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발장같은 범죄자에게 사회는 냉대와 무관심을 줬죠. 정치인, 학자, 언론인도 말로만 떠들지 다 허위예요. 그런데 시민들이 따뜻한 손길을 내민다면 그들의 삶에 의미를 주지 않겠어요?"
시종일관 차분했던 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돈이 없어 노역을 해야 하는 생계형 범죄자들을 말할 땐 탄식도 이어졌다. 홍세화 이사장(학습 협동조합 '가장자리')의 말이다. 지난 2012년 10월 진보신당 대표직을 사퇴한 후 지식인의 길을 택한 그가 이번엔 장발장은행장으로 돌아왔다.
지난달 25일 문을 연 장발장은행(
www.jeanvaljeanbank.com)은 단순 벌금형을 선고받았지만 돈이 없어 노역할 처지에 내몰린 사람들에게 벌금을 빌려준다. 무담보 무이자다. 은행장이자 공동대표인 그는 대출심사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 지난 19일 서울 합정동에 있는 '가장자리'에서 만난 홍 대표 "한정된 재원에 비해 신청자가 폭주하는 상황"이라며 "다 어려운 처지의 분들인데 몇 명만을 선택해야 하는 게 너무 곤혹스럽다"며 운을 뗐다.
홍 대표는 장발장은행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을 면면이 들여다보고 있다. 그는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대개 범법의 경계에 있다"며 "삶속에서 부딪히면 우리도 질시하고 피하려는 존재들"이라고 했다.
"시민 400명이 8000만 원 보내...대출심사 시 청소년 우선 고려"- 지금까지 몇 명에게 대출을 해줬나. 성금은 얼마나 모였는지."시민 400여명이 8000만 원을 보내왔다. 결혼기념일을 기념한다며 후원한 분도 있고 500만 원 거금을 보낸 분도 있다. 누구나 알 만한 분도 있지만 대부분 시민들이 소액을 보내주고 계신다. 이렇게 모인 돈으로 지금까지 34명에게 6200만 원이 대출된 상태다."
대출심사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연을 묻자 "1만6000원 훔쳤다고 70만 원 벌금형을 받은 19살짜리 소년이 있다"고 답했다. 나이어린 청소년들이 눈에 밟힌다는 것이다. 홍 대표는 "소년소녀가장이나 한 부모 가정의 아이들을 눈여겨본다"며 "사회에 첫 발을 딛는 청소년들이 돈이 없다는 이유로 인생의 첫 시작이 꼬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날 4차 대출자를 심사했다는 홍 대표는 "딱한 분들이 너무 많다"며 마음이 복잡한 듯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가족이나 친지 등 주변에서 100만 원조차도 빌릴 수 없는 장발장들이 신청을 많이 했다"며 "사회관계망 자체가 굉장히 열악한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나라에 돈이 없어 노역을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고 말했다. 이어 "시민단체 인권연대가 벌인 '43199'캠페인을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해 우연히 관심을 갖게 된 것"이라고 소개했다.
"총액벌금제 아닌 소득에 따라 벌금액 차등 둔 일수벌금제 택해야"'43199' 캠페인은 벌금형을 받고 돈이 없어서 교도소에 가는 사람이 2009년 한해동안 4만3199명이라는 통계에서 시작됐다. 그는 "그들은 벌금이 없어서 그야말로 몸으로 때우면서 자유를 빼앗기고 있는 것"이라며 "가난한 사람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미 엄청난 불평등을 겪고 있는데, 징벌에 있어서 또 다시 불평등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의 생각이다.
"징벌은 당하는 사람이 징벌을 느껴야 해요. 근데 돈 있는 사람들은 아무런 징벌을 느끼지 않죠. 흔히 경제인들이 3년 징역 5년 집행유예를 받고, 대부분 집행유예로 풀려납니다. 그러나 징역형보다 가벼운 벌금형을 받은 가난한 사람들은 자유를 빼앗기고 징역을 살아야 해요. 이건 모순이에요."그는 형벌에 따라 똑같은 벌금을 내는 '총액벌금제'부터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소득수준이 반영되지 않은 벌금제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홍 대표는 "가난한 사람들이 수백만 원 이하의 소액 벌금도 내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결국 이들은 노역을 선택하거나 벌금 미납의 경우, 심지어 지명수배가 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는 유럽 국가들이 택하는 '일수벌금제'를 소개했다. 형벌에 따라 벌금액이 아닌 일정한 기간을 정하는 것이다. 재벌과 가난한 사람이 같은 범죄를 저지른다면 일수는 같지만 벌금은 달라지게 된다. 이어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 대부분의 유럽 국가는 일수벌금제를 택하고 있어요. 형벌에 따라 일정한 기간(일수)를 정하는 거죠. 이를 사람의 소득과 재산에 연계시켜서 1유로부터 5000유로까지 차등을 두는 방식입니다. 핀란드 노키아라는 재벌회사의 부회장이 오토바이 과속으로 우리 돈 1억 3000만 원을 벌금으로 낸 유명한 일화가 있죠. 소득에 따라 벌금에 차등을 둬야하는 이유인 거죠."홍 대표는 벌금 분납방식 도입과 사회봉사활동 도입 등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 현행법은 벌금을 30일 안에 완납해야 하는데 분납도 가능해야 한다"며 "노역이 제대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사회봉사 대체 등 다양한 방법도 모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같은 제도 개선을 위한 국회 토론회를 다음달에 열 계획이다.
'하나은행' 참여 뜻 알려..."대출금 못 갚아도 연연하지 않아"
홍 대표는 이어 장발장은행의 미래가 밝지 않다는 전망도 내놓았다. 초반보다 시들해진 성금 후원 때문이다. 대출신청자는 계속 느는데 반해 성금 후원은 이에 못 미친다는 얘기다. 이에 그는 시민의 참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장발장은행이 출범 1개월이 다 되어간다. 평가를 해보자면."이 상태로면 활성화되기 어렵다는 생각도 든다. 처음 반짝 1~2주간 성금이 완만한 상승세를 보였는데 지금은 소강상태다. 벌금을 못 내 노역을 갈 처지에 놓인 사람이 1년 4만명 정도다. 평균 벌금이 200만 원이라고 따지면 1년에 대출금 800억 원이 필요하다. 장발장은행이 이들의 1~2%정도밖에 도와드리지 못할 것 같다. 모두 다 빌려줄 수 없고 역시 법제도 개선이 가장 중요하다."
- 장발장은행이 순항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장발장은행의 주체는 장발장이 아니라 참여하는 시민이다. 우선 소액이라도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그 자체로 큰 의미이기 때문이다. 시민이 5만 원을 후원하면, 벌금형 받은 사람의 24시간 자유를 구해준다는 의미로 생각해 달라."
장발장은행의 취지에 공감한 시중은행도 손을 내밀었다. 이곳 후원 공식계좌인 하나은행쪽에서 연락을 해온 것. 홍 대표는 "휴면계좌를 통해 장발장은행을 돕는 방식의 얘기가 나오고 있다"며 "구체적으로 결정하는 데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귀띔했다.
기자와 1시간여 이야기를 나눈 홍 대표는 대출자들이 만에 하나 대출금을 갚지 않아도 크게 연연하지 않을 것이라고 두 번 강조했다. 사회의 무관심과 냉대만 받던 소외계층들이 시민들의 따뜻한 손길로 삶의 변화를 갖는다면, 그 자체로도 상환이 되고도 남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대출자들에게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분들을 또 도와줄 수 있게 꼭 갚아 달라'고 말씀드려요. 근데 말과 달리 처지가 안 되어서 못 갚는 경우가 나오겠죠. 그런데 국가, 사회에서 냉대만 받은 그들이 시민의 따뜻한 손길을 느꼈다면,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걸 느낀 걸 거예요. 그 자체로 이미 상환의 의미를 가진 거 아닐까요." 덧붙이는 글 | 장발장은행에 관심있는 분은 전화 02-2273-9004으로 문의하면 된다(관련 문의는 오전 10시에서 12시, 오후 2시에서 4시에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