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년차 드라마 피디이자 아빠가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과 함께 22일간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그 기록을 담은 여행 에세이입니다.[기자말] |
아들과 나는 여행을 계획하는 방법이 극단적으로 다르다. 내게 여행의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건 여행지의 사진이다. 사진이라는 것이 찍는 사람의 능력과 그 순간의 날씨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최초의 충동은 어떤 멋진, 이국적인 사진으로부터 온다.
반면 우주를 설레게 하는 건 그 장소까지 가는 교통편이다. 어떤 비행기를 어떻게 탈 것인가. 공항에서 숙소까지 어떻게 들어갈 것인가. 그 도시에서는 지하철이 핵심인가 버스가 핵심인가. 기차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려면 어떻게 타야 하는가.
나는 늘 그런 우주가 너무나 신기하다. 내게 교통편은 흥분의 대상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다. 교통편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은 차창 밖의 풍경 정도다. 그 외의 것들은 까맣게 잊어버린다. 반면 우주의 머리 속엔 교통편의 네트워크가 반짝이며 떠오르는 것 같다. 그 빛은 이동에 따라 밝아지거나 어두워진다. 우주에게 최고의 기쁨은 머릿 속에 미리 그린 교통편의 네트워크를 수행했을 때 온다.
아들이 더 크기 전에 같이 좋은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단호한 결심 끝에 무리하게 온 여행이지만, 과연 아들과 내가 생각하는 좋은 시간, 좋은 것의 기준은 같을까. 우리는 거하게 동상이몽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날을 위해 준비했건만
이번 여행에서 내 머릿 속에 그렸던 어떤 최고의 순간은 카르카손 성벽 아래서 카르카손 보드게임을 하는 것이었다. 안 해도 그만이지만, 그런 동기 하나가 날 어떻게든 움직이게 했다. 그런데 우주는 비행기와 숙소를 거쳐 고속버스를 타고 성으로 걸어가는 순간까지를 가장 즐거워하는 듯 했다.
난 드디어 성에 도착해서 어떻게 동선을 잡고 아들에게 무슨 설명을 해줄지가 핵심 고민인데, 우주는 도착을 즐거워하긴 했지만 빠르게 지쳤다. 우주는 이미 원한 바를 성취한 것이다. 하긴, 성에는 오르막도 계단도 많기는 했다.
"우주야, 저기 보이는 능선이 피레네 산맥이야. 그 너머로 우리가 며칠 전에 있었던 스페인이 있어. 이 방향으로 죽 가면 지로나와 바르셀로나가 있는 거야."
나로선 나름 멋진 순간으로 준비했던 문장이었다. 솔직히 설레는 상황 아닌가. 저 아스라히 보이는 산 너머로 우리가 며칠 전에 있던 다른 나라, 다른 도시가 있는 것이니까. <라이온킹>에서 무파사가 심바에게 프라이드 랜드를 설명하는 느낌이 날 법도 한데.
그러나 아들은 두리번 두리번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아무 감정 없이 한 마디 한다. '와 그렇구나'. 이 봐 친구, 영혼 좀. 여행하며 우주에게 습득된 것은 아빠가 뭔가 보여주거나 가르쳐주겠다고 할 때에는 듣는 척이라도 해야 빨리 지나간다는 점인 것 같다. 아, 사진을 찍어주려 할 때 빨리 포즈를 취해주어야 된다는 점도.
그래도 중세 유럽 천년의 고성은 운치가 좋았다. 카르카손 성은 꼭 보드게임이 아니더라도 로망에 가까운 성이다. 성문, 해자, 뾰족한 지붕의 탑들, 성벽이 판타지 영화나 역사 영화의 배경 같다. 전망도 나즈막한 시골의 모습이라 중세로 시간 여행을 온 기분이 든다.
기원 전부터 짓기 시작하여 1000년 이상의 증축으로 모습을 갖추어 나간 카르카손 성은, 19세기에 이르러 비올레 르 뒥이라는 건축가를 통해 복원 작업을 거쳐 지금의 번듯한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시간의 낭만을 느끼게 하는 관광지들은 대개 이처럼 현대의 치밀한 복원과 관리의 노력이 들어가 있다.
높은 성벽 아래를 지날 때, 우주는 다듬지 않아 거칠게 자란 언덕 위 풀밭을 바람을 맞으며 달렸다. 운동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아이가 풀밭에 풀어놓은 강아지 마냥 성 아래를 달린다. 마치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순간 같아 나는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나로부터 저 멀리 성벽을 따라 구릉진 풀밭을 달리던 아이는 언덕배기를 내려와 크게 돌아 나에게 달려온다. 우주는 환하게 웃으며 '아빠!' 하고 외치며 내게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폭 안긴다. 나는 찍던 카메라를 내리고 우주를 안았다. 갑자기 코 끝이 찡했다. 이 순간의 인상. 내가 아빠구나. 넌 내 아들이구나.
카페에서 보드게임을
고성이건 미술관이건 박물관이건 종착지는 기념품 숍이다. 그곳을 거치지 않고서는 나갈 수 없다. 그런데 과연 보드게임이 있을까?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문득 불안해진다. 보드게임 카르카손은 독일 사람이 만들었다.
성의 뾰족한 모양과 긴 성곽을 본따고 이 고장의 전설을 입히긴 했지만 사실 깊은 관련은 없다. 하지만 관광지가 이런 수익 상품을 놓칠 리가 있나. 나와 우주는 어렵지 않게 카르카손 보드게임을 찾아서 결제하곤 득의양양한 기념샷을 찍었다. 업데이트된 최신판이었다.
우리는 기쁨에 들떠 성을 나왔다. 성 밖 상점에서 기념품 숍보다 더 싼 가격으로 보드게임을 팔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2월이지만 봄 날씨 같았다. 햇살이 따뜻했다. 야외 테라스가 있는 카페에 앉았다. 빈 자리가 많아 보드게임을 펼쳐도 될 듯했다. 주인 분께 조심스레 양해를 구했다.
"저흰 <카르카손> 보드게임을 좋아하는 관광객인데요, 아들과 이 곳에서 꼭 보드게임을 한 판 하고 가자고 약속을 했는데 여기서 잠시 해도 될까요?"
주인은 환한 웃음으로 양해를 해주었다. 우린 곧바로 게임에 빨려 들어갔다. 이럴 때 아빠라면 어린 아들에게 티 안나게 승리를 양보해주는 것이 미덕이겠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 않다.
간만에 불꽃 튀는 대결을 펼쳤다. 지나치게 정정당당한 대결이었다. 그런데 그 끝에 누가 이겼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카르카손 성벽 아래서 <카르카손>을 했다는 것만으로, 게임이 끝난 후 기념 촬영 속 우리의 표정은 무척 밝았으니까.
동선 위주의 여행을 기억하는 우주에게도 그 순간은 잊지 못할 인상으로 남기를 바랐다. 그 나이 대에 가장 티없이 즐거워 할 수 있는 부모와의 이벤트로써.
카르카손은 한국에서 여행가는 관광객으로서 동선 상 효율적인 관광지는 아니다. 큰 성 하나를 보기 위해 하루를 투자해야 하는 곳이다. 남프랑스 일주라면 하루 정도 넣어줄 만하다. 하지만 스페인과 프랑스 일주 중에 들어가기엔 그만큼 주목도가 높은 곳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더 뜻깊은 장소가 됐다. 최적의 경로에서 벗어난 곳이 때로는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다. 경로 추구인에게도 인상 추구인에게도, 깊이 남은 여행의 순간이었다.
덧붙이는 글 | 본업으로 인해 중단했던 <꽃보다 소년> 연재를 재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