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입담은 여전했다. 에둘러 가지 않는 직설적 화법이나, '문제가 뭐냐면'으로 풀어가는 이야기 방식도 그대로였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
지난해 12월 초 '오랜만에 뵙고 싶다'는 기자에게, "특별히 아픈 곳은 없지만, 사람이 촉이 떨어져 영 맥을 못 추고 있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던 그였다. 스스로 밝힌 이유는 '과로'였다.
그리고 12월 26일 오후 서울 강남구의 한 호텔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2시간 가까운 인터뷰 내내 그는 한결같았다. 솔직하고, 쉬운 대중언어로 다소 복잡한 경제현상을 풀어냈고, 껄끄러운 질문에도 피해 가는 법이 없었다.
인터뷰 말미 일부 보수언론과 주류 학자들의 장 교수에 대한 비판을 전하자, "그런 시각 자체에 문제가 있다"거나 "무조건 다수 의견이 맞고 소수가 틀렸다고 한다면, 학문의 발전이 없다", "그런 공격은 상식에 맞지도 않는다"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굳이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전하지 않더라도, 장 교수는 더이상 '소수'가 아니었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무분별한 영미식 시장근본주의에 대한 자성과 비판 속에, 그와 같은 학자들은 '주류'(?)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장 교수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유시장주의자들의 허구를 벗겨 내는데 목소리를 높여왔다. 특히 그와 맨 처음 마주 앉았던 2003년 5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부동산거품, 폭탄 안고 뛰고있는 한국경제")에선 "우리나라를 비롯한 신자유주의적 체제를 갖고 있는 나라들은 투기적 버블로 인해 금융위기를 겪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었다. 물론 그의 전망은 2006년 부동산 폭등과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에서 그대로 현실이 됐다.
이후 그와 10여 차례 넘게 진행된 인터뷰와 좌담 내용이 고스란히 인터넷을 통해 독자들에게 알려지는 동안, '주류경제학의 대항마'로서 그의 입지는 더욱 굳어졌다. 최근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그같은 경제학자는 국가적 자산"이라며 장 교수를 치켜세울 정도였다.
특히 지난 2007년 <나쁜사마리안들>이후, 작년 8월 영국에서 낸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이하 '23가지')는 다시 한번 자유시장주의의 한계와 모순을 낱낱이 보여주면서, 국제적인 주목을 끌고 있다. 국내에선 출간된 지 2달여 만에 이미 25만여 권이 팔려나가면서, 말그대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
- 이번 책 제목을 직접 잡았나.
"그렇다."
- '23'가지라는 숫자를 두고 여러 말들이 나오는 것 같다.
"(웃으면서) 심지어 나보고 농구팬 아니냐고 물어온다. 미 프로농구에서 유명한 마이클 조든의 유니폼 숫자가 '23'이라면서… 난 사실 야구팬이다. 또 서양에선 숫자로 어떤 현상을 해석하는 뉴멀로지라는 학문이 있는데, 거기에서 '5와 23'에 모든 중요한 현상이 숨어 있다고 한다. 거기에서 유추한 것 아니냐는 등… 또 독일의 '풀어야 할 수학문제 23가지'라는 것도 있다고 하고…"
그는 "처음에 책을 기획한 미국의 출판사 편집자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0가지'라고 했었다"면서 "이후 '20'이라는 숫자가 너무 뻔해서, 다른 숫자를 고르다가 23가지가 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 23가지의 소주제에 나온 문구들이 다소 도발적이다."일종의 충격요법인데… 우리들이 그동안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것들에서 완전히 틀렸거나, 맞더라도 일부만 해당하는 것들이 상당하다. 도발적인 문제 제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좀 더 이해를 쉽게 하려고 했다."
- <23가지>가 나온 후 여러 나라를 다니며 강연하는데, 23가지 가운데 가장 많은 질문을 받은 것은 무엇인가."독자층마다 약간씩 다르지만, 아무래도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라는 구절이다. 네덜란드의 한 케이블 방송에 나가 좌담을 하는데, 상대쪽 교수가 "세탁기 부분에 대해선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내가 그래서 "그건 추운 겨울에 냇가에 나가 얼음 깨뜨려 가면서 빨래를 해보지 않아서 그럴 것"이라고 했더니 '알겠다'라며 수긍하더라."
실제로 영국의 주요일간지인 <가디언>도 장 교수와의 인터뷰 기사를 실으면서, 그가 세탁기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을 함께 싣기도 했다. 장 교수의 말이다.
"인터넷이 나에겐 매우 중요하지요. 다만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지금 일어나는 일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사실 최소한 현재까지 인터넷 혁명으로 사회 경제적 영향은 세탁기 등보다 크지 않아요."
그는 자신의 책에서 "가전제품은 집안 일의 노동시간을 대폭 줄여서,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을 촉진했고, 가사 노동자 같은 직업을 거의 사라지게 했다"면서 "옛것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되고, 새것을 과대평가해서도 안 된다"고 적었다.
- '자유시장 정책으로 부자 된 나라가 없다'라고 쓰셨는데,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끄덕이며) 미국의 19세기 관세가 높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같은 높은 관세나 보호무역은 놔두고 광활한 국토·풍부한 자원·질 높은 이민이 성장 조건이었다고 한다. 미국 딱 한 나라만 그랬다면… 타임머신 타고 돌아갈 수도 없고…."
그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그의 말을 옮겨본다.
"우리나라는 60∼70년대 평균 관세율이 40%정도였어요. 땅도 넓지 않고, 천연자원도 없고, 이민을 받기는 커녕, 우수한 사람들이 이민을 나갔는데. 대만·벨기에 등 수십여 개 나라들이 (과거 보호무역주의 속에서) 이렇게 해서 경제발전을 했는데… 물론 미국·영국도 보호무역을 했고…."- 자유시장주의자들은 예외적인 나라 아니냐고."(고개를 흔들며) 그런식으로 예외라고 하면, 원래 이론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신빙성 있는 반박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
미소금융이 빈곤퇴치의 주무기? 환상 버려야물론 그 역시 자본주의 자체를 반대하거나, 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자본주의가 수많은 문제점과 제약을 가지고 있지만,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좋은 경제시스템"이라고 말했다. 대신 그의 비판의 날은 최근 30년 동안 세계를 지배해 온 특정 자본주의시스템에 있다. 자유시장만이 자본주의를 유일하게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동안 많은 나라가 자유시장 정책을 추진했지만 결과는 처참했어요. 성장은 둔화됐고, 불평등과 불안정만 심화되면서 부작용만 커졌지요. 부자나라인 미국은 70년대 이후 임금은 제자리인데다 노동시간은 늘었지만 빚을 내가며 소비 붐을 일으켜 이것을 숨겨왔지요. 개발도상국들은 더 심하죠. 아프리카 국가들의 생활수준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본격적인 자유화를 거부해 온 중국 등이 급속한 성장을 했지요."그는 자유시장 이론가들의 '진실'이라고 팔아온 여러 사실들이 허술한 추측과 왜곡된 시야에 기초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 노벨평화상까지 탔던 마이크로크레디트(소액 신용대출)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판적인데. "미소금융이라는 것이 가난한 사람에게 낮은 이자로 돈을 빌려줘서 재기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것이 정부 지원 등을 받게 되면 어느 정도 낮게 이자를 책정해서 하다가, 이 자체가 시장이 커지고 '정부 보조 받는 것이 옳지 않다'는 식으로 가 버렸다. 노벨상을 탔던 방글라데시 그라민 은행도 90년대 들면서 연이자율이 40%까지 올랐다."
- 그 정도면 결코 낮은 것이 아닌데."멕시코나 인도 등도 이런 유사한 금융을 하는데, 어떤 곳은 연 이율이 100%가 넘는다. 이것은 고리대금업이다. 이런 식으로 돈을 빌려다 사업을 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나중에는 급전마련의 도구가 됐고 다시 빚더미에 올라 앉고…."
장 교수는 "우스갯소리로 캄보디아도 미소금융이 퍼져있는데, 수도인 프놈펜에 가면 길에 국수 파는 사람이 국수 먹는 사람보다 많다고 할 정도"라며 "기술도 없고, 교육도 못 받은 사람들이 돈을 가져다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다 보니, 실제 마이크로크레디트의 효과가 별로 없다"고 덧붙였다.
- 우리나라에서도 현재 미소금융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하고 있다."대부분 미소금융이 돈만 빌려주면 끝이다. 결국, 다 같은 사업을 해서 과당경쟁으로 서로 제 살 깎아 먹기로 끝나기 일쑤다. 단지 돈만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더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도록 기술지원 등이 있어야 한다."
"복지국가가 무슨 대단한 혁명도 아니고... 박근혜 만난 적 없다"
그의 거침없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약속했던 시간을 넘기는 것이 다반사다. 올해 정치나 경제 등에서 핵심 이슈인 '복지' 문제를 물었다. 장 교수는 그동안 여러 인터뷰를 통해 유럽식 보편적 복지에 방점을 두어 왔다.
- 아시다시피 새해에도 '복지' 문제를 둘러싸고 많은 말이 오고 갈 것 같다."먼저 잘사는 것에 대한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다 같이 잘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잘사는 것이고, 경제 성장을 위해서라도 복지문제를 잘 해결해야 한다."
- 하지만 일부에선 여전히 '복지 포퓰리즘'이라는 식으로 보고 있는데."(목소리를 높이며) 한국에선 무슨 복지를 하려면, 돈이 남아서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결코 아니다. 정말 경제발전하면서, 잘살아 보려고 한다면, 복지가 튼튼해야 한다.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속에 고용이 불안하니까 진취적인 직업을 갖지 못하고, 유능한 자원들은 모두 고시나 의사로 몰리고… 경제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는 "복지국가를 만든다는 것이 무슨 대단한 혁명을 하는 것이 아니다"면서 "더 좋은 사회를 만들고, 역동적인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 얼마 전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복지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는데, 일부 언론에선 박 전 대표를 만났다는 보도도 있었다."(웃으면서) 잘못 낸 것이다. 난 (박 전 대표를) 만난 적이 없다. 내 얘기를 듣고 싶다면, 어떤 정당이나 인물을 가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특정 개인을 만나서 이야기해주거나, 그런 것은 하지 않는다."
- 복지 문제가 나오면 항상 거론되는 것이 '돈은 어디서 구할거냐'는 것이다."(국민이) 다 같이 세금을 더 내야 한다. 물론 돈 많은 사람은 상대적으로 좀 더 내야겠지만… 우리나라는 세금을 정부가 가져다 태워버리는 돈쯤으로 생각하는데, 좀 더 효율적으로 쓰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 증세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나 기업들도 있는데."기업들은 세금 안 내려면, 아프리카 같은 곳으로 가서 하면된다. 거기는 세금을 걷지도 못한다. 인프라가 안돼서…. 그런데 왜 그쪽으로 안 가고 스웨덴·핀란드 등 높은 세금을 내는 곳에 가서 사업하는지를 봐야 한다."
"현 남북격차 감안하면 통일세로 할 수 없다"장 교수는 "우리나라의 조세부담률이 세계 최하위권이며, 한국보다 소득의 절반도 안되는 남미 국가는 오히려 조세부담률이 높은 곳도 있다"면서 "물론 정부가 투명하게 세금을 걷고, 의료나 교육 등 국민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쓰여야 한다"고 말했다.
또 새해에 다시 불거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은 여전했다. 그는 FTA가 추진됐던 지난 2007년부터 꾸준하게 비판해 왔다(2007년 8월 30일 인터뷰
"한미FTA 반대하면, 대원군 지지자?").
특히 장 교수의 한미FTA의 반대에 대해 <동아일보> 김순덕 논설위원은 칼럼을 통해 "영국에 사는 장하준과 그의 아이들은 상관없겠지만 이 땅에 사는 우리와 우리 아이들에겐 너무나 절실한 FTA임을 모르는 모양"이라며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었다. 이에 대해 장 교수는 "서로 절실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것"이라며 "국익에 도움 되지 않으니까 반대하는 것이지, 단지 영국에 산다고 해서 그러는 것은(반대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반박했다.
또 정부가 새해 향후 남북관계에 대비해 '통일세'를 추진하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그의 말을 잠깐 옮겨본다.
"독일은 아직도 구 동독에 주는 보조금이 GDP의 5%라고 해요. 동서독은 생활수준 차이가 3배에서 5배 정도였지만, 남북한 20배 차이가 나잖아요. 우리가 북한 생활 수준을 어느 정도 비슷하게 하려면 아마 GDP의 25% 정도까지 지원해야 돼요. 국민소득 25%를 북한에 보조금 주고 살 수 있어요? 단지 통일세 정도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나라를 운영할 수가 없을텐데… 그렇다고 말은 통일했다고 하면서, 철조망 쳐놓고, 북한 주민 여권 가지고 들어오게 하는 것도… 그건 통일이 아니죠."이날 예정된 시간은 1시간 30분. 하지만 역시나 2시간 가까이 이야기가 이어졌다. 매번 그와의 인터뷰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그는 솔직하고 정직한 경제학자였다. 8년 전 첫 만남에서나, 지금에서나.
86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왔다. 당시 대학 동기들이 미국으로 유학갈 때, 그는 영국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가 둥지를 튼 곳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이곳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지난 90년 10월 만 27세의 나이로 한국인 최초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됐다.
80년대 후반 미국식 개발경제학에서 벗어나 영국에서 공부한 것도 남달랐지만, 그는 영국에서도 주류경제학이 아닌 '제도경제학'이라는 독특한 분야를 전공했다. 주로 경제모델과 계량화에 치우친 미국식과는 달리, 제도의 변화를 중심으로 경제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을 설명하려는 새로운 경제학이다.
지난 2002년 영국과 미국 등 선진국들의 강력한 보호무역 정책을 꼬집으면서, 그들의 위선적인 세계화를 고발한 <사다리 걷어차기>를 출간했다. 이어 2003년엔 신고전파 경제학에 대안을 제시한 경제학자에게 주어지는 '뮈르달상'을 한국인 가운데 처음으로 받았다. 2005년에 경제학의 지평을 넓힌 학자에게 수여하는 '레온티예프상'을 최연소로 받았다. 국내 경제학자 가운데 이들 상을 받은 사람은 장 교수가 유일하다.
특히 중남미의 반미 성향 좌파 지도자인 라파엘 코레아 에콰도르 대통령은 자신이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을 때, 장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고 소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장 교수는 <개혁의 덫><쾌도난마 한국경제><국가의 역할><다시 발전을 요구한다> 등 다수의 책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모색해왔다. 2007년 출간한 <나쁜 사마리아인>은 세계 12개국의 언어로 번역되면서 국제적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 국내에선 2008년 국방부에서 '불온서적'으로 지정되면서, 오히려 뒤늦게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작년 8월 말 영국에서 나오자마자 주요 언론으로부터 집중조명을 받았고, 국내선 11월 출간 이후 2달 만에 25만여 부가 팔려나가면서 서점가에 '장하준 신드롬'까지 일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