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대웅보전에서 만난 원교 이광사와 김생

동백숲에서 바라 본 백련사
 동백숲에서 바라 본 백련사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무위사에서 백련사로 가려면 13번 국도로 타고 성전면 소재지로 나가야 한다. 이곳에서 2번 국도를 타고 강진읍으로 들어간 다음, 다시 남쪽으로 18번 국도를 타야 한다. 그러나 18번 국도를 계속 타면 해남에 이르기 때문에, 강진읍에서 2㎞쯤 간 학명리에서 좌회전해야 한다. 이 길은 강진만을 끼고 도는 지방도로 도암면 소재지로 이어진다.

우리가 찾는 백련사(白蓮寺)는 만덕리에서 우회전해 산 속으로 1㎞쯤 들어가야 한다. 백련사는 해발 408m 만덕산(萬德山) 남쪽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절 입구의 가파른 길을 올라간 다음 차를 세우고 올라온 쪽을 돌아보면 바닷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강진만 구강포다. 날씨가 좋으면 저 멀리 남해바다까지도 보일 법한데 안개가 끼어 조금 안타깝다.

백련사는 만경루(萬景樓) 1층 누대 아래 통로를 통해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1층에는 불교용품과 차를 판매하고 또 차도 마실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이 세상 사람들과 아름다운 차 인연을 맺어주는 만경다설((萬景茶說)이다. 이곳에서 파는 대표적인 차로는 반야병다, 반야차, 자하, 일지정향이 있다.

대흥사 일지암에 계시던 여연(如然)스님이 이곳 만덕사 주지로 부임한 이래 백련사에 차문화를 번창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시간만 있으면 차도 한 잔 마시며 마음을 다스려 보는 건데 시간 여유가 없다. 오늘 백련사를 거쳐 다산초당까지 가야 하기 때문이다.

대웅보전
 대웅보전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만경루를 통과해 1층 절마당에 이르니 앞으로 계단 위에 대웅보전이 우뚝하다. 첫눈에 대웅보전이라는 네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예사 글씨가 아니다. 획이 가늘고 필선이 구불구불한 걸 보니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의 글씨다. 그는 이곳 백련사와 해남 대흥사에 글씨를 남기고 있다. 그것은 그의 유배지가 해남과 강진에 가까운 진도(珍島), 신지도(薪智島)였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은 이광사가 쓴 백련사의 편액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그런데 신라의 명필인 김생을 너무 폄하해 아쉽기만 하다. 김생이 저 세상에서 이 글을 읽었다면 아마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가 쓴 백련사 제액의 글씨를 보면                                    觀其白蓮題額書
멋지게 꿈틀대는 모습이 마치 용처럼 기운차다.                    佶屈故作挐龍勢
김생은 게다 대면 헛이름만 난 꼴이라                                 金生頑朴浪得名
백성들 계약서나 써줄 만한 글씨였지.                                 堪與邨氓寫券契
경수와 위수가 함께 흐르면 청탁이 판이하고                        涇渭交流判淸濁
도척과 맹획이 함께 있으면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이 뚜렷하다. 蹠獲同門了愚慧
큰 그릇이 영영 묻혀 궁벽한 바닷가에서 죽어갔으니              大器轗軻死窮海
처량한 그의 흔적에 그 누군들 눈물 아니 흘리겠는가.            遺跡凄涼足破涕

만경루
 만경루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잠시 눈을 돌려 만경루를 쳐다보니 역시 이광사가 쓴 만경루라는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글자가 선명한 것으로 보아 옛 편액을 모사해 다시 썼음이 분명하다. 만경은 만 가지 경치라는 뜻으로,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구강포의 모습이 변화무쌍해서 그런 이름을 붙인 것 같다.

은빛 햇살 쏟아지는 구강포 앞바다
차와 동백 어우러진 천년 숲속에
온화한 부처님의 미소가 감도는 곳
백련사 법당마다 옛님 숨결 가득하네.

원교 이광사는 소론 계열의 학자였으나, 1755년 을해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로 귀양을 가게 된다. 이때부터 이광사는 유배지를 옮겨 다니는 가혹한 삶을 살게 된다. 같은 해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지가 옮겨졌고, 1762년에는 문인(門人)들에게 글과 글씨를 가르쳤다는 죄목으로 전라도 진도, 신지도로 이배된다. 그리고 1777년 유배지인 신지도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친다.

대웅보전 편액
 대웅보전 편액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만덕산 백련사 편액
 만덕산 백련사 편액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원교 이광사의 글씨와 대웅전 외관을 보고 나서 법당 안으로 들어간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한 목조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법당 안 벽에는 그림과 조각이 있다.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설법할 때, 그 가르침을 기뻐하는 무리들의 모습을 그렸다고 하는데 어두워서 잘 보이질 않는다.

그런데 법당 왼쪽으로 만덕산 백련사라는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신라시대 명필이던 김생의 글씨이다. 이것은 김생이 백련사를 직접 쓴 게 아니고 김생의 글씨를 집자해서 만들어놓은 편액이다. 어떤 연유에서 이 편액이 만들어져 걸렸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더 궁금한 것은 다산이 이 글씨를 보고 김생과 이광사를 비교해 위의 시를 썼을까 하는 점이다. 여하튼 이곳 백련사 대웅전에서 우리는 신라와 조선시대 최고 명필의 글씨를 비교해 볼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백련사는 찾을 가치가 있다.

재미있는 응진당

응진당과 코끼리
 응진당과 코끼리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대웅전에서 다시 계단을 올라가면 명부전과 응진당이 있다. 이 건물들은 1700년대에 지어진 세 칸짜리 당우로 단아한 모습이다. 그 중 응진당이 아주 재미있다. 우선 법당의 이름이 전이 아닌 당이다. 일반적으로 당은 전보다는 격이 낮은 집이다. 아마 16나한이 모셔져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

또 응진당이라는 편액 아래 벽에는 흰 코끼리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 표정이 상당히 익살스럽다. 머리를 돌려 상아를 물고 있는 모습이다. 코끼리 옆으로는 새와 꽃 등 세속적인 그림이 그려져 있다. 법당 안으로 들어가니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 8명씩 16나한상이 좌정하고 있다. 이들 16나한상은 표정이 진지해서 예술성과 해학성은 떨어진다. 응진당 옆 산신각에는 산신탱화 등이 그려져 있다.

산신각을 보고 우리는 백련사 사적비를 지나 서쪽 담 밖에 있는 동백숲(천연기념물 제151호)으로 향한다. 그런데 사적비를 보수하고 비각을 새로 짓느라 길 주변이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다. 사적비는 비닐로 씌워져 있고 비각에는 비계가 설치되어 있다. 비석을 읽어 내용을 알고 싶은데 그게 불가능하다. 자료를 통해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동백숲에서 만난 부도들

동백숲(천연기념물 제151호)
 동백숲(천연기념물 제151호)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동백숲으로 가니 초입에 안내판이 붙어 있다. 백련사 동백나무 숲은 면적이 3.12ha나 되며, 수천 그루의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고 쓰여 있다. 동백나무는 차나무과의 상록교목으로 우리나라 난ㆍ온대 지방을 대표하는 수종이란다. 이르면 11월부터 꽃이 피고, 3월말에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그래서 동백(冬柏) 또는 춘백(春柏) 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숲으로 들어가니 나무가 울창해 어둠침침하다. 바닥에는 이미 동백꽃이 떨어져 나뒹굴고 있다. 동백림 사이로 나 있는 이 길을 한 이십 분쯤 가면 다산초당이 나온다. 아암 혜장 스님과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이 산길을 오가며 유교와 불교에 대해 논의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구형 부도
 원구형 부도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이 숲에서 동백꽃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부도들이다. 모두 4기가 있는데 이름이 알려진 것은 월인당 부도 1기뿐이다. 또 부도의 예술성도 뛰어나지 않아 문화재적인 가치는 적어 보인다. 그러나 전남 유형문화재 제223호로 지정된 원구형 부도는 다른 곳에서 보지 못한 특이한 형태다.

우선 탑신이 원구형이다. 그리고 탑신의 사방에 연꽃 무늬의 연주문 띠를 돋을새김했다. 옥개석은 팔각으로 경사가 급한 편이다. 기단은 2단으로 되어 있고, 안상과 복련이 새겨져 있다. 만들어진 시기를 고려 말로 보는데, 오히려 조선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1층기단 위에 누군가가 떨어진 동백꽃을 얹어 꽃 공양을 했다. 회색의 화강암에 빨간 동백꽃이 꽤나 잘 어울린다.   

비닐에 둘러싸인 백련사 사적비에는 무슨 내용이...

백련사 사적비와 비각
 백련사 사적비와 비각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만덕사의 역사를 얘기해 주는 중요한 사료로는 『만덕사기(萬德寺記』와 다산 정약용이 쓴 『만덕사지 萬德寺誌』그리고 백련사 사적비가 있다. 그 중 사적비에 따르면 백련사는 신라 때 창건되었으며 원래 이름은 만덕사였다. 고려 때인 1211년에서 1232년에 걸쳐 원묘국사(圓妙國師: 1163-1245)와 원영스님이 중창하였으며, 1232년 4월 원묘국사가 백련결사를 조직하여 새로운 선풍을 일으켰다.

백련결사는 천태의 묘해(妙解)를 토대로, 참회행과 미타정토신앙을 실천하려는 운동이었다. 그 결과 정토신앙이 민중 속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백련결사는 보조국사의 정혜결사와 함께 불교의 진면목을 찾고자 하는 실천 중심의 개혁운동이었다. 사적비에는 보조스님과 원묘스님의 관계가 잘 나타나 있다.

백련사 사적비
 백련사 사적비
ⓒ 문화재청

관련사진보기


"원묘국사의 이름은 요세(了世)이니 원묘는 곧 시호(諡號)로 받은 것이다. 배움에 목우자(牧牛子) 보조국사(普照國師: 1158-1210)와 더불어 속으로 들어맞는 부분이 있어 정하여 불법의 친구가 되었다. 보조국사가 일찍이 '파도가 어지러우니 달이 드러나기 어렵고, 방이 깊으니 등불이 거듭 빛난다. 권하노니 그대는 마음 기량을 가다듬어, 감로수를 기울이지 말게나'라는 게송을 원묘국사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 사적비는 숙종 7년(1681)에 세워졌다. 홍문관 수찬을 지낸 조종저(趙宗著)가 글을 짓고 낭선군(朗善君)이 글씨를 쓰고 낭원군(朗原君)이 전액을 썼다. 원묘국사에 대한 이야기는 최자가 지은 원묘국사비를 통해 좀 더 자세히 전해진다. 그곳에 보면 원묘국사는 진리의 깃발을 세워 대중을 일깨우고 믿음을 불러일으킨 스님으로 쓰여 있다.

덧붙이는 글 | 차와 동백이 아름다운 만덕산 백련사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246번지
Tel: 061-432-0837
www.backryunsa.net
교통(셔틀버스): 강진 버스터미널-백련사 주차장 30분 간격



태그:#백련사, #만덕산, #원묘국사, #이광사와 김생, #동백숲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