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천여 년 지속된 왕조체제에서 피지배 민중이 지배자를 타도하고 역사의 주역이 된 것은 1960년 4·19혁명이 처음이었다. 우리나라 역사는 왕조창업, 반정반란, 민란, 쿠데타, 유신정변 등 여러 가지 정치 변혁이 있었으나 '성공한 혁명'은 한 번도 없었다.
전봉준 등의 동학농민혁명과 1919년 3·1독립혁명은 좌절된 혁명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4월혁명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는 학생·시민혁명이다.
1960년 4월의 민주혁명은 3·15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발화되었다. 마산에서 일기 시작한 부정선거 규탄의 시민·학생시위는 쉽게 서울과 부산·대구·광주·목포·청주 등 대도시로 번졌다.
'피의 화요일'로 불린 4월 19일 고교·대학생을 비롯, 10만여 명의 서울시민이 시위에 참가, 시위대의 일부가 경무대로 향하는 한편, 서울신문사와 반공회관·경찰서 등에 불을 지르고 부정선거를 규탄했다. 지방도시에서도 수십만 명의 시민·학생들이 부정선거 규탄과 함께 이승만 정권 타도의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서울에서만 이날 104명, 부산에서 19명, 광주에서 8명 등 전국적으로 186명이 사망하고, 6,260명이 부상당했다. 희생자는 하층 노동자 61명, 고등학생 36명, 무직자 33명, 대학생 22명, 초등학생과 중학생 19명, 회사원 10명, 기타 5명 등이었다. 희생자 규모로 보아 국민혁명의 성격을 띠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한 직후 서울 등 주요 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육군참모총장 송요찬 중장을 계엄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서울 시내에 진입한 군대는 경찰의 유혈사태를 방지하고 일부 과격분자들의 파괴방지에 전념하면서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민심의 이반현상이 워낙 강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는 등 일련의 모션을 취하면서 사태를 미봉하고 계속해서 정권을 유지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이미 혁명적인 열기에 휩싸인 민중은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4월 26일의 시위는 정국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 그동안 침묵했던 일부 대학교수들이 시국수습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시위에 나선 것이다.
4월 25일 오후 3시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인 27개 대학교수 258명은 "대통령을 위시한 여야 국회의원들과 대법관 등은 3·15부정선거와 4·19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동시에 재선거를 실시하라"는 요지의 14개항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어 교수들은 〈4·19의거로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계엄하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감행, 서울시가를 행진했다.
4·25교수단 시위는 시민과 학생들의 절대적 지지를 불러일으켜 이날 밤부터 다시 시민·학생들이 궐기했으며, 26일 또다시 대대적인 데모를 촉발시킴으로써 마침내 이승만의 하야를 촉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무렵 사태수습을 논의 중에 있던 국회는 3·15선거의 무효화 선언과 내각책임제의 개헌 등을 수습방안으로 채택했다가 이 대통령의 하야소식이 발표되자 다시 긴급회의를 소집, 이 대통령의 사임권고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국회의 결의가 전달되자 이 대통령은 4월 27일 국회의 결의를 존중하여 즉각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히고 대통령직 사임서를 국회에 전달했다.
이로써 이승만의 12년 독재정치는 종식되고, 그는 4월 28일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옮겼다가 곧 망명길에 올랐다. 상하이 임시정부의정원에 의해 탄핵되고, 4·19혁명으로 두 번째 탄핵당한, 부끄러운 정치인이었다. 그는 초대 대통령으로서 국가의 관행과 시범을 보이기는커녕 헌법을 유린하는 등 반헌법적 행위를 거듭하다가 퇴출되었다. 57년 뒤 박근혜가 뒤를 이었다.
4·19혁명은 몇 갈래의 역사적 의지가 접목되어서 성공할 수 있었다. 하나는 동학혁명의 맥박이요, 다른 하나는 3·1혁명의 정신이다. 황토현에서 찢긴 민중의 혼이, 탑골공원에서 발화된 독립의 의지가 4·19에 접목되어 벽혈로 발휘되었다. 때문에 4·19혁명의 의의는 단순 도식의 정치변혁운동이 아닌, 역사성을 보여준다.
첫째, 계층·신분·지역·성별의 구분 없이 민중이 하나가 되어 일으킨 국민혁명.
둘째, 외세는 물론 특정 정치집단의 조종이 아닌 민중의 자주적이고 자발적인 주체혁명.
셋째, 반공을 분명히 하면서도 남북대화를 제의하는 민족통일정신.
넷째, 매판자본·원조물자 착복 등 전근대적인 경제질서를 타파하고 산업의 근대화 제시.
다섯째, 전근대적 신민의식에서 근대적 시민의식을 고취한 시민정신의 발휘.
여섯째, 정체된 사회에 활력을 불러일으킨 신생활운동.
4월혁명 정신은 곧이어 닥친 5·16쿠데타로 좌절되고 말았으나, 이후 반군정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사상적 이념적 가치로 작동하였다. 그 면면한 전통은 반유신투쟁,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 촛불혁명으로 이어졌다. (주석 1)
유림이 예측한 대로 독재자 이승만은 3.15부정선거를 획책하다가 학생·시민들의 궐기로 무너졌다. 2인자 이기붕은 아들의 총격으로 죽고 이승만은 야심에 하와이로 도망쳤다. 유림은 위대한 4월혁명을 맞아 4월 22일 <시국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다.
시국에 관한 담화
이승만 독재가 마침내 무너졌다. 이것은 오로지 자유를 위해 강권에 반항한 생명의 대가이므로 우리는 영용한 투사들에게 눈물의 감사를 드리어 자유수호의 영령들에 영원의 영광을 드리는 동시에 그들의 피가 헛되지 않도록 계속 노력해야 될 것이다.
정부수립 후 오랜 억압에 신음하던 국민의 원한이 폭발되어 제1차의 승리를 얻으므로 민주혁명의 막이 열렸으니 진정한 민주가 실현될 때까지 우리가 일치단결로 공동투쟁해야 될 것인 바 당면과업은,
-. 이기적 필요로 이승만 독재를 부식조정해 놓고, 그 야망을 여의히 만족시키지 못함에서 불평을 호소하는 부류가 이승만 독재를 계승하거나, 정치 시승들이 의혈의 대가를 도절횡취 못하게 할 것.
-. 이번 투쟁의 근본의의가 부정선거의 규탄에 그치는 것이 아니므로 재임되는 질서는 정치문제에 한정하지 말고 제반 문제에 걸쳐서 목전의 미봉책을 버리고, 장래를 고려할 것.
-. 어느 당파나 계급의 승리가 아니므로 모든 대책을 일임하지 말고, 이번 투쟁의 공로자들을 비롯하여 광범한 각 방면으로 거족적 의견을 수용채택할 수단을 취할 것.
-. 성격의 여하를 막론하고 외세의 영향을 방지할 것.
독립노농당 전당상임대표회 의장 유림.(주석 2)
주석
1> 김삼웅, <통사와 현대사로 읽는 한국현대사>, 253~254쪽, 인문서원, 2019.(발췌)
2> <단주 유림 자료집>, 135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