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말 |
'여성노동자 자기역사쓰기'는 여성노동자들이 자기 삶과 노동의 경험을 젠더관점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노동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여성' 노동자로서 자긍심을 고취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과 더불어 기록되지 않은 여성노동자들의 경험을 되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이 사업을 통해 10여 명의 공공운수노조 조합원들은 60년대부터 현재까지 역사적 배경 속에 딸로서, 아내로서의 경험한 것을 돌아보고 여성 노동자로, 한 인간으로서 자기 성장의 역사를 기록하였습니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며 고통스러웠던 기억, 신나게 투쟁했던 경험, 조합원에서 간부로 성장한 경험을 모두 담아냈습니다. 왜 노조가 필요했는지, 노조활동을 통해 어떻게 성장했는지 등 개개인의 목소리를 통해 2024년 현재의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과 투쟁을 함께 고민하고 연대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
과수원집 막내딸
태어나보니 과수원집 막내딸이었다. 2남 4녀 중 막내딸로 1960년에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다. 다섯째로 태어났지만 2명은 어릴 때 죽고, 내가 태어난 이후로 남동생을 봐서 어릴 때 귀여움을 받았다. 배냇머리를 10살까지 길렀던 기억이 있다. 우리 언니와 사촌 언니까지 5명의 언니가 있었다. 내가 딸로서 막내여서 그냥 머리만 대면 언니들이 장난감 삼아 빗겨주고 묶어주고 그랬다. 그러다 10살쯤 돼 언니들이 결혼하고 직장 다니니 내 머리 만져줄 사람이 없어서 그때 머리를 처음 깎았다.
우리 아버지는 3남 3녀 중 차남이었다. 홀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6.25 때 청년연맹 대장으로 북에 끌려가 혼자된 큰엄마가 지내는 큰댁과 붙어사는 둘째 집이었다. 우리 엄마는 큰집에 머슴처럼 맏동서 시집살이를 해야 했다. 누에 키우고 솜틀집으로 사람이 바글바글했지만 묵묵히 일을 해야 했다. 나의 아버지는 사람 좋은 사람으로 집안일보다 바깥일에 바쁘셨다. 어머니가 고생 많으신 것을 보며 자랐다. 좋은 것은 무엇이든 할아버지와 큰엄마 몫이었다. 어느 날 소풍 때 엄마에게 같이 가자 했더니 큰엄마가 가신다고 해서 온 방에 종이 찢어 놓고 시위했던 기억이 있다. 내 소풍을 왜 큰엄마가 가실까. 어머니는 큰집 올케가 들어오고도 여전히 머슴처럼 살았다. 그게 나의 한이 되었다.
농사철이면 모두 바쁘니까 나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의정부 작은집으로 보내졌다. TV가 없던 시절 저녁마다 가족이 운영하는 극장으로 가서 영화를 많이 봤다. 작은아버지가 고모부 극장을 운영했고 저녁이면 극장으로 가서 만화 영화를 봤다. 권선징악을 다룬 내용이 많았다.
의정부 원도봉산 산장에 갔던 날이 있다. 질퍽한 길을 걷던 꼬마인 나를 군인들이 보고 차에 태워 주었다. 그때는 커다랗던 수영장이 지금 보니 너무 작았다. 집안 식구들이 모여 밥을 먹을 때 밥상이 나에게 높아서 어른들 무릎에 앉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때는 봄철에 논두렁길이 질척거려서 언니들이 등에 업고 데려다주었던 기억도 있다. 식목일이면 가족들이 다 같이 산소에 갔는데 그때 초코파이를 처음 먹어보았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는 식목일을 많이 기다렸다.
중고등학교는 재미난 청소년기였다. 나의 전체 삶 중에 제일 좋았던 학창시절을 보내며 팝송도 듣고 벚꽃길 사이로 방송부의 행진곡을 들으며 등교했던 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행복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관절염으로 인해 두 달 정도 학교를 쉬는 일도 있었다.
우울했던 20대
1979년 2월 고등학교 졸업 후, 작은 스포츠 사무실(탁구장)에서 3개월 정도 일했다. 비전이 없어 그만두었는데 잠시 쉬던 중 셋째 언니가 24세 나이로 하늘나라에 갔다. 그때 아버지도 힘드셨다. 1년 후인 1980년 3월, 나는 대한전선에 취직했다. A/S 콜센터 업무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편찮으시더니 언니 보내고 1년 만인 1980년 7월,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다가왔다. 늘 사랑으로 아버지가 나를 부르는 애칭이 있었다. 잘 먹는다고 나를 '돼지'라 하셨다. 봄에 이웃에서 염소가 죽었는데 아픈 저를 조용히 부르신 적이 있다. 약이라고 지렁이처럼 기다란 염소 뇌 골수를 주셨는데 안 먹는다 했다가 혼났던 기억이 있다.
대한전선에 다닐 때는 첫째 언니, 형부, 조카 넷과 나, 이렇게 일곱 식구가 함께 살았다. 대한전선 A/S 센터는 3년 정도 근무했고, 월급은 4만 5000원 정도였다. 직원은 17명쯤 되었는데 여직원은 둘이었고 지금처럼 전국 단위가 아니어서 판매하는 것만 했다. 예전엔 주말이 더 바빴지만 나는 주말 출근은 안 했고, 집에서 사무실이 500m 거리였다. 형부가 사장이어서 주위 분들이 '처제'라 불러서 동네 처제가 되었다.
둘째 언니는 연탄가스, 셋째 언니는 물로 사망해서 나는 식구들 사이에 보호 대상이었다. 그런데 1983년쯤 첫째 언니가 하던 효성스즈키 대리점이 부도가 났다. 집안 분위기가 어두웠다. 효성 본사 부도 처리반이 안방을 점령했고, 다른 방에는 채권자들이 있었다. 채권자가 나 또한 미행했다. 형부는 잠적하고 사돈 할머니, 사돈총각, 조카 넷, 언니, 나 이렇게 8명이 한 방에 모여 살았다. 나는 도시락을 싸주는 등 조카를 돌보며 생활했다. 조카 선생님 중에 나와 고향이 같은 선생님이 계셨는데 "이모랑 같이 오라"고 하기도 했다. 집에 하수구가 막혀 부엌에 물이 넘쳐서 빨래판 위에 올라서서 밥을 해 먹었던 기억도 있다. 그해 가을은 너무 추웠다.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언니랑 내 보험 들었던 걸 해약하러 다니기도 했다. 그때는 본인 증명 같은 걸 안 해도 되니까 언니가 보험 들었던 것도 내가 가서 해약해 주고 이것저것 해서 먹고 살았다. 1년 지나고 직장을 효성으로 옮겨서 월급을 받았지만 중학생 초등학생 조카들 학원 보낼 형편은 되지 않고 간신히 먹고사는 정도였다.
시어머님과의 인연
우리 언니 집에 미제물건을 취급하고, 사주도 보는 분이 가끔 오셨는데 내가 그분께 관심이 많아 친구들 약속도 펑크 낼 정도였다. 그분은 후에 나의 시어머님이 되었다. 시어머니는 1979년도쯤부터 알고 지냈다. 정원이라는 이름도 시어머님이 20살 때 지어준 이름이다. 어머니가 처음에는 동갑내기를 소개해 주셨는데 관심이 가지 않았다. 이전에 나이 많은 사람과 결혼할 것 같다는 사주를 들은 적이 있어 나이 많은 사람을 찾으니까 아들을 소개해 줬다. 그게 어머니를 안 지 5~6년 정도 됐을 때다. 만나니 이 사람인가보다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1985년 26세 나이로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어머니와도 더 친해졌다. 1986년에 남편과 결혼했다. 시부모님 모두 이북 분이시고 남편도 조용한 성품이다. 그때는 택시회사 기사였다. 남편이 10살이 많으니 나는 순박함에 처음에는 적응이 안 돼 무서웠다. 속 얘기 편히 하지 않고, 늦은 나이 결혼이라 모든 일을 혼자 결정하는 버릇이 있어 내가 막을 수 없었다. 그럴 때면 어머님께 일러바쳤다. 어머니는 내 편이었다.
결혼한 해에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이 3개월이 지나 아프기 시작했다.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뇌수막염이었다. 고생을 많이 했다. 1990년에 둘째 딸을 낳았다. 그리고 남편이 사업을 시작했다. 경계석 납품 일이었다. 1994년에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1년을 병원에 계셨고 마지막 3개월은 집에서 모셨다. 어머니 입원하시고 6~7개월을 울고 다녔다. "어머니 어떠냐"고 누가 말만 꺼내면 눈물이 났다. 얼마나 울고 다녔는지 병실에 계신 분들이 친딸인 줄 알았다고 했다. 15개월 투병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아들, 남편, 나 셋이서 장례를 치렀다. 간병비, 병원비, 장례비로 힘들었다.
*연재6-2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민경남은 공공운수노조 서울지역공공서비스지부 엘지빌딩분회 조합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