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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레아촛불미디어센터'와 남일당 사잇길로 경찰들이 걸어오고 있다. 지난 7월 모습.
 용산 '레아촛불미디어센터'와 남일당 사잇길로 경찰들이 걸어오고 있다. 지난 7월 모습.
ⓒ 권박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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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오후 2시 서울중앙지방법원 417호 대법정, 3개월 만에 재개된 '용산 재판'. 이충연(37) 용산4구역철거민대책위원장은 오랜만에 아내 정영신씨를 만났다. 어머니 전재숙씨도 만났다. 법정에서 상봉한 가족은 반갑게 미소를 주고받았다.

이 가족의 차림새는 참사가 일어난 지난 1월 20일과 달라진 게 없었다. 전재숙씨와 정영신씨는 여전히 검은 상복을 입고 있었고, 이충연 위원장도 똑같이 목발을 짚었다. 계절이 바뀌면서 상복 옷감이 얇아진 것이 유일한 변화다.

재판이 정상적으로 진행됐다면, 이 위원장은 이미 한 달 전에 자유의 몸이 됐어야 한다. 현행법상 구속기한은 6개월을 넘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구속기한은 2개월이나 남았다. 변호인단이 검찰 수사기록 3000쪽 공개를 요구하며 재판을 기피한 기간을 구속일수에 산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변호인들이 변론을 거부하고 법정에서 퇴장하면서 이날 재판은 파행으로 끝났다. 이충연 위원장은 "이제부터는 재판에서 우리 얘기를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면서 적극적인 법적 대응 의지를 보였다. 그동안 불공정한 재판을 거부해왔지만, 검찰과 법원이 끝까지 수사기록을 공개하지 않는 상황에서 대응을 하지 않는 것도 문제라는 것이다.

<오마이뉴스>는 구치소에서 7개월을 보내고 다시 법정에 서는 이충연 위원장을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이 위원장은 25일과 27일 범대위를 통해 답변을 보냈다.

아버지는 영안실에, 아들은 구치소에... 7개월째 풀리지 않는 용산의 비극

1월 31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용산 철거민 살인진압 희생자 제2차 범국민추모대회'가 경찰의 원천봉쇄로 인해 부근 한국관광공사앞에서 개최된 가운데, 고 이상림씨의 영정사진을 든 유가족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1월 31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용산 철거민 살인진압 희생자 제2차 범국민추모대회'가 경찰의 원천봉쇄로 인해 부근 한국관광공사앞에서 개최된 가운데, 고 이상림씨의 영정사진을 든 유가족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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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구치소 수번 29' 이충연. 그는 용산 참사의 비극 한가운데 서 있다.

그의 아버지 고 이상림씨는 참사 당일(1월 20일) 남일당에서 불길 속에 생을 마쳤고, 철거민대책위원장이었던 자신은 망루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28일 입원 중에 체포돼 아버지 영정에 제대로 절도 못하고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상' 혐의로 구속됐다. 검찰 수사대로라면 그는 건물에 불을 질러 아버지를 태워 죽인 셈이다.

이충연 위원장은 "참사 당일 경찰특공대에게 우리들은 이 나라 국민이 아니었다, 체제 전복을 노리는 빨갱이였고 죽여도 상관없는 테러리스트였다"면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아버지는 망루 4층에 함께 있었습니다. 새벽녘이라 어두웠고 최루탄 연기가 올라와서 앞을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불길이 터지듯 치솟아 올라와서 몸에 불이 붙은 듯해서 얼굴을 감싸고 뒤돌아 창문으로 뛰어내렸고 얼마 전까지 아버지는 계단 입구 쪽에 계신 것까지는 봤습니다.

저는 (남일당 건물 바로 뒤에 있는) 저희 가게 쪽으로 떨어져 옥상 벽과 망루와의 간격이 1m 정도 벌어진 틈 사이에서 정신을 잃고 있었는데 그쪽으론 떨어진 동지들이 없더라구요. 망루 안에 불길이 치솟아서 모두들 밖으로 뛰어내렸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참사 당일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가 이틀 뒤 일반병실에서 뉴스를 통해 아버지의 죽음을 접한 이 위원장은 아직 충격과 자책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당시 "아버지가 죽긴 왜 죽냐, 다시 한번 찾아봐라"며 통곡했던 막내아들은 지금도 "망루에서 떨어지기 전 상황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돌아가신 열사 분들을 살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구치소에 갇혀 TV를 통해 가족과 이웃들이 연행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처지다.

이충연 위원장은 "그런 뉴스를 접하면 잠을 이루기 힘들다, 상복을 입고 슬피 우는 어머니와 아내 곁에 있어주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면서 "특히 조중동을 비롯한 대다수 언론에서 왜곡보도를 하고 있어서 너무 힘들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직접 겪은 검찰 수사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검찰이 미리 짜놓은 각본에 따라 '철거민 유죄 경찰 무죄'라는 짜맞추기 수사를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용역업체 직원과 경찰의 합동 진압을 경찰이 부인하자 이에 대해 수사조차 하지 않다가, PD수첩이 공동 진압장면을 보여주자 어쩔 수 없이 수사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법원 요청에도 검찰은 용역 사무실 압수수색 내용과 경찰 지휘부 조사 내용이 담긴 수사기록 3000쪽을 완강히 안 내놓고 있다"면서 "어떻게 이런 모습이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겠냐, 권력에 기생한 간신배일 뿐이다"고 검찰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경제 살리겠다니 그런가 했는데... 속고 나서 후회하면 뭐하나"

'도심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힌 이충연 위원장은 재개발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호프집 사장님이었다.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도 "경제를 살리고 국민들 잘살게 해주겠다니 그런가 보다 했다"면서 "속고 나서 후회하면 뭐 하냐"고 말했다.

남일당 건물 바로 뒤에 있던 레아 호프가 이충연씨 부부와 고 이상림씨 부부가 함께 장사를 하던 삶의 터전이다. 이 위원장은 "부모님이 저희 형제들을 다 키우신 장소이고, 오랫동안 정이 든 곳"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고 이상림씨 부부는 27년 동안 '한강갈비' 가게를 운영했고, 그리고 2006년 10월 아들과 함께 레아 호프를 열었다.

가족은 리모델링 비용을 아끼기 위해 낡은 가게를 직접 수리했다. 예비 신부였던 정영신씨도 팔을 걷어붙이고 페인트 붓을 잡았다. 이들이 직접 만들었던 탁자가 지금 남일당 1층 분향소에 놓여 있다.

5월 8일 오전 서울 용산구 한강로 남일당빌딩앞에서 용산철거민참사 희생자 유가족과 철거민들을 비롯해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어버이날 행사가 열렸다. 고 이상림씨 며느리이자 이충연 위원장의 아내인 정영신씨가 어머니와 시어머니에게 달아드릴 카네이션을 들고 서 있다.
 5월 8일 오전 서울 용산구 한강로 남일당빌딩앞에서 용산철거민참사 희생자 유가족과 철거민들을 비롯해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어버이날 행사가 열렸다. 고 이상림씨 며느리이자 이충연 위원장의 아내인 정영신씨가 어머니와 시어머니에게 달아드릴 카네이션을 들고 서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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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만든 호프집은 다행히 장사가 잘됐고, 이충연 위원장과 정영신씨도 미뤄왔던 결혼을 할 수 있었다. 이 위원장은 "조금 힘들게 가게를 꾸미고 장사를 해왔지만 부모님과 함께 장사하던 시간이 제일 행복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다. 2007년 4월 용산 4구역에 대한 재개발사업 인가가 떨어진 것이다. 이 위원장은 "조합 감정단이 책정한 보상금은 호프집으로 시설투자한 금액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됐다"고 주장했다. 동병상련의 세입자들은 대책위를 꾸렸고 젊은 이충연씨가 위원장이 됐다.

다행히도 참사 7개월이 지난 지금도 레아 호프는 철거되지 않았다. 지금 이곳은 젊은 활동가들이 모이는 '레아 촛불미디어센터'로 변했다.

그러나 이 위원장은 자신의 가게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다. 그저 "아름다우신 분들이 저희 가게를 더욱 빛내주시는 것 같아 가슴 뿌듯하다"고 감사의 뜻을 전할 뿐이다.

"아무리 정권이 큰 힘 가졌어도 진실은 밝혀질 것"

참사 발생 7개월이 넘도록 정부는 대화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 사회적 관심도 줄어들었다. 이제 그만 장례를 치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을까.

이충연 위원장은 "군포 연쇄살인범 사건으로 용산 참사를 덮으려고 했던 청와대의 지시가 무엇을 뜻하겠냐, 현 정권에서는 우리의 억울함이 밝혀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이 과거 군사정권보다 더 독재 같다고도 했다. 그러면서도 "아무리 (정권이) 큰 힘을 가졌어도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며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

그래도 혹시 7개월 전 그날 남일당 망루에 올라간 것을 후회한 적은 없었을까. 차가운 감방에서 수많은 고민을 거듭했을 그의 결론은 이렇다.

"지난날을 후회하진 않습니다. 힘들게 싸우시는 분들이 많은데 내 주위만 생각하며 살아온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우리 지역이 재개발되지 않았다면 이렇게 사회의 약자들이 짓밟히고 건설자본만 배불리는 모습을 평생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앞으로는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우리 같은 분들에게 귀 기울이며 살아야겠습니다."

이충연 위원장은 오는 9월 1일 다시 법정에 서야 하고, 앞으로 두 달 동안 더 구속생활을 견뎌야 한다.

이 위원장은 "아마도 꽤 오랜 시간 이곳에 있을 듯하다"면서도 "불투명한 상황이 계속 지속돼 여러 사람들에게 죄스럽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얼른 구치소에서 나가 열사 분들 꼭 명예회복시키고 추모사업도 하고 싶고, 철거민 동지들 후원회사업도 꼭 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그러나 그는 용산4구역철거민대책위원장인 동시에 신혼의 젊은 남편이다. 제일 고마운 사람은 결혼 5개월 만에 상복 차림으로 거리에 서야 했던 아내다. 부부는 지난 5월 옥중에서 첫 번째 결혼기념일을 맞았다. 이충연 위원장에게 아내와 하고 싶은 일을 물어보았다.

"뭐든 해주고 싶습니다. 함께 여행도 가고 싶고 와이프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해주고 싶습니다. 해준 게 너무 없어서 항상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항상 옆에서 힘이 되어주는 아내에게 감사하고 사랑한다 말하고 싶습니다."

지난 20일 재판 도중 변론을 거부하고 퇴장한 용산철거민 변호인단
 지난 20일 재판 도중 변론을 거부하고 퇴장한 용산철거민 변호인단
ⓒ 성스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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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이충연, #용산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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