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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은 정말 예술가만이 쓸 수 있는 걸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 책 <채링크로스 84번지>로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미국의 극작가 헬렌 한프와 영국 고서점 주인인 프랭크 도엘이 주고받은 20년간의 책 주문서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문학작품'이 되었다.

뉴욕에 거주하는 작가 헬렌은 희귀본과 중고서적을 모으는 취미가 있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책들을 1940년대의 뉴욕에서는 쉽게 구할 수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그녀는 영국 고서점 광고를 보고 자신이 구입을 원하는 책의 목록을 보낸다.

"한 권당 5달러가 넘지 않는 중고 책이라면 어느 것이라도 구매주문으로 여기고 발송해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정확하게 20일 후 영국 채링크로스 84번지로부터 답장이 도착한다.

"저희는 부인의 문제 가운데 3분의 2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중략) 청구서는 책과 함께 동봉합니다."

처음에는 딱딱하기 그지없던 형식적인 책 주문서가 서로의 안부를 묻는 편지로 발전하고 부활절과 크리스마스의 감사카드를 대신하게 된다. 점점 둘은 단순히 구매자와 판매자가 아닌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친구처럼 가까워진다.

"당신의 수많은 자상한 선물에 과연 보답할 길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중략) 머물고 싶은 한 언제까지나 쓰실 수 있는 침대가 오크필드 코트 37호에 있다는 것뿐입니다."

"거기 그러고 앉아서 몇 년 동안 남산만한 도서 목록을 발행해놓고 이제 와서 달랑 한 권 보내주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돌쇠씨?"

항상 예의를 차리고 점잖은 성격의 프랭크와는 다르게 직설적이며 유머가 넘치는 헬렌의 성격은 편지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20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자주는 아니더라도 서로의 존재를 잊지 않고 꾸준히 소식을 전하는 그들은 점차 가족과 친구 그리고 동료들에게까지 알려져 멀지만 가까운 우정을 유지한다.

무엇보다 자칫하면 딱딱하고 지루해질 수 있는 이 책이 특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편지 속에 '생활상'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부인'이라고 자신을 지칭하는 프랭크에게 헬렌은 미국에서는 '부인'이 그런 뜻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요크셔 푸딩의 요리법을 프랭크의 측근이 편지로 보내주자 헬렌은 여기서는 그런 음식이 무엇인지 설명해줘도 모를 것이라고 대답한다.

아쉽게도 그들의 우정은 1949년에 시작되어 1969년 무렵에 끝이 난다. 프랭크 도엘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걸 헬렌은 편지로 뒤늦게 전해 듣는다. 매 번 영국에 찾아가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결국 프랭크를 만나지 못했다.

그들이 편지를 통하여 20년 동안 주고받은 것은 단순한 주문서가 아니었다. 판매자와 구매자가 아닌 '책'으로 맺어진 그 이상의 우정이었기에 헬렌은 편지의 끝을 이렇게 맺는다.

"혹 채링크로스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

이처럼 내가 친구와 주고받은 편지도 몰래 감춰두고 쓰는 일기도 지금 보면 창피하기 짝이 없는 반성문도 문학작품이 될 수 있다. 아직도 의심스럽다고? 그렇다면 <채링크로스 84번지>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단언컨대 문학은 멀리 있지 않고 우리의 생활 속에 숨어 있다.


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궁리(2017)


태그:#헌책방, #고서점, #채링크로스, #영국,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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