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부터 주 1회 어르신들과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싣습니다.[기자말] |
나는 복지관에서 '내 인생 풀면 책 한 권(내풀책)'이라는 이름으로 어르신들과 글쓰기 수업을 한다. 복지관의 많은 수업 중 굳이 글쓰기를 선택해 주신 어르신들에게 나는 늘 고맙다. 그러니 하나라도 더 알려드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어르신들은 대부분 매우 긴 문장을 쓰신다. 한 문장이 A4용지 10포인트 기준으로 3줄을 넘기는 일이 잦다. 문법 오류를 줄이려면, 읽는 사람을 고려한다면, 문장을 짧게 써야 한다고 매번 말하지만 한번에 고쳐지지 않는다.
그걸 고쳐보겠다며 글을 쓰신 모든 분께 개별 출력 파일을 드린 적이 있다. 긴 문장을 어떻게 끊으면 좋을지 각자의 글에서 예시를 보여드렸다. 품이 많이 드는 일이었지만 '하나라도 더 알려드린다'라는 내 기준으로는 아주 훌륭한 일이었다.
반응이 별로였던 빨간펜 첨삭
칭찬 받을 줄 알고 했던 일인데 반응은 그저 그랬다. 머리 아프다는 분도 계셨다. 순간 서운했다. 고등학생 논술 첨삭에서 이정도로 개별 첨삭 받으려면 단가가 얼마인 줄 아시냐는 소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그러다 호소다 다카히로의 책 <컨셉 수업>이 떠올랐다. 좋은 컨셉은 '고객의 눈높이에서'라는 절대 불변 대전제가 있다고 한다. '하나라도 더 알려드리고' 싶은 내 마음은 과연 어르신의 눈높이에 맞을까? 고등학생 '입시' 원고와 내 인생 '풀면'의 원고에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있나?라는 질문이 생겼다.
어르신의 글은 고등학생 논술처럼 논리를 따질 일도, 독자를 크게 고려할 일도 아니었다. 그저 내 인생을 '풀면' 글이 된다는 것에 흥미를 느끼면 된다. 애초에 내가 잡은 콘셉트도 '풀면'이 아니었던가.
매주 글 한 편씩 써오시는 어르신이 있다. 자연스레 그 분의 글로 수업이 시작된다. 어느날은 30년 전에 했던 미서부 여행에 대한 글이었다. 10년 전에 가본 호주보다 30년 전의 미서부가 더 생생하다며 눈을 반짝이셨다.
교실은 갑자기 여행기로 들썩였다. 누구는 유럽여행이, 누구는 하와이 여행이 제일 좋았다고 한다. 그간 수업 시간에 별 말이 없던 분까지도 신나서 이야기를 하신다. 그야말로 '내 인생 풀면'의 한 장면이다. 이 장면은 저절로 한 문단을 만들어냈다.
나는 파워 포인트로 이 문단을 옮기고 제목을 붙였다. '이태리에서 고려장 당하는 줄 알았다.' 내 타자가 화면에 뜨자마자 다들 빵 터지셨다. 웃음은 자신감을 주는 걸까. 절대 못쓰겠다는 분도 뭔가 쓱쓱 채우신다.
글쓰기에 '절대'는 없더라
이제보니 '하나라도 더 알려드리고 싶은'은 어르신들을 위하는 마음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잘 가르친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욕심이었다. 짧은 문장이 주는 간결함보다 편하게 풀어내는 긴 문장이 이곳에서는 더 중요했다.
어떤 글쓰기 수업이든지 간에 나는 '짧은 문장으로 쓰세요'를 강조했다. 길어진 문장은 여지없이 빨간펜이 들어갔다. 이게 적용되지 않는 글쓰기는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믿었다.
'절대'는 절대 없나 보다. 빨간펜이 없어진 곳에서 어르신은 당신들 안의 이야기를 신나게 풀어내셨다. 나는 그저 그 글의 흐름을 지켜보고 적절한 제목을 붙여드리면 그만이었다.
순식간에 수업이 끝났다. 시작할 때보다 어르신들 표정이 더 화사해 보였다. 나는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풀어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어르신들은 두서 없는 노인네 이야기를 그리 정성스럽게 들어주는 게 더 고맙다고 하셨다.
짧은 문장 쓰기는 글쓰기 수업의 진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리가 진심을 전달하지 못한다면 소용없다. 진리를 위한 개별 파일보다 같이 웃는 진심이 더 강력했다. 진리와 진심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는 강사가 되고 싶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