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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일부터 짧게는 사흘, 길게는 십여일이나 되는 단기방학. 가족체험을 할 수 없는 맞벌이 가정에겐 '불행한 방학'일 뿐입니다.
 1일부터 짧게는 사흘, 길게는 십여일이나 되는 단기방학. 가족체험을 할 수 없는 맞벌이 가정에겐 '불행한 방학'일 뿐입니다.
ⓒ 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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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단기방학'을 알리는 가정통신문을 가지고 왔습니다. 연초부터 단기방학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지만, 적극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할 길이 없어 그냥 하루 이틀 시간을 보내다 당장 낼 모레로 다가왔습니다.

학교에서 보내온 가정통신문에는 5월 1~3일까지 사흘 동안 그리고 9월에는 추석연휴 다음날을 단기방학으로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참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5월 2일(금), 3일(토)은 고사하고, 1일 노동절에도 출근해야하는 저희 부부는 당장 초등학교에 다니는 작은 아이의 점심밥부터 걱정입니다. 

학교에서 보내온 가정통신문에는 "부모님과 함께 가정에서 마련한 행복한 프로그램에 따를 수 있게 되었다"고 적혀있더군요. 그렇지만, 맞벌이 하는 가정 아이들 대부분은 부모님이 직장에 나간 후에 하루 종일 방치되어 지내는 '불행한 방학'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루 종일 TV를 보고 있거나 컴퓨터 게임으로 시간을 때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저희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상황이 나은 편입니다. 어떤 학교는 5월 1일부터 12일 부처님 오신 날까지 쭉 이어서 쉴 수 있도록 단기방학을 정한 학교도 있다고 하더군요. 거기에 비하면 훨씬 사정이 나은 편이기는 합니다.

짧게는 사흘, 길게는 열흘이나 되는 단기방학

이런 하소연을 하면 그럼, 여름 방학이나 겨울 방학은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기간이 길기는 하지만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은 이미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어서 아이들을 돌보는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차라리 한 달 이상 쉬는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의 경우에는 아예 학원을 보내거나 이런 저런 사회교육기관에서 운영하는 방학프로그램에 보낼 수도 있고, 방학 동안 아이들을 돌봐줄 수 있는 파견보육사를 부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짧게는 3일 길게는 7~8일씩 이어지는 5월 단기방학은 속수무책입니다.

이제 막 직장생활을 시작한지 두 달이 되어가는 동료는 초등학교 1학년 딸아이와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이 있습니다. 유치원은 단기방학을 하지 않는데, 초등학교만 단기방학을 하기 때문에 아이들을 맡기는 일이 더 어렵다고 하소연을 하더군요.

큰 아이만 시골 시댁에 맡기려고 했지만, 막상 아이가 혼자서 할머니한테 맡겨지는 것이 싫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겨우 달래고 달래 작은 아이까지 함께 유치원을 쉬게 하고 시골에 맡겼다가 단기방학을 마칠 때 데려오기로 하였답니다. 그래도 이 동료는 사정이 나은 편입니다. 가까운 시골에 아이들을 돌봐줄 수 있는 할머니라도 계시기 때문에요.

그렇지만, 이런 조건도 안 되는 가정들은 어떻게 할까요? 벌써 몇 년 전 일인지 기억이 분명치 않습니다만, 가수 정태춘 음반에 이런 사연이 담긴 노래가 있습니다. 엄마, 아빠가 새벽부터 일을 나가느라 점심 밥상을 차려 놓고 밖에서 문을 잠갔는데, 하필 불이 나서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은 남매 이야기였죠. 엄마, 아빠는 아이들이 집 밖으로 나가 아무데나 놀러 다니는 것이 불안하여 문을 잠그고 일을 나갔다고 했지요.

십년 쯤 전 일이기는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아이들이 마음 놓고 밖에 나가 놀기에는 그때에 비하여 더 위험한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바라기는 이번 단기방학 기간 동안에 이런 불행한 일이 생기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가족체험 할 수 없으면 '특별한' 가족?

아마 단기방학을 반대하는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조처였는지 학교에서 보내 준 가정통신문에는 "단기방학 기간 동안 학교를 개방하여 휴무 프로그램"을 진행하겠다며 원하는 가정에서는 신청서를 작성해서 보내달라고 되어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요일에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하겠다는 계획은 없었습니다. 그냥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일단 학교에 모아놓고 도서관에서 지내게 하든, 비디오를 틀어주든 해서 시간을 때우겠다는 계획으로 느껴지더군요.

30일자 <한겨레> 신문에 나온 대구 초등학생 성폭력 사건 기사를 보니 아이들끼리 집에 두는 것이 더욱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아이 혼자서, 아니면 사정이 비슷한 아이들 몇몇이 모여서 하루 종일 집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나을 듯하여 "단기방학 동안 학교에 가면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부모 마음과 달리 아이는 싫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아이는 '방학'이라고 이름 붙은 날 '학교'에 가야한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모양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라도 마찬가지이겠습니다. 엄마, 아빠가 모두 쉴 수 있는 친구들은 특별한 연휴를 맞아 해외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놀이동산에도 간다고 해서 부럽기만한데, 가족여행은 고사하고 엄마, 아빠는 일터로 가야하니 그냥 학교에나 가라는 이야기가 얼마나 싫을까요?

단기방학을 하면서 '가족체험'을 하라고 하는데, 부모는 모두 직장에 나가는데 도대체 누구와 체험을 떠나라는 말일까요? 이번 단기방학 동안 교육과학기술부의 지침처럼 체험여행을 할 수 있는 가족이 얼마나 될까요?

학교에서 보내온 가정통신문에는 "특별한 사정으로 부모님께서 아동과 함께 할 수 없는 가정"을 위해서 학교를 개방한다고 씌어있더군요. 글쎄요? 이번 단기방학에 아이들과 함께 보낼 수 없는 가정이 특별(?)한 가정일까요? 아니면, 아이들과 함께 가족체험을 떠날 수 있는 가정이 특별(?)할까요? 제가 보기엔 아무래도 후자 쪽이 더 특별한 능력을 가진 부모들이라고 생각되는군요.

가족체험 위해서라면, 체험학습 신청하면 될 것을

오는 9월에는 추석연휴에 묶어서 또 한 번 단기방학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5월과 9월에 있는 이 대책없는 단기방학은 교사들을 위한 방학이지, 아이들을 위한 방학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가족체험'을 떠나고 싶은 가족들은 이미 시행하고 있는 '체험학습 신청'을 하면 결석 처리를 하지 않고 얼마든지 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제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아이들이나 부모들이 간절하게 요청한 일도 아닌데 단기방학을 만든 이유가 '가족체험 활동'이라는 것은 참으로 석연치 않은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보적인 교원단체들 조차 이렇게 문제 많은 '단기방학'에 대하여 적극적인 의사표시를 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구요.

제가 사는 인근시에서는 '나 홀로 학생들'을 위하여 자치단체가 나서서 복지관과 연계한 위탁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시장에서 음식을 구입할 수 있는 식품권도 나누어준다고 합니다. 교육과학기술부 장관께 꼭 묻고 싶습니다. 정말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하면서 꼭 단기방학을 해야만 할까요? 진정 누구를 위한 단기방학인가요?


#단기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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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YMCA 사무총장으로 일하며 대안교육, 주민자치, 시민운동, 소비자운동, 자연의학, 공동체 운동에 관심 많음.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하며 2월 22일상(2007), 뉴스게릴라상(2008)수상, 시민기자 명예의 숲 으뜸상(2009. 10), 시민기자 명예의 숲 오름상(2013..2)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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