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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4.19혁명 당시 초등학생(당시 국민학교)들이 시위에 나선 모습.
1960년 4.19혁명 당시 초등학생(당시 국민학교)들이 시위에 나선 모습. ⓒ 국사편찬위원회

이승만은 12년의 통치기간 백색독재, 구호는 반공을 내걸면서 권력을 유지하였다.

평화통일론까지 탄압하면서 시대착오적인 북진통일론만 내세웠다. 따라서 4·19혁명은 단순히 독재정권을 타도한 정치혁명이 아니었다. 프랑스혁명이 앙시앙 레짐(구체제)을 타도하면서 자유·평등·박애의 세기적인 가치를 제시했듯이, 4월혁명은 이승만 정권에서 금기시되었던 평화통일을 바라는 신세대들과 혁신계 활동의 물꼬를 텄다.

4월혁명과 더불어 새롭게 나타난 가장 특별한 현상중의 하나는 혁신세력의 등장이었다. 혁신세력은 이승만 치하에서 불법화되고 조봉암을 간첩혐의로 처형하는 등 가혹한 탄압으로 오랫동안 동면상태를 유지해오다가, 4월혁명의 물결을 타고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창숙·장건상·유림·조경한·정화암·김학규 등 혁신계의 원로급이 중심이 되어 혁신동지총연맹을 조직했다.

유림은 4월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던 5월 13일 독립운동계의 원로 7인과 <7인공동성명>을 발표, 시국수습 방안을 제시했다. 김창숙·장건상·정화암·조경한·김학규·권오순 등과 함께 하는 시국선언이다.

7인공동성명서

인류해방 역사에 특이한 기록을 길이 남길 4월혁명에서, 죄악이 만연한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으나 그 잔졸들이 회생을 망상하는 한편에는 구한말부터 왜총독을 거쳐 이 독재에 이르기까지 내외정세에 때맞추어 장귀에 충성을 다하여 모든 학정을 부실조장하고, 허세를 빌려 동포를 임의로 압박착취한 전통을 가진 족속들이 이번에는 갖은 미식(美飾)으로 탈을 바꾸고 목소리를 고쳐 이 나라의 통치권을 엿보는 야망으로 온갖 흉계를 꾸며내고 있다.

이렇게 국가의 운명이 또다시 구겁(求劫)의 세륜(洗淪)에 임박한 위기를 당하여 우리는 무력(無力)을 빙자하고 앉아서 볼 수 없으므로 뜻을 같이 하는 인사들과 힘을 합하여 먼저 민족의 정기를 방위하고 정치·경제·문화 등등 국민의 생존과 발전에 관련되는 모든 면에서 시대와 환경에 적합한 새 기구와 새 인재로서 이 땅에 참된 민주체제를 확립하여 남북통일을 빨리 성취하고 지름길로 뛰어가 선진조국 앞에 나설 목적으로 혁신동지총연맹을 조직한다.

전민족의 일치단결로서 국가의 완전독립을 성취함이 현 단계에서 우리의 유일한 역사적 임무이므로 계급투쟁으로 국민을 분열하고, 국제운동으로 주권을 망각하는 적색계열과의 합작은 내외정세로 보아서 백해가 있고 일리가 없으므로 우리는 이를 삼가 사양한다.

백지에 도안을 그리는 우리 건국에 '보수'를 운위함은 그들이 가진 죄악의 전통을 정당화하여 영구 유지하자는 의미 밖에 없고, 자신의 과거생활과 엄청나게 상반되는 '혁신'을 고성질호함을 민중을 속여서 그들의 추악한 경력을 엄폐하는 행위이다.

우리는 이러한 무리를 오직 발본색원으로 소탕할 뿐이고 조금도 용인가석할 여지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당파를 초월하여 개인 자격으로 남은 피를 조국에 바치려는 지원(志願) 뿐임을 엄숙히 선언하는 바이니 애국동료들의 일치 단결을 눈물로서 호소하는 바이다.

단기 4293년 5월 12일
혁신동지총연맹(가칭) 발기인 대표
김창숙·장건상·유림·정화암·조경한·김학규·권오순.

주석
1> <단주 유림 자료집>, 136~13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유림평전#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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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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