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노동자 자기역사쓰기'는 여성노동자들이 자기 삶과 노동의 경험을 젠더관점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노동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여성' 노동자로서 자긍심을 고취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과 더불어 기록되지 않은 여성노동자들의 경험을 되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이 사업을 통해 10여 명의 공공운수노조 조합원들은 60년대부터 현재까지 역사적 배경 속에 딸로서, 아내로서의 경험한 것을 돌아보고 여성 노동자로, 한 인간으로서 자기 성장의 역사를 기록하였습니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며 고통스러웠던 기억, 신나게 투쟁했던 경험, 조합원에서 간부로 성장한 경험을 모두 담아냈습니다. 왜 노조가 필요했는지, 노조활동을 통해 어떻게 성장했는지 등 개개인의 목소리를 통해 2024년 현재의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과 투쟁을 함께 고민하고 연대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기자말] |
전태일 이름을 알다
1996년 겨울 1월 15일, 어머니는 15개월 긴 투병 끝에 집에서 돌아가셨다. 남편의 사업이 계절적인 어려움을 겪고 어머님의 1년간의 병원비, 장례비 등을 내느라 경제적으로 힘들었다. 1998년, 남들은 IMF로 힘들다는데 우연히도 큰 납품 건이 생겨 안정되는가 싶었다. 기대도 잠시, 세무 처리를 잘못해서 결국 빚을 많이 졌다.
2002년 동대문 종합시장으로 조카 가게 돌봐주러 가면서 직장을 갖게 되었다. 이불솜 쪽으로 수금도 직접하는 등 직원도 있었고 나름대로 책임도 있었다. 월급은 용돈 정도. 70만 원 정도였던 것 같다. 그때 은행을 오가며 전태일 열사 동판을 보게 됐는데 나와는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월드컵이 한창이던 때 직장을 그만두고 2004년 사업 실패로 완전히 집까지 넘어갔다. 은행 채권 추심까지 당하다 보니 심한 생활고를 느끼게 됐다. 아들은 수능을 준비하고, 딸은 중학생이었는데 그때부터 종교 생활을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딸은 방황하고 아들은 군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당시 엄마와 남동생이 많이 아파 병원으로 쫓아다니며 몇 년의 세월이 지났고, 2010년 엄마가 돌아가셨다.
우물 안 개구리, 하늘이 보이다
2011년 10월 아는 분의 권유로 명동의 한 의류 매장 청소를 시작했다. 3일 일하고 하루 쉬는 조건인데 월급 63만 원으로 매일 4시간 정도 일했다. 의류 매장이라 휴일도 근무했다. 여자 3명, 남자 1명이 일했는데 처음 하는 낯선 곳이라 적응하다 보니 1년이 지나고, 이후 여의도 IFC몰로 발령 나서 옮겨서 다녔다.
같이 근무하던 직원이 LG트윈타워로 옮겨가면서 나도 주말에 쉬는 직장으로 가겠다고 하니 소개를 해줘 2016년 2월 1일 LG트윈타워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동관 21, 22층 담당이었다. 동관에서 제일 힘든 동이라 했다. 그때 주간 야간 100명 정도 일했다.
남자는 외곽청소, 건물 유리, 넓은 공간 흡진, 엘리베이터 관리를 맡았다. 관리자가 여성 청소노동자들을 대하는 태도는 평범한 정도였다. 그래도 한 명은 감독하면서 욕을 많이 해서 회사에서 해고했다. 비정규직이었고 임금은 최저 시급이었다.
근무는 아침 6시부터 오후 4시까지였다. 무급인 휴게 시간은 아침 1시간, 점심시간은 1시간 30분이었다. 이에 따라 휴게 시간을 제외한 주간(5일) 유급 노동 시간이 37시간 30분으로 맞춰졌다. 주 법정노동시간인 40시간에 미달한 2시간 30분을 채우는 것은 주말이었다. 청소노동자들은 토요일에 격주로 출근해 휴일근로수당도 받지 못 하고 일했다. 극한 작업은 토요일에 몰렸다. 나는 왁스 칠을 했다.
2017년 11월 23일 출근길에 넘어져 병원에 입원했다. 척추 3번 골절로 산재였다. 처음 당하는 산재였는데 처음에는 산재 인정 불가라고 했다. 그러다 12월말쯤 산재 심사에서 증거를 대니 승인이 났다. 산재로 투병 중에 딸이 결혼하겠다고 했다. 아직도 6000만 원의 전세살이라 걱정이 앞섰지만, 여러 이유로 딸을 결혼시키고 다시 출근하게 되었다.
노조의 날개를 달다
2018년 가을, 비밀리에 노조 가입서가 돌았다. 나는 그 다음해 12월 손주가 돌이 되면 손주를 봐야 했다. 노조 가입을 못 하고 있는데 그만두더라도 가입만 해 달라는 말에 가입만 하고 임원은 아무것도 맡지 않았다. 이후 감사를 맡으라는 말에 그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아 가볍게 생각했는데, 막상 감사를 맡다 보니 사무장 일이 엉망이었다.
12월이 되어보니 뜻밖에도 딸의 육아 휴직이 늘어났다. 내가 노조에 가입했다고 하니 사위가 "어머니가 좋은 회사에 다니는데 어떻게 그만 두게 하냐, 서로 생각해 보자"고 했다. 마침 코로나가 터져 사돈이 중국에서 들어와 손주를 보게 되었다. 그래서 2019년 10월부터 조금씩 노조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80명 중 53명 정도가 노조에 가입해 설명회를 하니까 회사가 뒤집어졌다. 소장도 다른 곳으로 가고 야간 감독도 다른 곳으로 갔다. 처음엔 사측과 교섭이 길어졌다. 합의점을 잘 찾지 못했다. 처음이라 교섭량이 많았다. 나는 처음에는 일반조합원이었고 후에 감사를 맡은 뒤, 12월 말에는 사무장을 맡았다.
2020년부터는 건물 내 점심 투쟁도 시작했다. 이곳의 근무자들에게 우리가 겪는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해 시작했다. 투쟁의 요구사항은 고용 승계였다. 회사와 교섭을 진행했지만 결렬되었다. 서로 고발해서 법정 투쟁도 하고, 지방 노동위원회 조정도 쫓아다니며 "고용 승계하라!" 계속 요구했다. 남부지방청도 쫓아다녔다.
2020년 10월 파업 텐트를 치고 돌아가며 파업 투쟁을 시작했다. 12월 16일부터는 빨간 조끼를 입고 전면 파업에 들어갔다. 12월 16일 전면 파업은 고용 승계를 안 하면 청소를 안 하겠다는 경고였다. 1층 로비에 침낭을 펴고 투쟁을 시작했다. 어느 날 옆에 조용한 분이 있어서 노조 관리하시는 분인 줄 알았는데, 신문사 기자분이었다. 아침 점심 저녁 식사를 챙겨주시던 후원자 분도 있었다. 한 끼 연대로 후원금이 많이 들어왔다.
추워도 더워도 멈출 수 없는 시간들. 12월 마지막 날 우리를 끌어내려 할까 봐 방에 있는데 경찰과 회사 부장, 그리고 여성 경찰이 들어왔다. 우리들이 근무복을 벗고 속옷 차림으로 나가니 여성 경찰이 들어와 분회장과 나가라고 설득했다. 2021년 새해, 드디어 안 쫓겨났구나 안도할 때, 밥차 연대가 왔다. 문 앞에서 우리에게 밥을 먹이겠다고 싸우고 있었다. 로비 유리가 깨지고 밥은 얼고, 그사이 초코파이 간식이 깨진 문 사이로 들어온 것을 보안팀이 뒤쪽 로비 문으로 던져 버렸다. 이때 당시 험한 투쟁이 되니, 방송에도 알려져서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다.
그때 종교기도회도 열심히 기도해주셨다. 방문 연대자도 많았다. 지나다 차에서 내려 후원해 주신 분, 노부부, 꿀잠, 한의사님의 치료, 정치인의 방문. 그리고 무료할까 봐 춤과 투쟁가를 배웠다. 투쟁가는 거의 다 배운 것 같다. 크리스마스쯤이라 '루돌프 사슴코'를 개사해서 부르기도 했다. '진짜 사장 구광모 나와라' 춤이 기억난다.
지금도 어느 현장에 가든 투쟁가는 제일 많이 배운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억은 구광모 집에 상복을 입고 가던 내 동지들이다. 내 옆 동지가 내 신발을 신고 갔기에 "왜 안 오느냐?" 하니, 그 동지는 "남편이 폐암인데 투병 중이라며 씻겨 놓고 오겠다"고 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 지금도 그 친구를 보면 마음이 아리다.
회사는 계속해서 동지들을 회유하는 듯했다. 1월 말에 출근해 보면 마음 약한 동지들 몇 명씩 보이지 않았다. 끼리끼리 4~5명씩 흩어졌다. 잘 가라, 잘 있으라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도 그 부분이 마음 아프다.
마포로 출근하기로 협의하고 고용보험도 타게 됐다. 이 시기의 긴 투쟁경험을 통해 전국 노동자들이 힘을 모으면 세다는 것을 알게 됐다. 또, 우리의 싸움에 일반인들이 얼마나 관심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큰 회사이니 TV에도 나왔지만 이름도 없는 작은 곳은 임금이 착취당하는 상황이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런 것들이 투쟁을 해 보면서 큰 차이로 느껴졌다.
투쟁이 끝난 이후 진짜 육아 돌봄을 하게 됐다. 4월 1일부터 세종시로 내려가 3개월가량 손주 돌봄을 시작했다. 가끔 세종으로 투쟁 조합원들이 내려오면 기재부, 노동청 등에서 합류했다. 6월 18일 사위가 육아를 담당하면서 나는 7월 1일 일터로 복귀했다.
지금 나는 LG 마포빌딩에서 근무한다. 고비 때마다 가족의 도움이 고마웠다. 덕분에 남편도, 아들도 각자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는 자립심 강한 남자들이 되어 있다. 지금처럼 힘든 세상에 나의 일이 소중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어 감사하다. 가족 모두 건강해서 지금이 참 좋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민경남씨는 공공운수노조 서울지역공공서비스지부 엘지빌딩분회 조합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