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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조선화랑 전시회를 시작으로 수묵 누드를 알리다

 조선화랑의 소원문은희전
 조선화랑의 소원문은희전
ⓒ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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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희의 수묵누드는 1987년 1월 16일부터 22일까지 대학로 바탕골미술관에서 '크로키전'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전시되었다. 이때 출품한 사람이 바탕골미술관장 박의순 등 9명의 화가였다. 1986년 4월 문을 연 바탕골미술관에서는 예술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전통적인 미술 장르 외에도 누드 크로키, 축제와 굿, 행위예술(Performance) 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26일부터 4월 4일까지 조선호텔 화랑에서 소원 문은희 누드 크로키전이 열렸다. 이것이 문은희의 수묵 누드 작업을 세상에 알리고 평가받는 자리가 되었다. 이때 전시된 작품은 40점 정도 된다. 나부(裸婦)라 불리는 여인의 누드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 때 수묵 누드의 특징은 선이 굵다는 점이다. 선의 갈라짐이 나타나고, 그 때문에 윤곽선이 뚜렷하지 못하다. 여인군상도 몇 점 있고, 배경을 검게 칠한 작품도 보인다.

 조정권의 '봄 여인'
 조정권의 '봄 여인'
ⓒ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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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희의 수묵 누드를 본 평론가, 시인, 화가 등이 작품을 이야기한 글들이 많이 남아 있다.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문은희가 화선지와 모필과 먹을 사용해 누드 크로키에 도전해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말한다.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인 조정권은 '봄 여인'이라는 글에서 문은희의 누드 크로키가 예사롭지 않은 필치(筆致)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동양화가들은 생래적으로 곡선의 미에 심취해있는가 보다. 큰 백자항아리를 쓰다듬어 보면 암말의 궁둥이를 연상케 하는 관능적인 육감이 전해지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여기 보이는 문씨의 누드 히프 선에서도 팽만감이 넘치는 말 궁둥이의 튼실하고 터질 듯한 관능미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감꼭지 같은 유방이며 미끈히 솟은 허리며 히프에서 허벅지로 내려오는 능선의 선 등. 단순하고 소담한 윤곽만으로도 애잔히 배어있는 규방 속 여인의 살구꽃물 같은 관능을 열어 보이는 듯하다. 아마 오랜 세월 동안 다듬어온 필력을 바탕으로 이러한 선이 나오는가 보다."

 문은희의 수묵 누드
 문은희의 수묵 누드
ⓒ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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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제로 문은희의 누드는 그렇게 에로틱하지 않다. '말 궁둥이', '감 꼭지', '살구꽃물' 같은 비유는 지나치게 감각적이고 수사적이다. 오히려 문은희의 누드는 생각하고 고뇌하는 모습을 움직임으로 표현한다. 그 때문에 바라보는 사람과 교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림 속 여인과의 사랑은 누드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고받는 마음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문은희 누드의 아름다움이 있다.

군상으로 표현된 누드에는 누워있는 것, 앉아있는 것, 서있는 것이 있다. 그중 서있는 것이 가장 인상적이다. 그것은 그들 여인이 표현하는 몸짓과 그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가장 강렬하기 때문이다. 수묵 누드 속 벌거벗고 서 있는 여인들이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과 비슷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들은 저 높은 하늘을 향해 절규하고 있다. 그것은 여인들이 받아온 속박을 벗어나고자 하는 몸짓일 수도 있고, 예술혼을 펼치고자 하는 문은희 개인의 절규일 수도 있다.

 절규하는 여인들
 절규하는 여인들
ⓒ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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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끝난 문은희 누드 크로키전은 지방전시회로 이어진다. 6월 17일부터 23일까지 대구 중앙미술관에서 전시회가 열리게 되었다. 지방전시회지만 비교적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져주었다. 그리고 11월 3일부터 9일까지는 금호문화재단 초대로 광주 가톨릭미술관에서 전시회가 열렸다. 문은희 누드 크로키전은 수묵누드를 전국에 알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누드 그림을 이처럼 잘 표현한 시가 또 있을까?

 귀천의 나부
 귀천의 나부
ⓒ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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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희가 그린 수묵 누드에 대한 평가 중 가장 훌륭한 글은 천상병 시인의 '귀천의 나부'다. 여기서 귀천은 천상병 시인의 부인이 운영하던 귀천다방을 말하고, 나부는 벌거벗은 여인을 말한다. '귀천다방에 걸린 여인의 누드화'를 보고 천상병 시인이 읊은 시다. 그런데 어쩜 이렇게 은근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표현으로, 나부를 고상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만들 수 있을까?

"歸天의 裸婦

문순옥
귀천다방
별난 곳.

붓끝에서
美女가
실오라기도 안 걸치고
걸어 나오는 곳.

이제 서양 사람들도
기절할
아름다운 裸婦.

먹으로
그린
아름다운
女人.


그림에
박수 박수."

붓으로 그린 미녀인데 실오라기 하나 안 걸쳤다. 먹으로 그린 아름다운 여인이다. 내가 그 여인을 보니 밖으로 걸어 나온다. 서양 사람들도 기절할 아름다운 여인이다. 나는 그 여인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그림 속 여인과 나의 교감이다. 액자 속에 들어있는 여인과의 사랑이다. 시란 이처럼 문은희의 수묵 누드 속 여인을 살아나오게 만든다. 그게 시인 천상병의 힘이다.

 수묵 누드
 수묵 누드
ⓒ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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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우 시인은 귀천다방에 걸린 문은희의 수묵 누드 그림과의 인연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시인이 산문으로 쓴 글로, 황홀함, 당혹감, 즐거움을 솔직담백하게 표현했다. 서양의 누드화에 익숙한 우리지만 동양의 수묵 누드에서 오히려 신비스러움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얘기다. 

"오랜만에 귀천(歸天)엘 들렸더니만 목 여사가 문은희 화백의 나체(裸體) 그림만 내민다. 그림을 감상하고 그 느낌을 짤막하게 쓰란다. 작품을 하나 하나 감상하는 사이 나도 모르게 그림에 빠져들었다. 작품마다 그 대담한 선(線)과 여인(女人)의 아름다운 신비는, 시정(詩情)과 함께 내 마음을 당혹케 한다. 흔히 유화(油畫)로 본 여인의 나체보다도 동양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고 한층 더 흐뭇함을 느끼게 된다." 

여자모델 셋 남자모델 하나가 펼치는 누드 퍼포먼스

 바탕골미술관 퍼포먼스를 수묵 누드로 그리는 문은희
 바탕골미술관 퍼포먼스를 수묵 누드로 그리는 문은희
ⓒ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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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4월에는 바탕골미술관 박의순 관장의 제안으로 누드 퍼포먼스가 이루어졌다. 당시 누드에 관심이 있던 화가들을 바탕골미술관에 초대해 퍼포먼스를 하면서 누드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이다. 모델과 두 시간을 계약하고, 화가와 기자 30명만 입장한 가운데 크로키를 시작했다. 그때까지 문은희는 두 시간쯤 지나야 붓에 힘이 생겨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바탕골 누드 퍼포먼스 때는 처음부터 그림이 잘 그려졌다고 말한다.

"보통 두 시간이 지나야 붓 끝에 신이 옴을 느끼는데, 이때는 처음부터 막 신이 오는 것 같아요. 그래 가지고 나도 모르게 막 그려간 거야. 그래 두 시간에 34m를 그렸는데, 이때 비디오가 안 들어왔으면 한 50m 그렸을 것 같아. 내가 그린 것 같지가 않아. 그래서 이건 신이 줬다고 그래. 신의 작품이라고."

 34m 누드 군상 도입부
 34m 누드 군상 도입부
ⓒ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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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네 명의 모델이 지속적으로 움직이고, 그 순간순간을 포착해 화선지에 옮기는 것이다. 보통 2분에 하나의 포즈를 완성하니까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두 시간에 60명의 모습을 그리는 게 맞다. 그러나 그 동안 연습을 많이 하고 모델의 움직임에 익숙해져서 1분에 한 사람을 그릴 정도가 되었다. 또 프리즈(frieze)를 만들어야 하니까 자연히 속필로 그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려진 인물이 130명이 넘었다.

문은희가 아쉬워하는 점은 더 길게 그리지 못한 것이다. 화선지 100장을 이어 붙여 갔으니까 70m 까지는 그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 다른 화가들이 한 장씩 별지로 그림을 그렸다면, 문은희는 길게 이어진 종이에 군상을 그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누드 군상 또는 누드 프리즈가 되었고, 1988년에 그린 누드 병풍과 함께 최고의 걸작이 되었다. 누드 프리즈는 40m 짜리가 하나 더 있다.

 34m 누드 군상 중 문은희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
 34m 누드 군상 중 문은희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
ⓒ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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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그림을 살펴보면 모델들이 눕고 앉고 서고 걷는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화가가 모델들에게 사전에 포즈를 주문했기 때문이다. 문은희는 여기에 표정 연기까지 부탁해 그들의 감정까지 표현하려고 애썼다. 그 때문에 그녀의 수묵 누드가 우리에게 더 많은 생동감과 느낌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문은희의 누드 프리즈에는 스토리가 있고, 전해주는 메시지가 있다.

수묵 누드는 움직이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게 아니라, 가는 선을 통해 영감을 표출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가는 선에 이르는 과정이 정말 고통스럽고, 영감을 표현하는 일이 정말 어렵다. 그 때문에 누드 프리즈에서는 아직도 굵고 갈라진 선이 보인다. 선묘에 있어서도 아직은 칼날 같이 예리하지 못하다. 칼날처럼 예리한 선묘에 이르기 위해 문은희는 계속해서 노력한다.


#수묵 누드#바탕골미술관#누드 크로키전#청상병의 <귀천의 나부>#누드 프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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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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