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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체페리 마을의 아이들.
 케체페리 마을의 아이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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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준비를 어느 정도 마친 팔라 아저씨가 우리 곁으로 와서 앉았다.

"저녁 먹고 깜짝 놀랄 거야. 내가 이래 봬도 말이지, 30년 동안 포탈라 궁(역대 달라이라마가 머물던 궁)에서 달라이라마의 전용 요리사였다고. 달라이라마를 따라 싱가포르, 대만, 홍콩…. 안 가본 데가 없어."

달라이라마의 요리사가 끝이 아니다. 위대한 팔라 아저씨는 라마승인 데다가 요가, 명상, 쿵후에 능하고 약초에 박식하다. 라마승으로서 수행만 열심히 한 건 아니다. 지금 부인 이전에 두 명의 부인이 있었으며 자식도 많고 고기를 먹으며 술도 마신다. 아저씨의 말을 100% 믿는다면, 아저씨는 그야말로 산 마을의 초인이자 진정한 히피다.

팔라 아저씨가 차려준 아침식사. 팔라 아저씨는 30년간 달라이라마의 전용 요리사였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팔라 아저씨가 차려준 아침식사. 팔라 아저씨는 30년간 달라이라마의 전용 요리사였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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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 이틀 정도 묵으러 왔다가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이게 우리 집 게스트북인데, 이렇게 두꺼운 책이 두 권이나 있지. 옛날 책들은 전시 때문에 델리로 보냈어. 여기 이 페이지 비었네. 여기다가 뭐 좀 써봐."

아저씨가 안겨준 두꺼운 게스트북은 이곳을 지나쳐간 여행객들의 방명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영어, 일본어, 독일어, 이스라엘어, 프랑스어, 한국어. 다양한 언어로 알록달록 장식된 게스트북이, 팔라 아저씨에게는 무엇보다 큰 보물인 것 같다. 샹그릴라 같은 산 위의 마을이, 지금 나에게는 무엇보다 큰 보물이다.

케체페리 마을의 팔라 아저씨 집. 샹그릴라 같은 산 위의 마을이, 지금 나에게는 무엇보다 큰 보물이다.
 케체페리 마을의 팔라 아저씨 집. 샹그릴라 같은 산 위의 마을이, 지금 나에게는 무엇보다 큰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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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 아저씨 집 주위로 난 티베트 기도깃발. 길은 작은 곰파로 이어진다.
 팔라 아저씨 집 주위로 난 티베트 기도깃발. 길은 작은 곰파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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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같은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고, 팔라 아저씨의 부엌에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팔라 아저씨의 부인과 우리를 데려다 준 젊은 아들, 9살 정도 되어 보이는 왈가닥 소녀 유디가 동그랗게 모여 저녁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다. 한쪽에 지핀 장작불의 붉은빛이 그들의 얼굴을 신비롭게 비쳤다.

"들어와 앉아요. 저녁 거의 다 됐어."

오늘은 특별 만찬이다. 산속 마을의 아늑함에 푹 빠져, 네팔로 가려던 계획을 무기한 미루고 이곳에 3개월을 머물렀다는 프랑스 여행자 마크와 이탈리아 여행자 마르코의 마지막 밤이기 때문이다. 다 같이 동그랗게 모여 앉은 자리 가운데로, 산에서 난 재료로 만든 소박한 음식들이 가득 차려졌다. 특별한 밤이니만큼 시킴주도 한 잔씩 따랐다. 등산을 갔던 마크와 마르코가 식사 시간에 맞춰 돌아왔다.

"마크는 굿 보이(Good boy)야."

팔라 아저씨의 어린 딸 유디가 말했다. 한참 나이 많은 오빠한테 굿 보이라니. 산골 소녀의 까무잡잡한 얼굴 위로, 작은 두 눈이 동그랗게 떠올랐다. 마크가 좋은 오빠라는 걸 나에게 꼭 설득시키고 싶은 모양이다. 동그랗게 떠올랐던 눈이 이내 서글프게 그늘져 내렸다. 정든 오빠가 내일이면 떠난다는 게 생각났나 보다.

"마크랑 마르코는 내 아들 같은 사람들이야."

팔라 아저씨의 두 눈도 아득해졌다. 방명록을 가득 채운, 이곳을 찾았던 수많은 여행자. 그들에게 나눠준 정만큼, 그만큼 힘들었을 거다. 맞이함은 기쁘지만, 이렇게 떠나보냄이 일인 것도, 참 힘든 일일 거다.

부엌에서 저녁 준비중인 팔라 아저씨와 아들. 한쪽에 지핀 장작불의 붉은빛이 그들의 얼굴을 신비롭게 비쳤다.
 부엌에서 저녁 준비중인 팔라 아저씨와 아들. 한쪽에 지핀 장작불의 붉은빛이 그들의 얼굴을 신비롭게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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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 아저씨의 부엌. 방명록을 가득 채운, 이곳을 찾았던 수많은 여행자. 그들에게 나눠준 정만큼, 그만큼 힘들었을 거다. 맞이함은 기쁘지만, 이렇게 떠나보냄이 일인 것도, 참 힘든 일일 거다.
 팔라 아저씨의 부엌. 방명록을 가득 채운, 이곳을 찾았던 수많은 여행자. 그들에게 나눠준 정만큼, 그만큼 힘들었을 거다. 맞이함은 기쁘지만, 이렇게 떠나보냄이 일인 것도, 참 힘든 일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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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너는 시킴의 딸이지."

팔라 아저씨는 자신의 눈과 나의 눈을 번갈아가며 가리키더니 두 검지로 자신의 눈을 쪽 찢었다. 가로로 긴 눈이, 시킴 딸들의 눈과 닮았단다. 그러고 보니 팔라 아저씨도 우리 아빠와 닮은 것 같다. 작은 체구, 광대뼈가 아래위로 길게 이어진 마른 얼굴. 음식 솜씨까지 닮았다. 자신이 일궈놓은 주변을 자랑스러워 하는 것도 우리 아빠 같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빠 닮으셨어요. 잘 먹겠습니다, 아버지!"
"그래 딸. 내일 아침 식사도 아주 성대하게 차려주마. 시킴 브래드와 오믈렛 어때? 어이 아들 둘. 너희는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 하지? 그저께 먹다 남은 크래커가 어딨나. 그거나 주워 먹고 가버려!"

팔라 아저씨는 마르코와 마크가 가는 것도 안 보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밥을 같이 먹고 사는 사람들이기에 식구(食口)라 칭한다지 않나. 3개월을 매일 같이 보았다면, 3개월 동안 하루에 세 번씩 매 끼니를 같이 먹고 이야기를 나눴다면, 그게 식구지. 더스틴과 나는 식구의 마지막 밤을 위해 자리를 떠주었다. 우리가 묵을 곳은 팔라 아저씨 부엌 옆으로 난, 나무를 성겨 만든 작은 오두막집이다. 방 내부의 벽은 오래된 인도 신문으로 발라져 있었다. 투박한 오두막집의 나무 틈 사이로, 선선한 밤 공기와 따뜻한 말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팔라스 아저씨네서의 생활. 양동이에 받아준 찬물로 머리를 감는 중.
 팔라스 아저씨네서의 생활. 양동이에 받아준 찬물로 머리를 감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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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묵을 곳은 팔라 아저씨 부엌 옆으로 난, 나무를 성겨 만든 작은 오두막집이다. 방 내부의 벽은 오래된 인도 신문으로 발라져 있었다. 투박한 오두막집의 나무 틈 사이로, 선선한 밤 공기와 따뜻한 말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우리가 묵을 곳은 팔라 아저씨 부엌 옆으로 난, 나무를 성겨 만든 작은 오두막집이다. 방 내부의 벽은 오래된 인도 신문으로 발라져 있었다. 투박한 오두막집의 나무 틈 사이로, 선선한 밤 공기와 따뜻한 말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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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 30분. 언제나 아침잠이 문제였던 난데, 여행에서만큼은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아침 7시면 잠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온다. 아무리 바쁘게 살아도 충만하지 않은 하루를 아쉬워하던 서울에서의 삶이라, 그토록 밤을 지새우고 아침을 힘겨워했던 것 같다. 게으르고 단순한 여행에서의 또 다른 하루를, 시킴 브래드 4조각과 오믈렛, 감자 2알로 시작했다. 밀크티는 3잔째다. 한가롭다. 공부하라는 사람도, 돈을 벌어오라는 사람도, 그렇게 살다가 10년 후에는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저~ 저어기 나진 길로 쭉 따라가면 호수가 하나 나와. 호수가 아주 멋있어. 길도 좋고. 점심 차려주면 먹고 한 바퀴 돌고 와봐."

팔라 아저씨가 알려준 길을 따라 산책을 나섰다. 아저씨의 둘째 딸이 산다는 집을 지나, 나무가 우거진 산길을 따라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저씨의 음식이 기운을 북돋웠는지, 어제 그렇게 오래 걸었건만 다시 걷는 산길이 질리지 않는다. 아무리 걸어도 호수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에이 뭐. 안 봐도 그만이다. 산책 그 자체면 된다. 돌아가면 푸짐하고 맛있는 저녁상도 기다리고 있을 테고.

밥 먹는 야외 식탁. 아침, 점심, 저녁상을 받아먹는 소박하고 게으른 삶을, 며칠 더 음미하고 싶다.
 밥 먹는 야외 식탁. 아침, 점심, 저녁상을 받아먹는 소박하고 게으른 삶을, 며칠 더 음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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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상황이야!"

잘 가던 더스틴이 갑자기 안절부절못하며 불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뭐야. 뱀이라도 나왔어? 더스틴은 주위를 뱅뱅 돌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뭘 잃어버렸어?

"화장실! 화장실을 가야 한다고!"
"화장실? 뭐 숲인데 적당한 곳에 가서…."
"이런 숲에서 그냥 실례하면 야생 동물들에게 해롭다고 가이드북에서 읽었단 말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돌멩이로 깊은 구멍을 파서 묻어야 해…. 돌멩이, 돌멩이를 찾아야 한다고!"


이런. 우리는 적당한 돌멩이를 구하기 위해 주위를 찾아 헤맸다. 그렇게 많던 돌멩이들. 막상 찾으려고 하니 없다. 인생은 항상 이런 식이다.

"으악!"


열심히 돌아다니던 더스틴은 끝내 주먹 두 개 만한 돌을 찾아냈다. 50m 아래로 황급히 내려가 구덩이를 파기 시작하는 더스틴. 일이 급할 텐데, 지금 저걸 팔 정신이 있나? 급한 용무에도 야생동물을 지키려는 더스틴의 노력, 처절하다 못해 눈물에 겨워 못 봐주겠다.

"Ahhh! I don't know what to do! I don't know what to do! (어떡해!)"


혼이 나간 듯 광적인 표정에, 돌을 쥔 두 손으로 흙바닥을 연거푸 내려찍는 더스틴. 그 광적이고 열정적인 모습이란, 야생동물 보호가라기보단 미치광이에 더 가까워 보인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나는 절박한 더스틴을 바라보며 자지러지게 웃다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시끄러워! 웃지 말란 말이야!"


팔라 아저씨집 아랫마을의 케체페리 호수. 우리가 찾던 산 위의 호수와는 다른 호수다.
 팔라 아저씨집 아랫마을의 케체페리 호수. 우리가 찾던 산 위의 호수와는 다른 호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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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체페리 마을
 케체페리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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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호수는 보지 못하고 팔라 아저씨의 집으로 돌아왔다. 호수를 찾지 못했다는 우리의 말에, 팔라 아저씨는 그 쉬운 길을 어떻게 잃어버릴 수가 있느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어쨌든 수고한 우리를 위해, 한 시간 내로 저녁이 준비될 거라며 뜨거운 차를 한 주전자 가득 내어주시는 팔라 아저씨. 아침, 점심, 저녁상을 받아먹는 소박하고 게으른 삶을, 며칠 더 음미하고 싶다. 아늑한 팔라 아저씨의 집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나흘로 예상했던 시킴 트레킹은 계획보다 조금 더 길어질 것 같다.

아기 염소를 안고 있는 케체페리 마을의 장난꾸러기 동승들. 마을의 아기 염소들은 모두 아이들 차지다.
 아기 염소를 안고 있는 케체페리 마을의 장난꾸러기 동승들. 마을의 아기 염소들은 모두 아이들 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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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체페리 마을
 케체페리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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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시킴, #케체페리, #팔라스 홈스테이, #시킴 트레킹, #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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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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