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지만 명확하고, 강변하지 않아도 설득력 높은 목소리을 가진 사내 한 명을 알고 있다. 흑산도에서 태어난 그는 목포와 광주에서 학교를 다녔고, 이후 꽤 긴 시간을 기자로 살아가다가 지금은 고향 근처로 돌아가 '바다'와 '섬'에 관련된 일을 하며 지낸다.
그와 10년 가까이 같은 직장을 다닌 필자는 한잔 술에 취해 꿈꾸는 눈동자로 유년의 '그리움'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볼 수 있었다. 선후배와 주고받는 말 속에 은유와 상징을 무시로 담아내던 그는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시인의 성정으로 세상과 인간을 대해왔을 수도 있었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다.
그 깨달음의 근거가 지금 필자 앞에 놓여있다. 낮은 목소리로 상대를 설득할 줄 알고, 순정한 소년의 눈망울을 가진 이주빈이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써서 간직해왔을 시를 읽는다. 새삼 이주빈의 내면 풍경을 다시 보는 듯해 마음이 저 아래 깊숙한 곳에서부터 아려온다.
시를 관통하는 세 가지 핵심어
이주빈의 시를 관통하는 세 가지 핵심어는 바다, 섬, 그리움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돌아보면 이 세 가지를 소재로 이야기할 때 이주빈의 목소리엔 신명이 묻어났고, 눈동자는 유독 빛났다. 이번 시집은 바다와 섬, 그리고 그리움이 어떻게 그를 만들었고, 간난신고의 세상을 견디게 했으며, 내일을 그려가게 했는지에 관한 부연이라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그 옛날 남도 판소리처럼 곡진함과 서글픔으로 사람의 애간장을 아프게 녹인다. 근래 보기 드문 진경이다.
이주빈의 고향은 바다, 그 가운데 외롭게 떠있는 섬이다. 부모미생전의 그리움이 생겨난 그곳을 짧고도 강렬하게 노래하는 '비 내리는 흑산바다'를 읽는다.
눈으로만 듣고 싶은
노래 있다
귀로만 보고 싶은
사람 있다
입술로만 부르고픈
이름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인 이주빈은 흑산도에서 태어났다. 태를 묻고 더없이 다감했던 어머니 곁에서 유년을 보낸 그곳은 그의 품성이 형성되고, 감수성이 뿌리는 내린 공간.
거기엔 '눈으로 듣는 노래'와 '귀로 보는 사람' 또한, '소리 없이 불러야 돌아보는 이름'을 가진 이들이 산다. 이 역설이 외떨어져 존재함으로써 외로움을 이겨낼 힘을 키우는 '섬 소년' 이주빈을 기른 게 아닐지.
수십 차례의 만남에서 필자가 이주빈에게서 느낀 감정 중 하나는 '고독함'이었다. 큰 소리로 "나는 외롭다"고 하지 않아도 조그만 그의 손짓에서까지 확인되는 쓸쓸함과 고적함. 세상을 감각하는 시인의 촉수는 섬세하기에 그 섬세함으로 인해 상처 받는 경우가 흔하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무인도'라 제목 붙인 시에서는 이주빈의 외로움이 가감 없이 읽힌다. 이런 노래다.
봄바다에 아지랑이 피듯
세상에 잘 깃들고 살아야 할 텐데
겨울바다에 눈 내리듯
그대 마음에 편히 스며야 할 텐데
나의 바다엔
허구한 날 소슬비 들이쳐
가없이 표류하는
작은 종이배 하나
타자를 향해, 남을 향해,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는 객체를 향해 '아지랑이 피듯 세상에 잘 깃들'라고, '눈 내리듯 그대 마음에 편히 스며'들라고 축원할 줄 아는 이.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객관적이고 명철하게 바라보려는 마음까지 갖췄기에 자신을 '가없이 표류하는 작은 종이배'라고 노래하지 않았을까?
상대가 돈이 많건 적건, 힘이 있건 없건, 자신에게 이익이 되건 안 되건 가리지 않고 따듯하게 모두를 끌어안으며 살아온 이주빈의 진면목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이라면 이 대목에서 울컥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착한 사람'이 드물어진 세상이다. 착하다는 걸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해도 된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영악한 사람들이 숱하다. 이주빈이라고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필자가 아는 그는 알면서도 기꺼이 대부분의 타자들에게 '착한 사람'이 돼주며 살아왔다.
그러한 '선량'의 저변엔 그의 유년이 있었다. 그는 착하고 순진한 섬사람들과 어울려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기억이 만들어낸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더 이상 뽀빠이며 풍선껌은 팔지 않지만
아장아장 걸어 단내 제일 진한
과자 봉지 끌어안던 나는
또박또박 적힌 사리상회 간판과 함께
아직 거기 놀고 있다
갑오징어 구워주던 이모는 바다로 돌아가고
꼿꼿한 허벅지에 손주 재우던 할므니는
천리타향 육지에 잠든 지 오래…
- '흑산도 사리상회' 중 일부
'아장아장 걸어' '과자 봉지 끌어안던' 아기에게 '갑오징어 구워주던 이모', 언제건 자신의 '허벅지'를 내주던 할머니와 더불어 살았으니 어떻게 나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타고난 듯 보이는 시인의 선량함은 바로 '흑산도 사리상회'를 드나들던 피붙이와 이웃들 속에서 형성된 게 분명하다.
일렁이는 파도를 타고 바다 저편에서 건너온 '달콤한 육지의 과자'를 먹으며 유년을 보냈으니, 육지에 대한 동경과 궁금증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주빈은 불편이 적은 육지에서의 삶보다 모든 게 부족하고 모자란 섬으로의 귀환을 내내 꿈꿔왔던 것으로 보인다. 왜였을까? 아래 인용하는 시 '섬집'처럼 아무 것도 오지 않는 곳인데.
작은 우체통 녹슬어 으스러질 때까지
편지 한 통 오지 않았다
지붕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간 안테나에도
안부는 잡히지 않았다
하늘에 올린 솟대
다 썩어내릴 때까지
괭이갈매기 한 마리 오지 않았다
눈물이 돌덩이 되고
바위가 모래로 갈리는 동안
바람 한 점 들지 않았다
세상 파도 다 무너져 내릴 때까지
너는 오지 않았다
위 시가 그려내는 풍경은 적막하고 우울하기 그지없다.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100년쯤 전에 그려진 낡아버린 수채화 같은 풍경이다. 네온사인 번쩍이는 육지와는 외떨어진 섬마을의 소년들은 오지 않는 무언가를 기다리며, 대상이 불명확한 그리움 속에서 나이를 먹어간다. 이주빈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어른이 되었을 때 알게 된다. 모든 기다림의 끝은 허망하다는 걸. 그러나, 인식이 거기서 멈춘다면 그건 시인의 태도가 아니다. 허망함을 넘어 세상과 인간의 전망을 만들어낼 언어를 찾아가야 한다. 그게 다음처럼 슬픈 노래라 할지라도. 본래 인간의 주성분은 웃음과 기쁨이 아닌 눈물과 슬픔이 아니었던가.
꽃을 기다리는 날에는
묏등 삐비꽃도 피지 않았다
파도를 기다린 날에는
잔놀조차 일지 않았다
기다리는 날에는
모두 오지 않았다
객선머리에 머리를 덩덩 찧으며 통곡을 해도
바윗돌에 심장을 북북 갈아 피를 토해도
어미는 오지 않았다
사랑은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쳐 쓰러진 하얀 밤
나 몰래 다녀갔을 뿐
기다리는 날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주빈에게 '어미'는 '사랑'과 동의어다. 필자는 그걸 잘 알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써온 그의 문장은 이젠 세상에 없는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회한의 눈물 자국에 다름없었기에.
세상 어떤 것보다 가강 애타게 기다리지만, 어떤 방법으로도 돌아올 수 없는 어머니. 이번 시집의 몇몇 노래가 이주빈의 '사모곡'으로 읽히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 어머니는 시인에게 세계를 남다르게 감각하는 재능과 가없는 착함을 선물하고 저 먼 흑산도 남쪽 누구도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섬으로 떠났다. 이주빈은 지금도 어머니의 섬으로 가는 해도를 찾고 있다. 어째서냐고? '어미'를 떠올리면 때마다 '아파오는 심장'을 스스로 다스릴 수 없는 까닭이다.
춘삼월 갯바람은
미역 줄기처럼 싱그럽고
깨금발 딛은 파도에선
네 살결이 잡힌다
어쩌자고 나는
불시로 아련한 심장을
달고 태어난 것일까
어쩌자고 너는
까닭 없이 그리운 얼굴이었을까…
- '불시로 아련한 심장' 중 일부
'불시로 아련해지는 심장'을 아들에게 준 어머니. 이주빈의 시집에서 무시로 출렁이는 바다와 서정으로 흔들리는 섬, 곳곳에서 발견되는 수백 번의 그리움은 모두 '어미'로 귀결된다.
바다, 섬, 그리움이 이 시집의 세 가지 핵심어라면, '어미'로 표현되는 시인의 어머니는 부정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유일한 알짬이다. 이주빈에게 '어미'라는 단어의 무게는 천금보다 무겁다.
무겁고 엄정하게 어머니를 인식하는 사람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방식은 어떠해야 할까? 아래 노래가 그 답을 들려주고 있다. 이는 '시인 이주빈'이 아닌 '사람 이주빈'의 지향을 짐작케 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이웃집 옥상에 버려진 맥주캔에 눈이 살포시 쌓였다 눈은 스스로를 녹여 우주의 지문을 이식하고 있다 지문엔 남십자성 따라 바다로 가는 길이 새겨질 것이다 캔이 적도 언저리에 도착할 즈음 지문은 모두 지워지고 눈은 다시 은하수의 이슬이 되겠다 한때 내가 너의 지문이었듯
-'한때 내가 너의 지문이었듯' 전문
하찮게 버려진 맥주캔 하나에서 세계의 운행 질서를 읽어내고,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의 비밀을 캐내려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어머니가 이주빈에게 남겨준 드물고 귀한 '시인의 성정'이 아닐지.
'맥주캔'에서 '우주'로, 다시 '남십자성'과 '바다'로, 끝내는 '적도 언저리'의 '지워진 지문'으로 남을 게 번연한 인간의 삶이지만, 그 하찮은 삶을 뜨겁게 쓸어안는 자세. 그런 자세를 가진 사람을 우리는 '시인'이라 불러왔다. 고래로부터 지금까지.
그 사람이 쓰는 문장이 곧 그 사람
첫 시집을 독자들 앞에 내보인 이주빈. 그가 책의 마지막에 심어둔 한 편의 시가 세상의 처음이자 존재의 끝을 감지한 자의 예언처럼 우리 가슴을 술렁이게 만든다.
쉬이 눈에 띄지 않았기에 그 소중함을 잊고 살았던 작고 고운 꽃의 이름이 호명된다.
세상 흔한 것은
기대 사는 모든 생명들의 밥
나는 그렇게 흔해서
이름 머리에 '개'를 붙이고 살지만
나는 그렇게 흔해서
재수에 옴붙을 '망'자를 이름으로 쓰지만
여지껏 나는 못난 것들의
여우같은 마누라
철없는 아버지였으니
부디 힘 세고
돈 많은 자들은
너희들의 꽃을 찾아 떠나라
나는 개망초
오로지 가난한 자들에게만 보이고
오로지 힘없는 자들에게만 사랑이 되는
흔해서 따순,
당신의 밥
- '개망초꽃' 전문
'흔하기에' 어떤 무엇보다 귀하고 소중한 것들에 대한 지극한 애정. 이주빈의 시는 이주빈을 닮았다. '그 사람이 쓰는 문장이 곧 그 사람'이란 선현들의 말을 거듭 되새김질 할 이유도 없다. 이주빈의 시는 곧 이주빈이다.
허위허위 세파를 헤치며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이상향'을 찾아가는 이들에게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바다와 섬, 그리움으로 켜켜이 쌓아올린 무너지지 않을 미려한 성채로 다가온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집 <내 고향 흑산도 푸르다 지쳐 검은 섬>에 실린 발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