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어둡다는 새벽 3시, 호텔 방의 수화기에서 필자를 애타게 찾는 소리가 울렸다. 아스완에서 300km 남쪽, 최남단의 아부심벨에 가기 위해서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아스완에 자리한 대부분의 호텔은 이런 여행자를 위해 간단한 도시락을 챙겨준다. 이집트를 방문한 여행객들에게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유적 중 아부심벨 신전은 피라미드 다음가는 지위를 보유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3300년 전, 신왕국의 위대한 파라오 람세스 2세는 자신이 신과 동등하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 과시욕으로 인해 전국에 그를 본뜬 거대한 석상과 신전이 곳곳에 들어섰다. 이 파라오는 남쪽의 누비아를 의식해 나일강 건너편에 거대한 신전을 지어 오랜 기간 이 지역의 랜드마크로 사랑받았다.
세월이 흘러 모래에 깊게 파묻힌 이 신전의 존재는 오랫동안 잊혔지만, 스위스의 탐험가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다시 세상에 드러났다. 람세스 2세의 대신전과 그의 왕비 네페르타리의 소신전으로 구성된 아부심벨은 근래에 들어 위기를 맞이했다.
1960년대 조성된 하이댐으로 인해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이 물아래로 잠길 예정이었다. 거대한 수자원을 확보해 경제를 발전해야 한다는 이집트 정부는 이 문화유산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유네스코가 중심이 되어 아부심벨 신전을 보호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 아이디어는 신전을 조각조각 분해하여 높은 지대에 콘크리트를 넣어 만든 인공언덕에 재조립해 놓는 것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모은 기금을 통해 1964년부터 시작된 이전 작업은 1972년까지 이어졌고 원래 위치보다 65미터 높은 자리에 들어서게 되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것을 계기로 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수몰 위기 넘어서고... 수천 년 세월 풍파도 이겨낸 석상
아부심벨 투어객들을 태운 버스는 검문소를 거쳐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의 바다로 나아간다. 어느새 해가 뜨기 시작했고, 사막에 나있는 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는 120km 이상의 속도를 내며 엑셀을 끊임없이 밟는다.
예전에는 이 일대의 치안이 불안해 버스와 승합차가 검문소에서 일렬로 출발했다고 한다. 3시간 쯤 달렸을까? 한동안 만날 수 없었던 나세르 호의 전경이 측면으로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주차장에 도달했다.
모든 이들의 목적지는 같다. 신전으로 가는 길에는 수많은 상인들이 관광객의 호주머니를 털려고 필사적이지만, 금세 허탕만 치고 만다. 광활한 호수의 측면을 돌아 신전측면으로 어렴풋이 람세스의 석상이 드러난다. 이것을 보려고 새벽부터 이 고생을 감내했다.
파라오의 이중관을 쓰고 있는 람세스 2세 동상 4개가 우리 앞으로 그 위엄을 드러낸다. 각각 청년기에서 장년기의 모습이라고 하는데, 사실 겉으로 보았을 때 큰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수천 년 동안 세월의 갖은 풍파를 이겨낸 그 자태가 가히 대단해 보였다.
람세스의 다리 사이의 파라오 가족들의 작은 석상을 지나 옆의 벽화를 바라보니 포승줄에 묶인 채 꿇어앉아 있는 정복지역의 포로들이 그려져 있었다. 신전 안쪽으로 들어가니 8개의 기둥에는 오시리스 형상을 한 람세스 2세의 동상들이 줄줄이 서 있었고 위대한 파라오의 업적이 벽화로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제대로 보려면 적어도 반나절은 걸릴 듯싶다. 가장 안쪽에 위치한 지성소에는 4개의 신이 나란히 앉아있다. 왼쪽부터 프타, 아문, 람세스 2세, 라 신인데 각각 이집트의 신 중 가장 높은 권위를 지니고 있지만, 그들과 나란히 파라오가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자의식의 소산인 것이다.
특히 일 년에 하루는 이 지성소까지 햇빛이 들어온다고 한다.
대신전을 나와 조금 걷다 보면 당시 파라오가 그의 부인 네페르타리를 위해 지은 소신전을 만날 수 있다. 이 역시 만만치 않은 규모로 정면에는 람세스의 동상이 4개, 네페르타리 동상이 2개 서 있다.
확실히 왕비의 신전이라 그런지 친근하고 편안한 느낌이 전해진다. 하토르 여신의 친절하고 웃는 얼굴이 표현되어 있는 기둥을 보니 고대 이집트가 가지고 있는 권위적이고 딱딱한 모습의 선입관이 무너져 버렸다.
다시 차로 돌아와 뜨겁게 달궈진 사막을 달린다. 사막에 물 웅덩이가 파져 있는 듯한 모습이 보이는데, 실은 이것이 전부 신기루라고 한다. 불안정한 대기층에서 빛이 굴절된 생긴 신기루는 기온차가 큰 사막에서 주로 만날 수 있다.
아부심벨과 마찬가지로 하이댐으로 인해 수몰될 위기에 처했다가 유네스코에 의해 욺겨진 위대한 유산이 하나 더 있다. 하이댐, 로우댐 사이 필레섬에 자리했던 필레신전이다. 현재는 아질키아섬에 있으며 이곳에 가기 위해선 배가 필수다.
문제는 '정가'라는 것이 따로 없어서 배주인과 흥정을 거쳐야 한다는 점. 가이드로부터 미리 충고 받은 금액을 기준으로 '밀당'을 하니 생각보다 수월했다. 배에서 바라본 경치는, 굳이 신전을 가지 않더라도 꽤나 장관이었다.
예전 필레섬은 오시리스의 매장지 중 하나로 알려졌고 멤피스와 누비아 사이의 상업중심지였다. 나일강의 급류구간은 배로 통행하기 어려웠기에 상인들은 이곳에 내려 물건을 교환한 후 다시 배에 실어 돌아갔다.
특히 이 섬의 필레신전은 이시스 여신을 모신 이집트에서 가장 잘 보존된 신전 중 하나다. 이집트의 파라오뿐만 아니라 카이사르와 하드리아누스 등 로마의 황제도 방문했던 곳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수많은 인물들이 신전에 건축한 기념물들이 모여 신비로운 대 단지를 만들어 낸 것이다.
탑문에서부터 조각되어 있는 이집트 신들의 모습은 질서에 의해 엄숙한 모습을 나타내고, 마치 어제 막 만들어져 세워진 것처럼 생동감이 느껴진다. 문명의 힘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