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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천포는 90년까지만 해도 국내 쥐치포 생산량의 70-80%를 차지하던 곳이었다.
 삼천포는 90년까지만 해도 국내 쥐치포 생산량의 70-80%를 차지하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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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삼천포에 들어서면 비린내가 진하게 풍겼습니다. 곳곳에서 쥐치를 말렸거든요."

유철수(35)씨의 고향은 지금은 사천시 소속이 된 삼천포다. 정확한 주소는 경남 고성군 하이면이지만 생활권이 삼천포였다. 학교도 모두 삼천포였고, 친척도 모두 삼천포에 살고 있었다. 고성읍에 나간 것은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서였다. 그 뒤에도 고성읍에 갈 일은 없었다. 고향을 삼천포라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철수씨는 삼천포를 '쥐포'로 기억한다. 어린 시절 흔하게 먹었던 간식, 시장에 나가면 여기저기서 쥐치를 말리던 풍경이 눈에 선하다. 그는 당시 삼천포에 있었던 쥐포공장 수를 정확히 기억했다.

삼천포제일중학교 2학년이던 시절, KBS <퀴즈동서남북>팀이 학교에 왔다. 그 때 삼천포에 쥐포공장이 가장 많다는 퀴즈가 나왔다. 문제는 갯수 맞추기. 답은 80여개였다.

쥐포 판매 등 수산업이 호황을 누리면서 시내엔 돈이 넘쳤다. 철수씨 아버지는 잠수부였다. 주로 잡았던 것은 키조개. 지역에선 '게이지'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선금으로 몇 백만원씩 들고 왔다. 돈다발이 방에 굴러다녔다. 

게다가 1983~84년엔 삼천포화력발전소가 들어섰다. 국내 최초 유연탄전소식 발전소인데다 화력발전소로선 국내 최대였다. 일자리가 넘치니 외지에서 사람이 많이 들어왔다. 사람과 돈이 넘치고 도시는 북적거렸다. 철수씨가 기억하는 1970~80년대 삼천포다.

90년대 들어 삼천포 경제는 급내리막길을 걷는다. 91년 들어 쥐치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 해 잡힌 쥐치는 2822톤. 전 해의 30분의1에 불과했다. 80년대엔 10만톤까지 잡혔었다. 삼천포 지역경제를 떠받들던 산업은 수산업이었고, 수산업 중심은 쥐치가공업이었다. 수온변화가 한 이유라고 알려졌지만, 철수씨는 무분별한 남획도 한 이유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천포는 항구다. 바다에선 수많은 배들이 고기를 잡아 올렸다.
 삼천포는 항구다. 바다에선 수많은 배들이 고기를 잡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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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린내 가득하고, 사람 넘치던 삼천포는 그렇게 긴 잠에 빠져들었다. 1956년 사천군에서 떨어져 나와 시로 승격한 삼천포는 1995년 사천군과 통합하면서 시 명칭을 사천에 빼앗겼다. 꿈은 짧았다.

그대 찾어 내가 왔네 비 내리는 삼천포
돛단배도 돌아가는 섬 구비 구비마다
연락선 갈매기도 이별 슬퍼 우는데
비린내 나던 부두 비린내 나던 사랑
항구가 운다 포구가 운다
- 배호 '비린내 나는 부두'

남일대 해수욕장, 노산공원, 선풍기 수리점

 삼천포는 1995년 사천군과 통합하면서 삼천시라는 이름을 잃었다. 그러나 지금도 시내 곳곳엔 삼천포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삼천포는 1995년 사천군과 통합하면서 삼천시라는 이름을 잃었다. 그러나 지금도 시내 곳곳엔 삼천포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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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인치 스트라이다 자전거는 고성 상족암군립공원을 떠나 삼천포를 향해 달린다. 1010번 지방도다. 가끔씩 승용차가 지나갈 뿐 길은 한가하다. 상족암을 지난 뒤엔 길도 무난하다. 삼천포 입구에서 77번 국도와 합쳐진다.

시내로 들어서기 전 남일대해수욕장을 지나게 된다. 무척 아담해 백사장이 한 눈에 들어온다. 신라시대 학자 '남해 첫 번째'라고 해서 남일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백사장 크기엔 실망할지 모르겠다. 바닷가에서 보이는 코끼리바위, 거북바위가 눈길을 붙든다.

한 때 번성했던 도시는 그 시절 그대로 나이를 먹었다. 낮은 집, 좁은 길들이 많다. 한 어르신이 열심히 가전제품을 고친다. 가게엔 '선풍기 수리'라고 써 있다. 난로, 선풍기, 중고제품을 두루 고치는 각종 수리 전문점도 눈에 띈다.

쉽게 사고 쉽게 버리는 시대, 고쳐 쓰는 것을 '미덕'이라고 하기보다는 '궁색'이라고 느끼는 시대다. 흥청거리는 도시에서 사는 내 눈에도 어쩔 수 없이 궁색이 느껴진다.

 세월이 두껍게 내려앉은 집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세월이 두껍게 내려앉은 집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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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에서 전망이 가장 좋은 곳은 노산공원이다. 여기서 바다 쪽으로 보이는 곳이 팔포바다다. 원래는 바다였으나 매립되면서 유흥가로 바뀌었다. 삼천포가 고향인 시인 고 박재삼이 노산공원에 올라 팔포앞바다를 숱하게 바라봤을 터다. 시인은 97년 삼천포를 오롯이 담은 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팔포 앞바다엔 목섬이 떠 있다. 철수씨는 어린 시절 썰물이 날 때 동무들과 목섬까지 종종 건너다닌 때를 기억한다. 물 때를 맞추지 못해 밀물 때 건너오다 물에 빠져죽는 사고가 종종 일어났다. 어른들은 바빴고, 아이들은 자기 나름대로 놀거리를 찾았다.

 불가사리. 낙엽을 닮았다.
 불가사리. 낙엽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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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닷가 어시장에선 상인들이 생선을 말린다. 주택가 한쪽 담 밑엔 낙엽이 피었다. 불가사리다. 패류의 해적생물이라고 불리지만 목숨이 끊어진 그것에선 어쩔 수 없는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시내를 가로질러 오르막길을 오른다. 창선·삼천포대교를 건너기 위해서다. 정확히는 다리 네 개다. 모개섬-초양섬-늑도-남해 창선을 잇는 징검다리다. 초양대교, 늑도대교까지 포함한다.

수산물산업이 무너진 삼천포시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야 했다. 그 중 하나가 관광산업이다. 2003년 4월 28일 개통한 창선·삼천포대교는 2006년 건설교통부가 뽑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 대상에 뽑혔다.

 창선·삼천포대교. 2006년 한국의 아름다운 길 대상에 뽑혔다.
 창선·삼천포대교. 2006년 한국의 아름다운 길 대상에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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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우리나라에서 섬이 가장 많은 전라남도가 추진 중인 다리 박물관 계획이다. 1964개 섬이 있는 전남은 섬과 섬을 연결하는 다리를 만드는데 잔뜩 공을 들이는 중이다. 현재 추진 중이거나 계획 중인 다리는 68개. 이미 있는 다리와 더하면 103개 다리가 만들어진다. 관광객은 볼거리가 더욱 많아지고, 지자체는 지역을 상품화하는 데 좀 더 골머리를 썩혀야 할 모양이다.

다리를 건너 늑도에 들어갔다. 고려 때는 이름이 구라도(九羅島)였다. 말 굴레처럼 생겼다 해서 굴레섬이라고 불리다 굴레 늑(勒)자를 써서 지금 이름이 됐다.

섬에 있는 등대는 작품이다. 하나는 하얗고, 하나는 빨갛다. 하나는 유럽 성에서 본 듯한 모양이다.

 늑도등대. 하나는 하얗고, 하나는 빨갛다.
 늑도등대. 하나는 하얗고, 하나는 빨갛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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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늑도를 지나면 남해다. 삼천포와 남해 경계에 섰다. 짧지만 화려했던 삼천포는 많은 생각할 바를 던진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쥐포산업은 갑자기 무너졌다. 잘 나갈 때 대비해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진리다.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삼천포는 모두가 가난했지만 따뜻한 도시였다. 시인 백석은 '삼천포'라는 시에서 해방 이전 삼천포를 행복하게 묘사했다.

지난 여름 할머니를 영영 보내기 위해 삼천포를 찾았었다. 문턱을 넘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신 할머니를 삼천포 앞바다 사량도에 모시기 위해서였다. 그 때 유채꽃이 참 흐드러졌다. 유채꽃을 떠올리며 남해로 건너간다.

졸레졸레 도야지새끼들이 간다
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담복 따사로운 거리다

잿더미에 까치 오르고 아이 오르고 아지랑이 오르고

해바라기하기 좋을 볏곡간 마당에
볏짚같이 누우런 사람들이 둘러서서
어느 눈 오신 날 눈을 치고 생긴 듯한 말다툼 소리도 누우러니

소는 기르매 지고 조은다

아, 모도들 따사로히 가난하니
- 백석 삼천포

덧붙이는 글 | 지난 10월 다녀왔습니다.



#삼천포#쥐치#쥐포#국도여행#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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