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노동자 자기역사쓰기'는 여성노동자들이 자기 삶과 노동의 경험을 젠더관점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노동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여성' 노동자로서 자긍심을 고취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과 더불어 기록되지 않은 여성노동자들의 경험을 되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이 사업을 통해 10여 명의 공공운수노조 조합원들은 60년대부터 현재까지 역사적 배경 속에 딸로서, 아내로서의 경험한 것을 돌아보고 여성 노동자로, 한 인간으로서 자기 성장의 역사를 기록하였습니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며 고통스러웠던 기억, 신나게 투쟁했던 경험, 조합원에서 간부로 성장한 경험을 모두 담아냈습니다. 왜 노조가 필요했는지, 노조활동을 통해 어떻게 성장했는지 등 개개인의 목소리를 통해 2024년 현재의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과 투쟁을 함께 고민하고 연대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기자말] |
[여성노동자의 자기역사쓰기 5-1] 그 시절, 젊은 여성노동자의 잦은 이직은 https://omn.kr/2aslo
숲에는 거목만 살지 않는다
집에서는 나이가 들어가는 나를 부담스러워 했고 나도 집이 편하지 않았다. 나는 원래 결혼에 관심이 없었지만 출가하는 방편으로 결혼을 택했다. 그때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독립해서 혼자 사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던 시대였다.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힘든 회사생활을 함께 공유하며 만나던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게 되었다. 부모님은 남편이 부모가 없다는 점과 모아 놓은 돈이 없다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지만, 나는 둘이 함께 노력하면 안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결혼한 뒤 제일 힘들었던 점은 경제적인 어려움이었다. 남편은 결혼하고 몇 달도 안 되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작더라도 자기 사업을 하고 싶다며 바로 친인척과 회사를 차렸다. 처음이라 기술도 미흡하고 자본도 거의 없이 시작했기 때문에 생활비를 거의 가져오지 못했다. 몇 년 정도 고생을 거쳐 자리가 잡히기 시작하자, 동업자가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남편은 불화가 생기자 따로 나와 독립했다. 그 사이 나는 스물여덟에 두 남매의 엄마가 되었다.
남편이 독립했을 때, 우리는 사업장이 없어서 지인의 공장에서 사람들이 퇴근한 뒤 밤시간을 이용해 작업했다. 나는 추운 겨울에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딸을 포대기에 업은 채로 독한 화공약품 냄새를 온몸으로 맡으며 남편 일을 도왔다. 얼마 후 사업장을 마련하고 직원들을 여러 명 두게 된 후에도 나는 어린 두 남매를 돌보며 공장 일을 도왔다.
남편은 회사 안의 일은 공장장이나 나에게 맡기고, 회사 밖의 일을 많이 했다. 그 회사 밖의 일에는 새벽까지 또는 밤새워 술 마시는 일이 포함돼 있었다. 그 빈자리를 내가 채워야 했기 때문에 아이들 끼니를 제대로 돌보지 못할 때도 있었다. 나는 부모 없이 아이들끼리 남아 끼니를 해결해야 할 때를 대비해 딸보다 두 살 위인 아들에게 간단히 요리하는 법을 가르쳤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계란프라이나 라면 끓이기 등으로 시작해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는 밥하고 감자나 고구마 삶는 방법 등 비교적 단순한 조리법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 내가 어린 나이의 아들을 조리대에 세우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일이라는 점과 가사가 여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들은 요리에 관심이 많아서 재미있어했다.
남편이 사업을 시작한 지 십여 년 만에 우리 가족은 사업장과 공장 시설도 더 늘리고 내가 어릴 때 살던, 달동네가 재개발된 자리에 작은 아파트도 한 채 마련했다. 그 이후 유난히 의욕이 없고 쓰러질 것 같은 증세가 계속되어 병원을 찾게 되었는데 폐결핵 진단이 나왔다. 과로로 면역력이 떨어져 생긴 결과였다. 그 무렵 우리는 IMF 경제위기를 맞게 되었다. 남편은 직원들이 다 떠난, 감당 안 되는 회사를 폐쇄하지 않고 10년 훨씬 넘게 유지했다. 수입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빚을 지게 됐다.
남편 사업의 해결할 수 없는 어음부도로 인해 이러저러한 지난한 과정을 거쳐 살던 아파트는 경매에 넘어갔고, 우리 가족은 좁디좁은 반지하 월세로 이사해야 했다. 그때 아들은 대학교 1학년, 딸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시기였다. 나는 닥치는 대로 일을 시작했다. 한 달 월급을 받을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일당을 받는 일일 가사 도우미와 건물청소 식당일 등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시작해서 가족을 부양했다. 아들도 일 년 휴학한 뒤 일을 해서 집을 도왔고, 나는 계속해서 정수기 관리원, 작은 옷가게 운영, 보험설계사, 베이비시터 등을 했는데, 그러는 동안에도 남편은 사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방황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게 되었을 무렵, 내 나이 50을 훌쩍 넘겼을 때 나는 나의 직업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닥치는 대로 살 수밖에 없었지만, 아이들이 결혼할 때쯤 부모의 직업이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점과 나이 들었을 때 너무 힘에 부치지 않고 나를 부양할 수 있는 마지막 직업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구청을 찾아 직업훈련 교육을 이수했는데 실제 구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좀 더 전문적인 교육을 받기에는 나 자신의 발전을 위해 투자할 비용과 시간이 부족했고 무엇보다 나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나는 항상 무언가 소박한 목표를 위해 도전했지만 그럴 때마다 벽에 부딪혔다.
나는 한편으로는 남편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가족이야 어찌 됐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평생 주도적으로 해 봤으니 말이다. 남편은 결혼 후 딱 한 번 이력서를 쓸 일이 있었는데 아주 깨끗한 이력서였다. 어찌 보면 자신이 목적한 바를 끝까지 이루려 한 우물만 파는 의지가 느껴지는 이력서로 보일만 했다. 반면에 나는 이력서를 쓸 일이 아주 자주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일관성 없이 그날그날 살아온 듯한, 내세울 것 없는 누더기 같은 이력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낀 적이 많았다. 주도적인 삶이 아니라 누군가의 보조자로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숲에는 거목만 살지 않는다. 풀도 있고 덤불도 있고 넝쿨도 있어야 온갖 것들을 품는 숲이 된다. 나는 때로는 풀이되어 자식을 먹였고, 때로는 덤불이 되어 가족들을 품었고, 넝쿨이 되어 내 신체적 정신적 한계를 뛰어넘는 큰 풍파 가운데도 쓰러지거나 날아가지 않고 세월을 견디어냈다. 나의 인생은 긴 세월 동안 겪어온 수많은 문양과 색깔들로 한 땀 한 땀 바느질해 이어 붙인 퀼트 같은 것이 아닐까 위로해본다. 물론 어떤 완성품이 될지는 끝까지 나의 몫일 것이다.
빵과 장미의 노래
나는 지금 10년 넘게 비정규직 청소 노동자로 살고 있다. 아들에게 "청소 일을 하는 엄마가 부끄럽냐?"고 물은 적이 있다. 아들은 엄마가 부끄러운 게 아니라 그 일에서 엄마를 해방시킬 수 없는 자신이 부끄럽다고 했다. 아들의 대답에서 알 수 있듯이 청소 노동이 설령 부끄러운 직업이 아니라 할지라도 누구나 하고 싶어 하고 내세울 만한 직업은 아니라는 것이다. 노동의 강도에서도 그렇고 사회적 인식에서도 그렇다. 청소 노동은 '경제적 자유를 얻지 못한 나이 먹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 중 하나'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일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일하고 있는 이곳에도 들어오기가 쉽지 않아서 수십 명의 지원자와 경쟁해야 했다.
사실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대학의 청소 일은 일자리가 귀한 우리 어머니 세대에도 흔히 구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노동조합이 결성되지 않은 때라서 노동환경이 많이 열악했다고 한다. 들어온 사람들이 얼마 못 버티고 그만두는 바람에 회사에서는 입사자를 소개하는 사원들에게 소개비를 지원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낮은 임금과 처우 그리고 노동환경이 2010년 전후 노동조합이 결성된 후 많이 개선됐다.
내가 입사했을 때는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몇 년 지나서였다. 지금은 공공운수노조 소속 노조가 있는 대학 일자리(비록 비정규직일지라도)에 많은 사람이 지원하고 있다. 나는 처음에 노동조합에 가입하기를 꺼리다가 동료의 권유로 가입했다. 가입을 주저했던 이유는 붉은 투쟁 조끼, 그리고 목소리 높여 구호를 외치는 조합원들의 모습이 내가 그동안 순응하며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노조 그리고 투쟁이라는 단어들을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불온한 것으로 생각할 만큼 길들여졌던 것이다.
그럼에도 가입하게 된 것은 일하면서 직접 경험한 여러 부조리한 상황들 때문이었다. 용역사가 바뀔 때 고용 불안을 겪어야 했고, 퇴직금을 못 받은 적도 있었다. 동료가 동료를 상대로 부당한 착취와 강압을 행사하는 것도 봤고, 노동자 간의 크고 작은 불평등과 갈등으로 직장 내에서 여러 문제가 야기되는 것도 봤다. 그러한 경험들을 통해 결국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고 사측을 상대로 보호해줄 수 있는 조직, 동시에 노동자들 간의 문제를 서로 논의하고 중재해줄 수 있는 조직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됐다. 내가 10여 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한 곳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럴 때마다 의논할 수 있고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노동조합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렇게 노조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얻은 새로운 경험들과 지부에서 진행하는 여러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생각의 변화가 있었다. 권력 앞에서 생존을 위해 부당함을 감내해야만 했을 때 느꼈던, 비루한 감정에 가려져 있던 인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됐다. 지금은 분회장으로서 다른 노동현장의 여러 집회에 참여해 투쟁가를 부르고 있다. 노동자들이 외치는 구호와 투쟁가는 단순히 생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권이 포함된 '빵과 장미'의 노래이다.
"힘든 일을 하는 그들의 혼이 작은 예술과 사랑과 아름다움을 알았다. 그렇다, 우리가 싸우는 것은 빵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장미를 위해서도 싸운다."
- 제임스 오펜하임의 시 '빵과 장미' 중
노동운동은 사회 운동이며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는 인권 운동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나는 정년을 몇 년 남겨 두고 있다. 나와 동료들은 이곳이 거의 마지막 직장이 될 것이다. 건전하고 즐거운 직장 문화를 만드는 일에 노동현장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쓰고 싶다. 전도서에서는 '한 줌만큼의 휴식이 두 줌만큼 수고하며 바람을 쫓아다니는 것보다 낫다'고 알려 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정년이 많이 기다려진다. 나는 쥐꼬리만 한 유급 노동을 위해 매연 가득한 도시를 거의 평생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그리고 싶어 했던 그림도 고교 시절 미술 숙제가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 낡은 셋집의 얼룩진 벽지를 가리느라 벽에다 나무 몇 그루를 그린 적이 있었다. 딸아이가 스케치북과 색연필 등을 선물했지만, 그림에 집중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데도 나는 내가 살아온 과정이 한탄스럽거나 내가 하는, 그리고 해왔던 일들이 단지 하루하루를 살기 위한 부차적이고 소모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크게 보면 내가 하는 노동도 다른 이의 노동과 다르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서 삶이라는 과정 안에서 내가 지녀온 태도와 진정성이 나의 삶의 본질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후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나의 삶을 나름대로 성실히 살았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그리고 싶었던 그림을 그리지는 못했지만, 어려운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것, 그 과정이 내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몇 색깔 되지 않은 크레파스로 최선을 다해 그려냈던 나의 초등학생 시절 그림처럼 말이다. 나의 삶, 나의 노동은 내가 그리고 싶어 했던 그림이었다.
정년 후 찬란한 햇빛과 푸르고 맑은 바람이 사는 자연에서 고되고 소란하게 살아온 지나온 날들과 앞으로의 시간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가지며 노년을 보내고 싶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공공운수노조 서울지역공공서비스지부 조합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