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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의 시를 읽는 것은 아주 기초적인 차원에서 나의 독서 버릇을 반성하는 행위다. 나는 의심할 여지 없는 전통적인 독자이고, 상업적인 수준의 배신을 좋아한다. 추리소설에서 내가 예측한 범인과 실제 범인이 다른 정도? 취미에 딱 들어맞을 만큼만 나의 예지를 배반하는 맥락을 좋아한다. 그러나 시집에서 요즈음의 텍스트는 내 입장에서는 제멋대로 중에서도 최고 수준이라 내가 예지하는 고리들을 느슨하게 풀어놓는다. 지친다. 그 와중에 "철과 오크"는 오랜만에 일독을 해낸 시집이었다. 뒤에 붙은 비평까지 함께 난해한...

 주인이 죽어 주인 없는 개도 없었고 아무도 없는 정자도 없었지 공원을 뒤덮는 안개도 없었다 모든 것이 흐린 공원이었는데 모든 것이 너무나 뚜렷이 잘 보인다

 아무것도 없는 명징한 공원이었다
 배후에서 갈라지는 길이 보이지 않은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중에서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시인의 '가정'만큼은 재밌다. '없다'고 단언하는 주제에 없는 것의 예시를 전달한다. 그 공원에는 아무 것도 없었어, 라고 끝났을 말을 주인이 죽어서 주인 없는 개도 없었고 아무도 없는 정자도 없었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그 없는 것들의 이미지를 반드시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문장에서는 부정된다. 동시에 '뚜렷이 잘 보인다'. 즉 이것은 불가능한 가능성을 담지한다.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독자는 '있었을 수도 있다'까지 생각이 미칠 것이다.

 언젠가 우리는 극장에서 만날 수도 있겠지. 너는 나를 모르고 나는 너를 모르는 채. 각자의 손에 각자의 팝콘과 콜라를 들고. 이제 어두운 실내로 들어갈 것이다.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는 채. 의자를 찾아서 두리번거리지. 각자의 연인에게 보호받으며. 동공을 크게 열고, 숨을 잠깐 멈추고. 우리는 함께 영화를 볼 것이다. 우리가 함께 본 적이 있는.
                                                         -[우리가 극장에서 만난다면] 중에서

우리가 극장에서 만난다면. 이 없는 것들의 가능성은 내가 인식하지 않았으나 나와 공간을 공유했을 익명의 인간들에 대한 추억 아닌 추억으로 번진다. 가령, 어느 날 내가 <위플래쉬>를 보러 갔던 날 그 극장 안에는 총 6명이 앉아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들과 나는 만났다고도 할 수 있는 셈이다. 다만, 서로 말하지 않고 같은 영화를 같은 공간에서 보고 같은 시간에 다른 곳으로 헤어졌다. 거기서 나와 그들이 공유했을 법한 기억들만을 골라 써놓는 바람에 또다시 나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상상하고 말았다.

 수십 명의 나무꾼들은 수백 번의 도끼질을 할 수 있고 수천 그루 나무를 수만 더미 장작으로 만들 수 있고
 빛은 영원하다는 듯이 장작을 태울 수 있고
 장작은 열 개비가 적당하고 그 불이면 영원도 밝힐 수 있고
                                                          -[철과 오크] 중에서

표제작에서 재밌었던 부분도 ~할 수 있고, 라고 잇대는 부분이었다. 나무꾼들은 나무를 벨 수 있고, 나무는 장작이 될 수 있고... 그렇다. 그들에게는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실제로 실현되었는가는 확인되지 않고 작품에서 관심사도 아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에서 가장 섬세하게 디자인된 부분이 바로 가능성 자체의 '개연성 없음'이었다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없었던 것들이나 극장에서의 만남은 전혀 개연성 없고 '왜 하필 그것을 얘기하는지' 절대 이유가 없는 가능성들의 목록이다. 그리나 동시에 의미심장한 관심과 상상을 조장하는 맛있는 균형점이다. 시인은 눈앞의 풍경에서 시간축의 앞뒤를 넘나들며 말그대로 '아무렇게나' 과거와 미래를 열어놓는다.

 친구들, 안개 속에서 크고 환하며
 안개 걷히면 보이지 않는
...
 친구들, 내가 죽은 뒤에도 내 친구들이었던 친구들
 신실했고, 저마다 아껴 듣는 음악이 있었던
 내 친구들
                                                         -[밝은 성] 중에서

안개가 끼어야만 잘 보이는 친구들, 그러나 신실했고, 오히려 그렇게 흐릿했기 때문에 내가 죽은 뒤에도 내 친구일 수 있는 친구가 있을까? 이쯤 되면 속지 않는다. 이 '친구들' 역시 아마 번호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타인들일 것이다. 시인은 낯선 방식으로 타인들에게서 우정을 느끼려 애써 본다. 모든 것이 가능한 가능성의 영역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연대를 꿈꾸는 것이다. 어두운 극장에서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다만 같은 것을 보고 다시 흩어져야 하는 그런 타인들. 친구일 수 있었던, 그리고 친구가 될지도 모를 모든 인간들을 친구로 가정해보는 귀여운 온기가 느껴진다. 연대하기 어려운 오늘날 "철과 오크"는 바로 그 불가능해 보이는 연대에 목숨을 내맡긴 자, 혹은 그렇게 내맡겨진 목숨에 대해서 오래 생각한 사람의 기록이 아닐까.


철과 오크

송승언 지음, 문학과지성사(2015)


#철과 오크#현대시#송승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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