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말 |
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바다 건너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이해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미디어와 인문학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이 기사는 한미리스쿨이 개설한 심화언론인양성과정 2기 학생들이 주제 선정과 취재 과정에서 지도를 받아 제출한 현장기사 쓰기 과제들을 데스크 본 것 중 하나이다. 기사를 쓴 전유정은 지난달 30일 기숙학교인 한미리스쿨 심화과정에 입소했다. |
굴곡진 근현대사를 품은 알뜨르비행장과 송악산
"몹쓸 바람이 부는 곳이라 모슬포가 됐다는 말이 있어요."
휘몰아치는 바람을 맞으며 한 답사 참가자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는 "바람 때문에 '못 살겠다 못살포'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덧붙였다. 재미있고 직관적인 발상이지만 원래 뜻은 다르다.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모슬포는 제주도 남서부를 대표하는 항구의 이름이다. '모슬'은 모래를 의미하는 제주어 '모살'에서 유래했고, '포'는 '포구'다. 모슬포는 말 그대로 '모래가 있는 포구'라는 뜻이어서 답사 날도 모래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알뜨르 들판 동·서쪽에는 섬으로도 땅끝인 마라도와 가파도로 가는 배의 선착장이 있다.
모슬포 일대는 바람만 센 게 아니라 일본제국주의 등 외세의 강풍도 맞아야 했다.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과 상처가 곳곳에 남아 있다. 알뜨르비행장과 섯알오름, 송악산은 일제강점기, 그리고 제주4·3과 한국전쟁 때 대량 학살의 비극을 품고 있다. 이곳에 평화대공원을 조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제주도청은 최근 원래 사업 방향과는 달리 이 일대를 종합스포츠타운으로 조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비판이 일고 있다.
평화대공원 앞바다의 500척 중국어선단
지난 17일 송악산 평화대공원 조성 예정지 일대에서 다른제주연구소와 송악산알뜨르사람들이 주최한 제1차 다른제주답사가 열렸다. 송악산알뜨르사람들은 송악산의 생태적 가치와 알뜨르 유적의 평화적 가치를 한데 묶어 제대로 된 평화대공원 조성의 구상과 방안을 도민들과 함께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창립한 비영리시민단체다.
송악산 주차장에서 출발해 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시야가 트이자 멀리 산방산과 한라산이 보일 뿐 일망무제의 제주 들판이 펼쳐지고 화순항 앞바다에는 마침 풍랑특보가 내려져 중국 어선 500여 척의 대선단이 정박하고 있다. 과거에는 중국 어선들도 화순항 안으로 피항했지만 워낙 어족자원들을 훑어가고 항구를 오염시켜 앞바다에만 닻을 내리게 한다는 설명이었다.
우리 남·서해와 동중국해 그리고 일본과 태평양을 잇는 십자로에 자리 잡은 제주도는 예나 지금이나 외세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지정학적 운명을 타고났다. 평화대공원 예정지 일대를 둘러보면서 김정임 송악산알뜨르사람들 대표는 아침부터 몰려든 관광객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부터 토로했다.
"매일 수천 명이 송악산을 다녀가고, 풍경의 아름다움을 말하지만 이곳이 어떤 곳이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이 앞이 다 태평양이잖아요. 태평양전쟁의 중심에 있던 곳이 바로 이 대정읍 일대입니다."
송악산 사진 명소는 일제가 만든 '군사기지'
전쟁 막바지이던 1945년, 일제는 '결7호 작전'이라는 작전명으로 제주도를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한 최후의 보루로 삼았다. 관동군 등 정예 병력 6~7만이 제주도에 주둔하며 도민을 강제동원해 해안기지와 비행장, 작전도로와 진지, 땅굴 등 각종 군사시설을 건설했다. 그러나 미군이 오키나와로 상륙하고 원폭 투하로 전쟁이 끝나면서 제주는 오키나와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
송악산 해안 절벽 아래쪽에는 동굴진지가 줄지어 구축됐는데 지금은 송악산의 '사진 명소'가 됐다. 동굴에 가이텐이라는 '인간 어뢰'를 숨겨놨다가 미군 함정이 오면 자살공격을 감행한다는 전술이었다. 제주도 동쪽의 성산 일출봉과 서우봉 해안동굴 말고도 송악산에만 15개 해안동굴을 뚫었는데, 폭 3~4미터, 길이 20미터 규모다. 가이텐(回天)은 '하늘을 돌린다'는 뜻으로, 가미카제와 함께 고안한 특공 전술이었으나 젊은이들만 산화했을 뿐 패색이 짙은 전세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바다로 나가기 쉽고 피항도 쉬운 이점 때문에 화순항 일대는 제주해군기지 유치 논의 당시 첫 번째로 고려됐던 곳이다. 공동 해설을 맡은 김현우 송악산알뜨르사람들 사무국장은 화순항을 가리키며 "해군이 가장 원했던 곳이 여기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과 환경단체의 반발로 무산돼 강정마을로 바뀌었다.
일제 야욕의 상징 '알뜨르 비행장'
송악산에서 굽어볼 수 있는 드넓은 들판이 알뜨르이다. 알뜨르는 '아래 있는 들판'이라는 뜻의 제주어다. 이곳에서는 밭농사가 잘 된다. 들판에는 감자와 열무, 콜라비와 콩 등이 풍성하게 자라고 있다.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중국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로 알뜨르비행장을 건설했다.
일제는 1926년부터 10년간 이곳에 20만 평 규모 비행장을 만들었다. 남북 방향으로 길게 들어선 활주로는 길이 1,400미터, 폭 70미터 크기다. 들판 곳곳에는 볼록 솟은 비행기 격납고가 보인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나가사키현의 오무라 항공대가 이곳에도 비행장을 건설해 중국 난징과 상하이 등 중국 대륙을 공격하는 전초기지로 활용했다.
일제가 이곳을 기지로 삼은 이유는 일본에서 이륙한 폭격기들이 한 번에 중국 난징까지 비행하고 돌아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급유를 위한 중간 기착지가 알뜨르비행장이었다.
김현우 사무국장은 "당시 공습은 36회, 600기의 전투기가 총 300톤의 폭탄을 쏟아부었다"며 "알뜨르비행장이 난징 학살의 전초기지가 됐다"고 말했다. 송악산알뜨르사람들을 포함한 제주의 시민단체들은 학살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매년 12월 13일, 이곳에서 '난징추모제'를 연다.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매국'한 자들
격납고 중 한 곳에 박경훈·강문석 작가의 '애국기매국기'가 설치돼 있다. 이 작품은 2010년 '경술국치 100년 박경훈 개인전: 알뜨르에서 아시아를 보다'에 출품했던 것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 주력기 제로센전투기를 철근과 동판을 이용해 만들었다. 작가들은 콘크리트 잔해만 남은 격납고 안에 '애국이란 이름으로 매국했던 친일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이 작품을 만들어 놓았다'고 밝혔다.
이들은 작가노트에 이렇게 썼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친일파 중 애국기(제로센전투기)를 헌납한 식민지 조선의 친일지주와 자본가들이 많았다. 그들 중 상당수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막대한 부를 창출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본의 천황과 그의 군대의 영속적인 권력과 재부의 축적을 위해 당시 만만치 않은 비용이 소요되는 제로센전투기를 사들여 헌납했다. 그런 경우 대부분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이름이 오르내린 탓에 친일인명사전에도 빠짐없이 그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결국 그들이 헌납한 것은 낙인처럼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매국의 기록이 된 셈이다.
알뜨르비행장을 방어하던 셋알오름 고사포 진지
알뜨르에는 알오름 세 개가 있는데 알오름은 알처럼 조그만 오름을 뜻한다. 동쪽에 동알오름, 가운데 셋알오름, 서쪽에 섯알오름이 있다. 셋알오름 정상에는 고사포진지가 남아 있다. 고사포는 내습하는 미군 항공기를 쏘기 위해 설치한 앙각이 큰 대포다.
군사시설 건설에는 제주도민이 동원됐다. 이들은 1~2개월씩 마을 단위로 교대하며 10대에서 60대까지 동원됐다.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자녀가 동원되는가 하면 작업중 다치거나 죽은 이도 속출했다.
제주4·
3과 한국전쟁의 학살터 섯알오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알뜨르는 또 한 번, 잔인한 학살의 현장이 됐다. 섯알오름은 제주4·3에서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시기의 대량 학살터이다. 이곳에는 희생자의 넋을 추모하기 위한 '백조일손지묘'라는 합동묘가 조성돼 있는데, 이는 '백 할아버지 한 자손의 무덤'이라는 뜻이라고 김현우 사무국장이 설명했다.
"이건 엄밀히 말하면 4·
3과 직접 관련은 없어요. 간접적으로는 있죠. 이 학살은 50년 8월에 일어났어요. 초토화 작전부터 시작해서 49년 초까지 거의 다 진압됐죠. 4·
3이 끝난 때예요."
진압이 다 끝났을 때인데, 이들은 왜 희생돼야 했을까?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좌익세력이 북한 공산군에 동조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각 지구 계엄사에 좌익분자 체포를 명령했다. 제주지구 계엄당국은 불순분자를 색출한다며 보도연맹원, 4·3사건 때 체포됐다 석방된 사람 그리고 무고한 양민을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검거했다.
"위에서는 잡으라고 하는데, 어떤 사람을 잡겠어요? 4·
3에 연루된 가족이 있거나, 4·
3 당시에 경찰서에 와서 항의하던 사람들을 다 잡아갔죠."
김현우 국장은 "당시 정부는 낙동강 전선이 뚫리면 제주로 갈 생각에서 잡아들인 사람들을 다 죽이자고 한 것"이라고 말했다. 트럭에 예비검속자들을 태우자 본능적으로 죽음을 직감한 이들은 신고 있던 검정 고무신을 트럭 밖으로 떨어뜨렸다.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가족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1950년 8월 20일 새벽 2시와 5시, 예비검속자 193명은 섯알오름에서 모조리 학살당했다. 이 학살터는 원래 일본군 탄약고가 있던 곳인데 미군의 폭격으로 거대한 웅덩이가 생기자 은폐하기 좋은 학살터로 이용됐다.
남은 가족들은 다음날 고무신을 따라 갔지만 애타게 기다리던 이들은 이미 주검이 되어 있었다. 학살을 자행한 해병대 모슬포 부대는 사건을 은폐하려고 시신 수습을 막았다. 희생자 가족들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야 유해를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백골이 된 이들을 구별할 길은 없었다. 유족들은 이들을 한 조상으로 함께 모시기로 했다. 그리하여 '백조일손지묘'가 만들어졌다. 섯알오름 학살터 비석에는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김경훈 시인의 '섯알오름길'이란 시가 새겨져 있다.
트럭에 실려 가는 길
살아 다시 못 오네
살붙이 피붙이 뼈붙이 고향마을은
돌아보면 볼수록 더 멀어지고
죽어 멸치젓 담듯 담가져
살아 다시 못 가네
이정표 되어 길따라 흩어진 고무신들
전설처럼 사연 전하네. (하략)
역사적 가치에도… 개발 논란 반복
근현대사 비극의 현장이 그런대로 잘 보존돼 있는 송악산과 알뜨르 유적지가 개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알뜨르 유적지는 일제강점기의 군사 유적과 4·3 사건의 아픔을 담은 공간으로, 2005년 제주가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된 이후 평화공원 조성 논의가 활발해졌다.
'세계평화의 섬' 지정은 제주를 평화 이념을 실현하는 장소로 만들겠다는 도민의 염원을 담은 것이다. 이에 따라 알뜨르 유적지는 평화공원의 적지로 주목받았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네 차례 용역이 진행됐다.
송악산 일대는 그동안 개발제한구역으로 관리됐으나 2022년 유원지 지정이 해제되며 난개발 우려가 커졌다. 특히 중국 자본이 대규모 개발을 시도하자 도민과 주민들은 강력히 반대했고, 제주도가 그 부지를 재매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영훈 지사가 이끄는 도정은 평화공원 조성 관련 용역에 스포츠타운 등 관광개발계획을 포함했다. 행정안전부에서 평화공원만으로는 예산 지원을 해줄 수 없다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2022년 제주도가 실시한 주민수용성 조사에 따르면, 도민들은 평화공원 조성 때 '상징성 강조'(39.2%)와 '아름다운 경관 유지'(23.4%)를 우선으로 꼽았다. 경제적 효과로는 '지역경제 활성화'(29.3%)와 '지속 가능한 유산 창출'(28.6%)을, 사회적 효과로는 '역사문화의식 고취'(44.3%)를 기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도민들이 난개발보다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유지하며 지속 가능한 발전을 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상처에 소금을 뿌리려는 스포츠타운 구상
일제강점기 전쟁의 아픔과 제주4·3의 비극을 간직한 송악산과 알뜨르비행장 일대가 여전히 개발과 보존의 갈림길에서 갈등을 빚고 있다. 목적이야 달랐지만 알뜨르비행장과 송악산의 동굴진지 등도 개발의 범주에 드는 것이었고 제주의 산하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다크 투어리즘의 현장으로 보존이 절실한 그곳에 종합스포츠타운을 건설하겠다는 발상이야말로 상처에 소금을 뿌려대는 짓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