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돌아간다고 누구나 시인이 되진 않는다. 고향의 아름다움은 떠난 자에게 언제나 짙은 그리움이 되어 가슴 속을 맴돌지만, 다시 돌아가면 그 그리움을 덮고도 남을 엄혹한 현실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리움을 잃지 않았기에 시를 쓸 수 있었고, 고향을 노래할 수 있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마주한 현실이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시인에겐 아직도 시어로 삭힐 만한 그리움이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시집 <내 고향 흑산도 푸르다 지쳐 검은 섬>(어른의시간, 2024)을 앞에 놓고 지도 앱을 열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흑산도가 어디쯤 있는지 찾아보았다. 목포 앞바다 어디쯤 있다고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위치를 머릿속에 넣고 있진 않았다.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육지를~" 가수 이미자가 부른 '흑산도 아가씨'의 가사처럼 흑산도는 뭍에서 멀었다. 목포에서 직선거리로 90킬로미터쯤 되니 예나 지금이나 육지로 오가는 일이 쉽진 않을 것이다.
시인 이주빈은 흑산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푸른 바다를 동무 삼아 놀던 소년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섬을 떠나야 했다. 그때부터 시인의 그리움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유년의 기억은 여린 뼛속에 새겨지는 것이라 지울 수가 없다. 소년의 그리움 속 고향은 언제나 멀고 먼 존재였을 것이다.
내 고향 흑산도
하도 멀어 섬 천 개는
징검다리 삼아 건너야 갈 수 있는 섬
-'내 고향은 흑산도' 중 일부
못 견디게 그리운 고향, 흑산도를 노래하다
섬을 떠나 뭍에 올라 도시로 떠도는 삶이었어도 시인은 언젠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었을 테다. 섬에 있을 때는 섬을 떠나는 꿈을 꾸었겠지만 뭍으로 나와 도시를 떠돌다 보면 언젠가 다시 돌아갈 날만 헤아리게 된다. 섬을 떠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돌아가는 건 그것보다 더 지난한 일이다. 시인도 분명 그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섬에 갇혔던 외로움보다 그 섬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할까 걱정하는 두려움이 더 커지는 때가 있었으리라. 흑산도로 돌아가는 배를 타던 날 뭍에서 이룬 모든 걸 두고 가도 자유롭고 행복하다 느끼지 않았을까. 목포행 무궁화호의 종착역에서 내려, 다시 배를 갈아타고 내린 선착장엔 "늙은 섬 하나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리움이 일어 파도가 될 때마다" 그는 시를 썼다.
"언제나 꿈속인 듯 까르르 웃던 검은 살의 동무들, 그리고 삐비 순처럼 여리고, 동백처럼 단단했던 어머니"가 있던 흑산도로 시인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건 그들을 잊지 못해서였다. 어느 자리에 있든 그 얼굴들이 밤바다 위에 잔잔히 비추는 달처럼 무시로 시인의 가슴에 떠올랐을 게 분명하다.
달이 바다에 은하수 뿌리면
이슬처럼 단 물결
사르륵 사르륵
짝지밭 몽돌 핥아주는 소리
아가 넌 커서 돛단배 되렴
'별밤' 중 일부
표류하는 별과 섬과 고래의 동무가 되다
시인은 나의 선배였다. 한때 한 일터에서 일했다. 멀리 고향을 두고 서울살이하는 섬놈, 촌놈의 성정은 메마르고 퍽퍽해졌다. 선배나 나나 그저 그 도시를 벗어날 생각만 가득했던 것 같다. 몸은 여기에 있으나 마음은 멀리 흑산도 짝지밭(몽돌로 이뤄진 해변)으로 파도에 실어 보내는 선배나 하동 북천 황치산을 넘는 바람 속에 놓아둔 나나 언젠가 돌아갈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선배는 꿈을 이뤘으나 나는 그 언저리쯤에서 멈추고 말았다.
고향으로 돌아간 선배는 언제부턴가 고래를 좇는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넘어온 포경선들은 흑산 앞바다에서 고래를 잡았다. 40년 동안 우리 바다에서 1만 마리가 넘는 고래가 잡혀 일본으로 실려 갔다. 흑산 앞바다에서 잡힌 고래가 1446마리였다. 흑산의 어부들은 고래를 자신을 지켜주는 영물로 여겼지만 일제에겐 단지 빼앗아 갈 자원일 뿐이었다.
일제는 1916년 대흑산도 포경 근거지를 설치하고 잡은 고래들을 해체하여 식용품은 시모노세키로, 비료로 쓸 것은 효고로 보냈다. 고래 해체 작업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에겐 현금 대신 고래고기를 지급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받은 고래고기를 비금도, 도초도, 목포까지 가서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선배는 시를 쓰고 '고래의 섬' 흑산도의 희미해져 가는 옛이야기를 복원하는 작업을 함께하고 있었다.
안개 자욱한 바다
형처 없는 빛깔로
더엉 덩덩 노래하는
표류하는 별과 섬과 고래의 동무
'무종의 노래' 중 일부
흑산도는 홍어의 섬 이전에 고래의 섬
강제윤 섬연구소 소장은 "흑산도는 홍어의 섬 이전에 고래의 섬이었다"며 "지금은 잃어버린 신화와 일상이 공존하던 시대, 한없이 의롭고 애잔하고 따뜻했던 섬의 이야기들이 그의 시 속에서 섬의 신원을 확인해 줄 지문처럼 되살아난다"고 이주빈의 시를 평했다.
외롭고 쓸쓸한 시어 사이사이 고향의 안온함이 바다 안개처럼 스민다. 고향을 떠나 방랑하다 다시 어머니 품으로 돌아간 이가 느끼는 감정이리라. 이제 그는 더는 고향을 떠나지 않고 착하고 순진한 섬사람들과 그곳에서 '깃들고 스미어' 살 듯하다. 그리고 멈추지 않고 섬과 바다를 노래하는 시를 짓고 흑산 바다를 헤엄치는 고래의 숨소리를 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