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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교하에서 온 노파를 조용히 돌려보낸 태종은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황희, 이조판서(吏曹判書) 박은, 지신사(知申事) 유사눌을 긴급히 들라 명했다. 긴급호출을 받고 달려온 신하들은 경악했다. 붉게 충혈된 눈, 흐트러진 자세. 모두가 처음 보는 태종의 모습이었다. 격정을 감추지 못한 태종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분노에 떨리고 있었다.

"원윤 이비(李裶)의 유모로부터 기막힌 얘기를 들었다. 천지간에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원윤 이비가 태어났을 때 병약한 산모와 핏덩어리 어린것을 죽도록 내버려 둔 민씨의 음참(陰慘)하고 교활한 죄를 갖추 써서 왕지를 내리고자 한다.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민씨는 원경왕후 정비를 이르는 말이다. 태종은 노파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한숨과 탄식을 섞어가며 좌정한 신하들에게 전했다.

"신하는 임금의 장수(長壽)와 다남(多男)을 축원하는데 왕자가 태어난 날에 그러한 일이 있었다니 하늘이 두려울 따름입니다. 비록 전하께서 왕지를 내리지 않더라도 신들이 이미 들었으니 어찌 잠자코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다시 상량하여 전지를 내리겠다. 경들은 각각 집으로 돌아가라."

분노와 격정에 휩싸인 태종은 도저히 수습이 되지 않았다. 가슴이 뛰고 눈물이 흘러 정사를 살필 수 없었다. 오후 정사를 전폐한 태종은 중궁전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밤이 깊어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처마 밑에 떨고 있었던 핏덩이가 눈앞에 어른거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이튿날. 태종은 경승부윤(敬承府尹) 변계량을 불렀다.

"경은 내가 하는 말을 정확히 듣고 춘추관(春秋館)에 왕지(王旨)를 내리도록 하라."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내 핏줄을 죽이려 한 일당을 찾아내어 응징하라

"내가 임오년에 민씨의 가비(家婢) 김씨를 가까이하여 임신하게 되었다. 배가 불러오자 민씨 옆에 있을 수 없게 된 김씨가 나가서 밖에 거(居)하고 있었는데 민씨가 행랑방에 불러들여 계집종 삼덕과 함께 있게 하였다. 그 해 12월에 산달이 되어 산모가 배가 아프기 시작하니 종 삼덕이 민씨에게 고하자 민씨가 문 바깥 다듬잇돌 옆에 내다 두게 하였으니 죽게 하고자 한 것이다.

사내종 화상이 불쌍히 여겨 담벼락에 서까래 두어 개를 걸치고 거적으로 덮어서 겨우 바람과 해를 가렸다. 진시에 아들을 낳았는데 지금의 원윤(元尹) 이비(李裶)다. 그날 민씨가 계집종 소장과 금대를 시켜 산모와 아이를 끌고 숭교리 궁노 벌개의 집 앞 토담집에 옮겨 두고 화상이 가져온 이부자리를 빼앗아 갔다. 다행히 종 한상좌란 자가 추위에 떨고 있는 산모를 불쌍히 여겨 마의(馬衣)를 덮어주어 7일이 지나도 죽지 않았다.

민씨가 산모의 아비를 불러 김씨와 어린것을 소에 실어 교하 김씨의 집으로 보냈다. 산모와 어린것이 추위에 옮겨다니느라 병을 얻었으나 천만다행으로 죽지는 않았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과인은 그때에 알지 못하였으나 며칠 전 교하에서 온 노파로부터 듣고 처음 알았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민씨가 핏덩어리에게 하는 짓이 이와 같이 극악하였다.

지금 가만히 생각하면 참으로 측은하다. 핏덩어리(赤子)를 모두 불쌍히 여기는데 민가(閔家)가 음참(陰慘)하고 교활하여 여러 방법으로 꾀를 내어 사지(死地)에 두고자 하였으니 종지를 제거하고자 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종지(宗支)란 종중에서 종파(宗派)와 지파(支派)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서 이비는 서자이므로 지파다. 즉 아무리 비천한 몸에서 태어났어도 임금의 피를 받아 태어났으므로 왕자라는 뜻이다.

"비록 핏덩어리가 미약함에도 하늘이 무심하지 않아 보존하고 도와서 온전하게 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어찌 간사하고 음흉한 무리로 하여금 그 악한 짓을 이루게 하겠느냐? 이것이 실로 여러 민가의 음흉한 일이다. 내가 만일 말하지 않는다면 사필(史筆)을 잡은 자가 어찌 알겠는가? 사책(史冊)에 상세히 써서 후세에 밝게 보여 외척으로 하여금 경계할 바를 알게 하라."

당대의 문장가 변계량의 붓끝에서 왕지가 완성되었다. 변계량은 태종 이방원에 의하여 참살된 변중량의 동생이다. 포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대제학에 오른 문인이다.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는 도맡아 작성했으며 태종 사후 헌릉에 세운 태종 비문을 지은 명문장가다.

소용돌이치는 조정에서 부딪치는 세력

왕지가 조정에 내려지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정비(靜妃)의 교활함에 경악하는 신하가 있는가 하면 피바람이 불어오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신하도 있었다. 왕지를 받아든 지신사 유사눌이 이숙번과 대책을 협의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즉시 대간에 이문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두 사람의 눈동자는 희색으로 빛났다. 주변을 의식하여 말은 없었지만 교감이 통하고 있었다. 이숙번은 73년생, 유사눌은 75년생. 서로 대화가 통했다. 사석에서는 유사눌이 형님처럼 깍듯이 모셨다. 47년생 하륜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뭔가가 잘 통했다. 왕지를 가지고 지신사 유사눌이 대간으로 향하려 할 때 하륜이 제지하고 나섰다.

"아직은 시기상조인 것 같소. 추이를 지켜보아 이문해도 늦지 않을 것 같소."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는 거요? 왕지를 지체시켰을 때 돌아오는 책임을 하공이 지시겠다는 말씀이오?"

이숙번이 치고 나왔다. 이숙번의 언사는 험악했다. 당장이라도 하륜에게 책임추궁을 할 기세였다. 두 사람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노려보는 이숙번의 눈에서 강열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을 바라보는 하륜의 입가에 싸늘한 냉소가 그려졌다. 밟지 않으면 밟힌다는 위기의식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삼각편대의 불꽃 튀는 일합(一合)이 벌어진 것이다.

지금까지는 대리전 양상이었으나 편대장끼리 맞붙은 것이다. 외나무다리에서 일합이 벌어졌다. 이제는 물러설 수 없다. 어느 한쪽의 승리는 또 다른 쪽의 치명적인 패배가 기다릴 뿐이다. 양보할 수 없는 진검승부가 벌어진 것이다.

이때의 분위기가 얼마나 험악했으면 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이숙번이 위태한 말로 하륜을 공동(恐動)하니 하륜이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이숙번이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니 천하의 하륜도 어쩌지 못했다는 것이다.

저돌적 행동파와 냉혹한 승부사의 물러설 수 없는 한판 대결

하륜과 이숙번. 좌(左)하륜 우(右)숙번이라 불릴 만큼 태종의 총애를 받았고 목숨을 걸고 거사했던 혁명 동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편대를 이루어 이방원을 엄호할 때는 우군이었지만 창공 저 너머 보일 듯이 보이지 않은 차기를 향하여 돌진할 때는 제압해야 할 적이며 경쟁자다. 그 경쟁에서 2등은 필요 없다. 오직 1등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경쟁에서 아쉽게 패배한 2등을 보듬어주고 격려해주는 것이 1등의 아량이고 배려이지만 정치에서는 통하지 않은 꿈같은 얘기다. 자신에게 범접했던 2등을 철저하게 궤멸시키고 그 위에 서고 싶은 것이 정치권력이다. 악랄하게 짓밟으면 짓밟을수록 머리를 조아리며 몰려 들어와 충성을 맹세하는 새로운 군상들이 있기 때문이다.

권력의 정점에 선 자 역시, 새로운 물에서 정치를 펼치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한다. 아량을 베풀어 2등을 껴안고 가려면 거치적거린다. 때로는 발목을 잡고 태클이 들어온다. 어르고 달래고 먹을 것 입에 넣어주며 가려면 속도가 느리다. 권력의 속성이 그렇다.

하륜이 한발 물러섰다. 대회전(大會戰)을 겨냥한 작전상 후퇴였다. 하륜이 누구인가? 이방원에게 아버지를 향한 혁명의 깃발을 올리게 하여 성공시킨 무인(戊寅)혁명의 기획통이지 않은가. 하지만 무인혁명에 행동대장으로 참여했던 이숙번은 이것이 작전상 후퇴라는 것을 몰랐다. 자신의 공세가 먹혀들어갔고 하륜이 계속 밀릴 거라 생각한 것이다.

모든 전선에는 전략을 수립하는 머리가 있고 행동하는 수족이 있게 마련이다. 전술은 전략의 하위개념이다. 이숙번이 저돌적 공격형 행동파라면 하륜은 냉혹한 승부사다. 다혈질 행동파와 냉철한 승부사의 물러설 수 없는 한판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태그:#이방원, #하륜, #이숙번, #변계량, #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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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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