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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전야의 날씨가 항상 이러했다. 비소식에도 꺼지지 않는 촛불을 바라보는 마음이 장마 전야의 더위만큼이나 후덥지근하다.

 

세계가 한 지붕인 21세기에서 우리 사회가 과연 이렇게 독단으로 흘러도 되는 것일까. 자리이타와 상생이념이 함께 사는 사람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이듯이 각 나라가 가진 장점과 단점을 트레이드하고 보완하는 것이 한 지붕 글로벌 시대의 기본개념일 것이다.

 

나라 살림을 풍요롭게 하려는 mb정권의 정책 기조에 농사꾼과 재벌, 앞선 사람과 뒤쳐진 사람을 두루 헤아리는 원모심려(遠謀深慮)가 모자라긴 했지만 FTA로 진로를 설정한 것은 옳았다고 생각한다.

 

쇠고기를 양보하고 수출하는 기업인들의 주머니를 불려 국물효과(trickle-down effect)에 의한 일자리 창출과 부의 고른 분배를 시도한 정부에 적어도 어떠한 도덕적 결함은 보이지 않는다.

 

언론단체와 동료회원들의 서운한 시선을 무릅쓰고 촛불시위 참여 제의를 끝까지 거절한 것은 나름대로의 확고한 시국관 때문이었다. 조선일보가 대통령과 가깝다고 해서 무조건 대통령의 정책을 반대하고 핏대를 올리는 것은 아무래도 좀 우습다.

 

좌우 양쪽진영에 적들만 늘어난데도 어쩔 수 없다. 내 의지나 양심의 거울에 아닌 것은 끝까지 아니다. 민주세력이라고 해서 무조건 정부정책에 반대하고 기득권 세력이라고 해서 앞뒤 안 가리고 정권찬양으로 일관하는 것은 간과 쓸개를 빼놓고 사는 것이다.

 

지국장으로서 조선일보의 위선과 야만에 대하여 적당히 타협하고 굴신(屈身)을 했더라면 지금의 내 신세가 훨씬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싫다. 그렇게 사는 것이 나는 정말 싫다. 항상 힘 가진 놈과는 적대적 관계로 비틀어지는 것이 요상한 내 팔자이기는 하지만 내안의 나까지 속여가면서 세상을 살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현 정권의 지도력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욕심이 앞선 현 정권의 헛발질에 만족해할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 이다. 대통령의 정책노선에서 박정희를 닮고 싶어하는 설익은 조급심을 자주 읽는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느낌이리라. 지금은 1970년대가 아니다. 시대정신의 변증법적 굴레를 수없이 거쳐 온 21세기이다. 능률을 제고한답시고 예전처럼 국민들을 가르치고 계몽하려 든다면 성숙한 시대의 역풍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 돌아온 김종훈 본부장이 아직 쇠고기 재협상결과를 꺼내놓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번 협상비준 때보다는 최소한 한 가지라도 더 얻은 게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대통령이 캠프 데이비드에 놓고 온 소중한 국민건강을 촛불과 시대정신이 다시 챙긴 셈이다.

 

평생 신문 밥을 먹어온 사람으로서 이쯤에서 조중동에 충고 하나 하고 싶다. 사회의 목탁이랍시고 권력과 기업에 관한 정보력을 무기삼아 무관의 제왕노릇을 하던 이중인격의 신문지 언론들은 이제 옛날 정육점 쇠고기 포장지의 본 모습으로 돌아가라.

 

권력을 경계하고 사회정의를 감시하는 기능은 이제 인터넷을 공유한 모든 국민들의 몫임이 분명해졌다. 대통령이 챙기지 못한 부분을 따끔하게 지적하지 않고 분명치 않은 미국산쇠고기 안전에 대한 계몽선전에 몰두하는 신문이 무슨 언론이고 신문이냐. 

 

대통령의 정신적 멘토라는 최시중씨를 통해 방송 장악력을 높이려한다는 소식을 들으며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조중동으로 아젠다 설정을 주도하게 하고 방송으로 하여금 국민다수를 계몽 설득하려 한다면 청와대는 지금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제는 '아'하고 정직하지 못한 언론이 속내를 드러내면 초등학생까지도 속에든 간살을 읽어버린다.

 

풍선효과라는 것이 있다. 한쪽을 누르면 반드시 다른 쪽에서 부풀어지게 마련이다. 방송언론을 장악하고 통제하려는 것은 비인가 인터넷통신을 무제한 양산할 뿐이다. 지금은 디지털시대이다.  '신속한 보도' '정확한 해설' '공정한 논평'이 신문의 사명이었다면 지금 종이신문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지구 끝에서 생성된 정보를 이제는 1초 이내에 전 세계가 공유하는 시대이다. 신속한 보도라는 말은 이제 신문뿐 아니라 방송매체와도 거리가 멀다. 해설과 논평을 언론에 의지하던 시절은 못 배우고 꽉 막혔던 시절의 이야기다. 

 

언론, 특히 신문이라는 상품은 독자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문화상품이었다. 조선일보의 판매가 급감하고 있는 것은 가려운 사람을 긁어주지 않고 엄한 놈만 '빨아주었기' 때문이다. 최시중씨를 통하여 방송의 속성마저 조선일보로 만든다면 안티조선방송이 아마 열 이상 나올 것이다. 

 

돈 줄인 광고가 급감하자 작은 주부단체에조차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조선일보의 행태를 보면서 나는 확신했다.

 

'조선일보 넌 이제 아주 맛이 갔구나.'

 

야바위가 호구 사냥하듯이 길목에서 백화점 상품권에 현금까지 돌리게 하고서는 나중에 협박과 공갈로 억지 구독을 시키는 신문(남 의정부-미디어오늘 보도) 그게 무슨 신문이고 언론인고? 

 

조선일보판매국이 지국장에게 할당한 확장 부수를 채우지 못하면 지대계산서에 벌금이 추가되어 청구되고 그러한 제도나 정책에 대하여 이의라도 달라치면 곧바로 지국계약해지가 통보된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대한민국의 사법제도가 그러한 파렴치행위를 고발해도 오불관언으로 뒷짐만 지고 있는 것이다. 아직 다 끝난 것은 아니지만 쪽박차고 쫓겨난 조선일보지국장들이 파렴치한 본사의 행패에 대해서 법적소송을 했으나 이제껏 모두가 '깨졌다'.

 

소비자 권익운동을 하는 주부단체에 내용증명을 보내고 조선일보 광고중단 운동을 계속 획책하면 법적 대응을 하겠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며 협박하는 것은 그 주부단체가 아마도 조선일보 판매노동자들처럼 돈 없고 빽 없고 힘없는 사람들로 업수이 보였던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법조계는 우리가 꽉 잡고 있으니 너희들 까불지마 하는 것이던가.

 

                                                            2008.6.21              

 

                                          전국신문노동자협회 조의식

덧붙이는 글 | 본 기사의 원문은 전국신문노동자협회(www.damasa,or,kr)에 실려 있습니다. 


#조선일보#소고기협상#전국신문노동자협회#달마사#조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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