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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효당, 충효사, 사적비 등이 모여 있는 이탁영 유적 전경. 홍술비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다.
 충효당, 충효사, 사적비 등이 모여 있는 이탁영 유적 전경. 홍술비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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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인 '탑리5층석탑', 보물인 '빙산사터5층석탑'과 '관덕리3층석탑'은 쌓은 이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정만록>은 남긴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이탁영(李濯英)이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에 '이탁영'을 넣었다. 보물을 겨레에 남긴 분이니 응당 그 이름을 빛나게 모셔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보인 탑리5층석탑, 보물인 빙산사터5층석탑과 관덕리3층석탑 앞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지만, 같은 보물인 <정만록>(880호)에는 안내판이 없다. 이렇게 문화재를 소홀하게 방치해도 되나? 이러고도 일반 국민들에게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요구할 수 있나?

하지만 그런 식으로 섣불리 흥분해서는 안 된다. 정만록(征蠻錄)은 건물이 아니라 책인 까닭에 애당초 안내판을 세울 수가 없다. <정만록>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처들어온 야만(蠻)스러운 왜적들을 정(征)벌한 전쟁 기록(錄)이다.

 사당 앞 외삼문이 보이는 풍경
 사당 앞 외삼문이 보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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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2책으로 된 이 책은 이탁영(1541∼1610)이 썼다. 하지만 이탁영이 기록을 시작한 것이 1592년이고 마친 것이 1598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책은 무려 400년 가까운 어둠의 세월을 보냈다. <정만록>은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하다가 1986년에 이르러서야 이윽고 국가 보물로 지정을 받기 때문이다.

<정만록>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무참한 혼돈만큼이나 어려운 세월을 묻힌 채 보냈다. 식민지 시대에는 압수되는 고초를 겪었고, 6·25 때에는 후손 이우영(李宇營)의 품에 안겨 울산까지 피난도 갔다. 그렇게 시달림을 겪던 중, 역시 효사재 이탁영 공의 후손으로 고향 의성에 공생병원을 설립한 이종주(李鍾周) 선생의 노력에 힘입어 1986년 10월 15일 국가 보물로 지정되는 '해피 엔딩'을 맞는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의 <정만록> 부분을 읽어본다.

조선 선조 때 경상감사의 막하 참모였던 이탁영의 일기로 건(乾)·곤(坤)의 순서를 단 2권 2책으로 되어 있다. 이탁영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찰사였던 김수의 막하로 들어가 참모로 활동했으며, 1593년에는 학봉 김성일의 막하에서 전쟁의 여러 전술을 건의하여 승리에 공헌한 바가 많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나라에서 내리는 상을 굳이 사양하였고, 후에 중추부사에 증직되었다.

이것은 1592∼1598년까지의 일기로 건(乾)권은 표지 뒷면에 임진왜란 당시 참전한 영상 이하 여러 관리들의 좌목(필자 주 : 座目= 자리의 차례를 적은 목록)이 있고, 다음에 <壬辰變生後日錄(임진변생후일록)>이라는 제목 아래에 그날그날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적고 있다. 다만 임진기사는 날마다 기록하였고, 1593년에서 1598년까지는 연월중심으로 중요한 사건만 적었다.

 충효당의 본래 건물. 유적지의 건물들 중 제일 앞에 있다.
 충효당의 본래 건물. 유적지의 건물들 중 제일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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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坤)권은 임진왜란의 시작과 하루하루의 기록, 통문 등을 기록하게 된 이유를 적고, 이어 7년 동안에 있었던 중요한 교서, 통문, 격문 등을 고스란히 싣고 있다.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시작된 날로부터 시작하여 그해 연말까지는 약 10일간 기록하지 아니한 것을 제외하면 완전하게 적혀 있다.

이 책은 임진왜란 연구의 매우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며, <征蠻錄>이라는 책이름이 선조임금이 정해준 것이라는 점에서 자료로서의 가치가 더해진다.

문화재 현장의 안내판이 아니라 홈페이지에 게재된 자료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해설이 풍부하다. 답사여행을 할 때에 관련 전문서적을 읽은 후 출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까닭을 증언해주는 듯하다. 홈페이지 게재문도 이 정도이니 전문서적의 우수성이야 두말 할 나위도 없는 일인 것이다.

임진왜란을 기록한 대표적 문화재는 유성룡의 <징비록>과 이순신의 <난중일기>이다. 각각 국보 132호와 76호이다. 임진왜란 당시 유성룡은 영의정이었고 이순신은 수군통제사였다. 각각 지금의 국무총리와 해군참모총장이라는 대단한 최고위층의 자리에 있었다.

 이탁영을 제사 지내는 충효사 외삼문 앞에 세워져 있는, 제사를 준비하는 집인 전사청 건물의 단아한 방문 모습
 이탁영을 제사 지내는 충효사 외삼문 앞에 세워져 있는, 제사를 준비하는 집인 전사청 건물의 단아한 방문 모습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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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하면 이탁영은 차원이 다르다. 그는 영리(營吏)였다. 영리는 양반 아닌 중인(中人)들이 맡는 하급 관리이다. 이는 현재도 높은 공무원에게는 '관(官)'을 붙이고 낮은 공무원에게는 '리(吏)'를 붙이는 것만 보아도 헤아려진다. 리(吏)의 순수 우리말인 '구실아치'는 관청의 벼슬아치 아래에서 일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

그런데 어째서 하급 공무원인 이탁영의 <정만록>이 국무총리가 집필한 <징비록>이나 해군참모총장이 기록한 <난중일기>에 맞먹을 만큼 중요한 책이 되었을까. 정말 궁금한 대목이다.

이탁영은 고위 관료가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특정한 파벌에 속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앞날에 도움이 되거나 손해가 될 내용을 기록에 보태거나 뺄 이유도 없었다. 그는 보고 들은 대로 '사실' 그 자체를 고스란히 적었다. 개인적 판단이나 감정 절제를 통해 적당히 에둘러 표현하는 기교도 부리지 않았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걱정 등 인간적 비애도 숨기지 않았다. 기록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완벽하게 지켜낸 것이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의 <정만록> 소개문에도 이 책이 국가 보물로 지정을 받은 근거의 일부가 명쾌하게 나타나 있다. 본문 맨 끝의 '책 이름을 선조가 정해주었다'는 대목이 바로 눈길을 끄는 부분이다.

역사적 인물과 깊은 관련이 있거나, 또는 그가 만든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면 국보나 보물 등의 문화재로 지정받는 데에 도움이 된다. 선조임금이 제목을 붙였다는 사실만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이 책은 이미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는 데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는 말이다. 선조와 주요 신하들이 한결같이 책의 가치도 몰라보는 문외한(門外漢)일 리는 없는 까닭이다.

게다가 이 책은 임진왜란 '7년 동안에 있었던 중요한 교서, 통문, 격문 등을 고스란히 싣고 있다.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시작된 날로부터 시작하여 그해 연말까지는 약 10일간 기록하지 아니한 것을 제외하면 완전하게 적'고 있다. 나라의 뿌리를 뒤흔든 사건과 관련되는 중요한 자료들을 빠짐없이 싣고 있고, 날마다 벌어진 일을 완전하게 기록했으니 보물 '대접'을 받지 않을 도리도 없는 일이다.

 사당인 충효사
 사당인 충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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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록>은 '읽어야' 하는 문화유산이다. 건물이나 탑 등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하지만 여기 <정만록>의 전문을 수록할 수는 없다. 한국국학연구원이나 의성문화원 등에서 간행한 책을 구입하거나 도서관에서 대출하여 개인적으로 읽어야겠다.

다만 <정만록>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되는 현장이 있으니, 책을 읽었거나 이탁영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으면 이제 그 곳을 답사하는 것이 순서에 맞다. 그 집은 '충효당'이다. 충효당은 의성읍 의성향교의 뒤편, 지도를 놓고 본다면 의성종합운동장의 오른쪽 도로변에 있다. 의성여중이 눈앞이다.

집 이름에 '忠'과 '孝'가 들어간 까닭은 <정만록>의 내용으로 미루어 충분히 납득이 된다. 이탁영은 살벌한 전쟁통 속에서도 늘 부모님 걱정을 했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벼슬자리를 버리고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봉양하며 일생을 보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에도 '죽어서도 부모님을 보살펴야 하니 내 무덤은 부모님 묘소를 감싸듯이 만들라'고 유언했다. 그런 그를 당시 의성사람들은 '효사재(孝思齋)'라 불렀다.      

 이탁영 사적비. 전사청 뒤쪽에 있다.
 이탁영 사적비. 전사청 뒤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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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당 건물 옆에는 '孝思齋李先生事蹟碑'가 우뚝 세워져 있다. 비석 앞면에는 '효사재'인 '이'탁영 '선생'의 '사적(事蹟)'을 기리는 '비'라는 제목이 굵고 뚜렷하다. 두 손으로 비석을 쓰다듬어보며 "훌륭한 일을 한 선조들을 잊지 않고 이처럼 문집 출간, 비석 건립 등의 사업을 벌이는 것은 정말 바람직한 '역사 살리기' 운동이야! 그럼!" 하고 되뇌어본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정만록>에서 소중한 교육적 교훈을 또 얻는다. 기록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민족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을 남길 만큼 기록에 공을 들인 문화민족이었다. 600년 동안 조선의 왕실에서 이루어진 주요 행사들을 모두 그림으로 그려 남긴 <조선 왕실 의궤(儀軌)> 역시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다른 어느 민족에게서도 볼 수 없는 놀라운 문화유산이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또한 마찬가지다.

이탁영은 전쟁터에서 날마다 일기를 썼다.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그리고 공문서 등 모든 것을 소중히 보관했다. 그의 꼼꼼한 기록과 정리는 후세 사람들이 임진왜란의 깊은 역사를 아는 데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이탁영 묘소로 가는 길을 안내해주는 돌비석이 세워져 있는 마을 입구의 풍경
 이탁영 묘소로 가는 길을 안내해주는 돌비석이 세워져 있는 마을 입구의 풍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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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발자취가 쌓여 가족사가 되고, 다시 향토사, 지역사가 된다. 각 지역의 역사 기록을 모으고 정리하면 국사가 되고, 다시 세계사, 인류사가 된다. 문자로 적지 않으면 인류의 지혜는 축적되지 않으므로 기록은 곧 미래를 살아갈 후손들의 삶을 높여주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나의 역사'가 인류 발전의 주춧돌임을 언제나 생각하면서, 쓰자. 일기를 쓰고, 체험담을 적고,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자. 그것은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이탁영은 그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준 '위인'이다.


#의성여행#정만록#이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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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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