을 결정할 권리를 주장했다. 흄은 "인간이 자살을 기도했다 하더라도 사회에 손해를 입히지 않기 때문에 부정한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부터 사람들은 자살을 일상적인 사건으로 보기 시작했고, 자살을 택한 사람에게 처벌보단 동정의 시선을 보냈다.
한편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와 반대되는 논리로 자살권을 주장했다. 계몽주의가 이성을 중시했던 반면, 낭만주의는 감정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에 낭만주의 작가들은 작품에서 인간의 감성을 중점적으로 다뤘고,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거나 정신적 고통이 크면 삶을 끝내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있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스토아학파는 인간에게 죽을 권리를 주기보다는, 죽어야 할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계몽주의 철학은 인간의 감정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고, 낭만주의는 자살 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당시의 논의들이 지금에 와서 얼마나 발전됐는가? 지금 한국 사회로 봐서는 그리 나아가지 못했다고 판단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어쩌면, 아직도 저들의 논리 안에 갇힌 듯하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도래한 시대라면 모든 자살에 대한 의견은 존중받아야 하며, 그에 관한 자유로운 논의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자신의 운명을 주체적으로 결정할 권리가 유보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자살자의 사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일이 어려웠다. 서종한 교수는 "위험성이 있는 자살을 부추기는 요인에 합리적으로 대처했던 과거 경험이 있거나 충분한 보호 요인이 있다면 자살 위험성은 다소 낮아진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살을 막기 위해 자살에 대해 더 많이 말해야 하며, 이러한 논의들이 자살을 예방하는 보호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죽음은 외부로부터 어떠한 억압도 없이 정상적인 심리 상태에서 충분한 시간을 갖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시간을 갖게 되면 그는 분명 가까운 사람들과 자신의 의도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눌 가능성이 있다. 그와 같은 대화를 통해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해결할 새로운 가능성을 얻기 위해서는, 자살에 대한 금기가 없는 허심탄회한 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편견 없이 자살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만 절망에 빠진 사람이 삶의 의지를 새롭게 펼칠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게르트 미슐러, <자살의 문화사>, 231-2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