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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기가 남아 있는 하얀 재를 똥파리의 저 까만 운동화에 확 끼얹어 버릴까. 똥파리의 너무 얌체 같은 행동에 너무 미운 마음이 넘쳐, 난 지금 용기백배다.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불기가 남아 있는 하얀 재를 똥파리의 저 까만 운동화에 확 끼얹어 버릴까. 똥파리의 너무 얌체 같은 행동에 너무 미운 마음이 넘쳐, 난 지금 용기백배다.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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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사막의 밤, 모닥불 앞에서 뒤척여 보지만 잠들긴 다 틀렸다. 다들 정말로 잠이 든 것인지 든 척하는 것인지 꼼짝을 안 한다. 나라도 저 불씨가 밤새 꺼지지 않도록 지켜야 할 판이다.

'시리아'에서 넘어온 처자와 '파리'에서 패션마케팅을 공부한다는 처자는 애벌레처럼 몸을 말고 의자에 딱 들러붙었고, 남편과 딸은 모래바닥에 깔린 양탄자 위에 침낭을 뒤집어 쓴 채 미라처럼 누웠다.

어느새 나무는 다 타들어가고 또다시 불기운이 약해지고 있다. 다들 두 세번은 나무를 날랐는데, 파리만은 꼬부라져 고개를 푹 꺾은 채 움직이지를 않는다. 에혀~ 남편에다 딸에다 딸린 가족이 있는 내가 좀 더 희생한다는 마음으로 나무를 가지러 간다.

꼼짝도 하기 싫을 정도로 추워졌지만 일어나 지퍼를 내리고 침낭을 벗고 기어 나와 30m 쯤 걸어가면 나무를 쌓아둔 곳이 나온다. 한 번에 들어올리기에는 너무 거칠고 무거운 나무들이다. 왜 아까 그 이집션이, 넉넉히 불가에 갖다 쌓아 주지 않았는지 알 것도 같다.

두툼한 나무통을 간신히 하나만 가슴에 안고 와 사그라드는 불길 위에 얹었다. 침낭을 벗은 김에 미리 나무를 좀 더 갖다 놓으면 좋으련만, 다시 불가를 벗어날 엄두가 나질 않는다. 마치 탈피한 껍질 같은 침낭 속으로 다시 쏘옥 들어가 버린다.

이제 저 나무 한 통이 다 탈 때까지 잊고 잠들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가끔씩 얼굴을 내밀고 불이 잘 타고 있는지 확인을 하고는, 다시 지퍼를 내리고 침낭을 벗고, 나무의 방향을 바꾸어 불 속으로 밀어 넣어 주어야 나무 하나를 알뜰하게 다 태울 수가 있는 것이다.
 
베드버그가 두려워 천막 안에서 자는 건 포기하고 모닥불 가에서 밤을 견디기로 했다. 불가에는 저렇게 간소한(?) 잠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남편과 딸은 침낭을 뒤집어 쓰고 미라처럼 저기에 누워서 밤을 났다.
 베드버그가 두려워 천막 안에서 자는 건 포기하고 모닥불 가에서 밤을 견디기로 했다. 불가에는 저렇게 간소한(?) 잠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남편과 딸은 침낭을 뒤집어 쓰고 미라처럼 저기에 누워서 밤을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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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에서 수다 떠는 시와 청년들

밤은 깊어지는데 청년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근처 어딘가에 있다는 핫 스프링(hot spring)으로 목욕을 하러 온 것이다. 캠프가 사막 한가운데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생각보다 마을은 가까운가 보다. 청년들은 목욕을 하고는 다시 나타나 불가에서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다 떠나가곤 한다.

무시하고 잠깐이라도 눈 좀 붙이려고 하면 또 다른 청년들이 나타나, 내가 피워 놓은 불가에서 수다를 떤다. 핫스프링에 모여든 시와 청년들의 수다가 장난이 아니다. 우물가 아줌마들 수다 저리 가라다. 모르긴 몰라도, 누가 예쁘네 누가 몸매가 죽이네 동네 처녀들 이야기겠지 별거 있으랴.

저들이 불 좀 쬔다고 해서 나무가 더 빨리 타는 것도 아닌데, 은근히 부아가 난다. 이 불편한 겨울 사막에서의 포근한 잠자리를 공식적으로 내가 포기한 것도 아닌데, 아주 대놓고 무시하듯 수다를 떨어대는 청년들이 밉살스럽다.

참다 못한 나는 뒤집어 쓴 침낭을 벗겨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는, 제발 좀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했다. 순한 시와 청년들은 그 길로 수다 뚝! 그치고 잽싸게 자리를 떠났다. 다시 조용해지고 모닥불만 화르륵 타오른다. 내가 좀 심했나? 살짝 미안해진다. 사실 그들의 공간을 침범한 건 바로 나인데 말이다.

똥파리는 어떻게 사막을 견디는가

불을 꺼뜨리면 안 된다는 막중한 사명감에 짓눌리면서도, 설풋 잠이 들었나 보다. 잠결에도, 시리아가 불을 지킨다는 것, 파리는 그새 한 번도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것을 다 느낄 수 있었다. 시리아는 일어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땔감을 들고 왔다. 그렇지, 서로 약속은 안했지만 번갈아가며 나무를 들고 오는 게 인지상정이지. 그게 사람도리, 같이 여행하는 예의지.

다시 잠은 깼고 다시 나무를 주우러 갈 때에는 욕심을 좀 부렸다. 이제 한 번에 두 개씩 옮겨야겠다는 꾀가 난다. 이러다가는 사막에서 땔감 옮기다 날밤 새게 생겼다. 먼 훗날, 남들은 사막의 별이 어떻고 밤하늘이 어떻고 추억할 때에 나는 생고생한 기억에 치를 떨게 생겼다.

나무 껍질이 너무 거칠고 따가워 안고 가는 건 무리고, 양쪽 손에 하나씩 잡고 모래 위를 질질 끌며 간신히 두 개나! 땔감을 마련했다. 불가에 다 타버리고 남은 하얀 재들이 쌓여가고 있다. 새벽 5시. 어둠아 물러가라. 태양아 빨리 떠올라라.

내가 상상한 사막의 밤은 이게 아니었는데. 순도 높은 어둠을 밝히는 별빛 아래, 망망대해 같은 모래의 바다를 항해하듯 절대고독을 느껴보고, 가끔 건조한 모래 바람이 휘몰아치는 그런 밤을 꿈꿨는데...

하지만 현실은...그 순간 파리의 까만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불가에 운동화를 가지런히 벗어 둔 파리는, 침낭자락이 모래바닥에 닿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깔끔을 떨며 의자에서 밤을 견디고 있다. 불이 꺼지지 않고 잘 타고 있는지 눈도 떠보지 않는다. 한 번도 땔감을 들고 오지도 않았다. 내 어린 딸조차 아무 말 안해도 스스로 알아서 세 번은 옮겨 왔는데 말이다. 난 적어도 열 번 쯤은 갔다 왔는데 말이다. 모닥불의 불이 사그라들수록 파리를 향한 내 미움은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저런 마음 씀씀이로 여행을 다닐 수가 있지? 저런 심보로 대체 여행에서 뭘 배우겠다는 거지?

빨간 불씨가 아직도 어글어글한 하얀 재를 확 끼얹어 저 운동화를 태워 버릴까,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아니다, 운동화 한 짝을 저 멀리에다 갖다 버리자. 그러면 깨어나 찾느라고 고생 좀 하겠지. 여차하면 깽깽이를 한 채 마을로 돌아가야 할 걸. 그 정도 벌 받아도 싸다. 정말 그래볼까 싶다. 너무 얌체 같은 행동에 너무 미운 마음이 넘쳐, 난 지금 용기백배다. 혹시라도 들키면 이렇게 쏘아붙이지 뭐.

'똥파리씨, 모닥불은 그냥 타는 게 아니야.'

그 순간, 똥파리는 내 생각을 눈치챘는지 스르륵 잠에서 깨는 시늉을 한다. 나는 잠깐 움찔했지만 상상만으로도 잠시 잠깐 미움이 잦아들었다. 똥파리는 천천히 운동화를 끌어당긴다. 화장실을 가려는 걸까? '화장실 가는 길에 나무 두 개만 가져 와요' 당당하게 요구해야지,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똥파리가 드디어 의자에서 일어섰다!

"(여유 있게)화장실 가게요?"

내가 물었다.

"(생각지도 않는다는 듯)아니요."

우띠...... 이게 아닌데.

똥파리는 허리를 오른쪽 한번 왼쪽 한번 돌리더니 고양이처럼 기지개를 켠다.

"(별 뜻 없이)잠 좀 주무셨어요?"

웬일로 똥파리가 묻는다.

"(기회가 왔다!)아니요..."

욕을 퍼붓고 싶지만 점잖게 대답한다.

"(기다렸다는 듯이 갑자기 큰 소리로)그져?!!!"

어라? 꿈쩍 않고 잘만 자던데? 그럼 자는 척했다는 건가? 더 괘씸하다. 기회는 이때다!

"(이래도 안 미안해?) 한숨도 못 잤어요, 불, 꺼질, 까봐."
"(못들은 척 딴청)......"

불 지키느라 애 쓰셨어요,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들은 척도 않고는, 밤새 내가 지켜낸 불가에 등을 들이대더니 온기를 쬔다. 요런 얌체가 있나! 아직 화륵화륵 불긋불긋한 숯덩이들을 확 끼얹어 주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겨우 하룻밤을 사막에서 지냈을 뿐인데,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판가름이 난다. 사람을 알려면 화투를 쳐봐라, 여행을 가보라는 말이 있지만, 한마디 덧붙이고 싶다. 여행도 그냥 여행이 아니라, 겨울사막에서 하룻밤을 보내 보라고.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눈치 없는 곰탱이인지, 귀 막고 코 막는 얌체인지까지도.

마침내 태양이 떠올랐다. 태양이 뜨고 안 뜨고가 이렇게 다른 것이었나. 빛은 어느 것 하나 소홀함 없이 지상의 것들을 골고루 쓰다듬는다. 아, 따뜻해라. 이제 정말 살았구나. 태양의 위대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사막의 아침이다.

사막에서 겨울 밤을 견디고 난 아침. 막판에 땔감을 끌고 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똥파리에 대한 미움만큼이나 깊게.
 사막에서 겨울 밤을 견디고 난 아침. 막판에 땔감을 끌고 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똥파리에 대한 미움만큼이나 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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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청년들의 공중 목욕탕. 어둠 속에서 목욕을 마친 청년들은 모닥불 가에 모여 실컷 수다를 떨다 사라졌다.
▲ 사막의 핫 스프링 마을 청년들의 공중 목욕탕. 어둠 속에서 목욕을 마친 청년들은 모닥불 가에 모여 실컷 수다를 떨다 사라졌다.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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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척에 두고도 너무 추워서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던 핫 스프링이 아침 햇살에 드러났다. 양말을 벗고 발을 담그니 너무 따끈하고 좋다. 아, 이럴줄 알았다면 여기서 이렇게 밤을 견딜걸. 차라리 그게 나을 걸 그랬다. 미리 알았다면 옷이라도 한 벌 챙겨와 물속에 몸을 담근 채 밤을 났다면, 조카뻘 밖에 안 되는 아이를 그렇게 원망하고 미워하지 않아도 됐을 걸.

태양이 뜨고 오래지 않아, 어제 저녁 우리를 사막에 버려두고 간 이집션 기사가 차를 몰고 나타났다. 우리는, 세수도 하지 못하고 이도 닦지 못하고 사막의 하룻밤 기억만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다시 마을로 돌아갈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 2011년 1월 2주 동안 이집트를 여행했습니다.



태그:#리비아 사막, #핫 스프링, #사막의 밤, #시와, #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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