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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교육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가 논란이 되었다. 교육이념에서 '홍익인간'을 삭제하고 '민주시민'으로 대체하려다 논란이 증폭되면서 뉴스거리가 되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널리 인간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은 건국이념이자 통치이념으론 훌륭하다. 그러나 21세기 미래사회 미래교육 이념으론 충분치 않다.

우리 민족의 건국이념이 부강한 국가나 패권국가가 아니라 세상을 이롭게 하고 인간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이타적인 철학을 담고 있으니 이 얼마나 고상하고 훌륭한가. 더구나 홍익의 정신문화가 우리 민족의 출발인 고조선의 건국이념이었으니 글쓴이 스스로도 단군의 자손임이 자랑스럽다.

그러나 홍익인간은 건국이념이자 정치철학으로 그 위상을 규정하는 게 중요하다. 교육이념은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용어보다 구체성을 띤 명징한 용어로 정의되어야 한다. 프랑스 공교육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 이념을 바탕으로 '라이시테'의 정신을 강조한다. 라이시테는 차별이 없고 타인을 존중하는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프랑스 교육이념이다. 라이시테 헌장은 프랑스 초중고 모든 교과서에 수록돼 있고 학교교육에서 강조하는 정신이다. 나아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를 강조하는 것이 프랑스 공교육의 특징이자 시민교육의 핵심이다.

이렇듯 구체적으로 교육이념을 표방하고 지향하는 추세는 핀란드를 비롯해 덴마크, 독일, 노르웨이, 스웨덴 등 교육선진국이 보이는 일반적 흐름이자 세계적 경향이다. 그들 교육선진국이 한결같이 강조하는 학교교육은 주체적 인간상을 바탕으로 자율, 존중, 연대의 정신이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의 변화에 맞서, 신자유주의와 팬데믹으로 심화된 불평등 구조에 맞서 오늘의 시대에 걸맞는 교육이념이다. 이번 민형배 의원이 대표 발의한 교육법 개정안 역시 그러한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결코 식민사관의 영향을 받은 탓도 아니며 더더욱 반민족적‧반역사적인 행위가 아니다. 또한 이러한 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들이 마치 불순한 저의를 갖고 있는 양, 비난에 가까운 공격적인 글을 쓰는 것은 경솔하기까지 하다. 그 이유를 몇 가지 근거로써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이라는 최고 수준의 교육이념을 표방하였음에도 학교교육은 '순응적인 시민'을 양산해 왔다. 출세주의 입시경쟁교육이 학교교육을 강력하게 규정한 탓이다. 거기다 오랜 일제강점기 35년의 식민통치와 미군정 3년에 이르는 외세의 통치, 그리고 이승만 12년, 박정희 18년, 전두환, 노태우 12년에 이르는 독재통치를 거치면서 학교교육은 권력의 시녀처럼 도구화되어 '순치된 신민(臣民)'을 양산해 왔다.

무려 80년 넘게 학교교육은 상당 부분 '신민(臣民)교육'의 특징을 보여 왔다. 한 마디로 건강한 '민주시민'을 길러내질 못했다. 민주주의는 건강한 시민의식을 간직한 민주시민들로 유지되고 발전하는 체제이자 생활양식이다.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표현대로 "민주주의자 없이 민주주의는 없다." 그런 점에서 홍익인간은 최고의 통치이념이자 건국이념이지 학교교육이 구체적으로 지향해야 할 교육원칙이자 교육이념으로선 충분치 못하다.

둘째, 이 글을 쓴 글쓴이 역시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은 우리 주류역사학계에 분노한다. 쓰다 소키치와 그 제자 이병도가 주장한 삼국사기 초기기록불신론을 여전히 사실이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주류사학계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어디 역사학계만의 일인가! 국어학계는 어떠한가!

경성제대-서울대로 이어지는 국어학계 관학아카데미즘은 어떠한가? 강단학자들, 바로 이희승, 이숭녕을 비롯한 국어학자들은 일제치하 '과학적' 국어학의 학맥을 전수받은 인물들이다. 우리가 오늘날 학창시절 열심히 배우고 암기했던 언어의 사회성, 언어의 자연성, 소쉬르의 과학적 언어학 등이 바로 그들에 의해, 그리고 그 제자들에 의해 널리 유포된 지식들이다.

과학적 언어학, 바로 소쉬르의 언어학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인물은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 교수 고바야시이다. 그리고 언어학이 과학적으로 중립성을 띠기 위해선 가치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한 이는 이희승의 스승 오구라 신페이이다. 오구라 신페이는 언어학이란 철저히 가치중립적인 학문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들 고바야시나 오구라 신페이는 총독부 식민통치에 밑거름을 깔아준 전위이자 식민지 중견관료를 양성한 경성제대 교수였다.

이희승, 이숭녕, 조윤제가 가슴에 담아둔 일본인 학자 오구라 신페이나 고바야시는 그들의 고백처럼 나의 스승, 은사, 좋은 스승이다. 더구나 이들 스승은 경성제대 교수들 가운데 정치색이 없는 학자로 알려졌다. 관학아카데미즘의 과학적 국어학의 탄생에는 이들 일본인 학자들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나아가 주시경(남쪽 최현배, 북쪽 김두봉)으로 이어지는 언어민족주의 학풍은 서울대 관학아카데미즘에 밀려 '국수주의자' 내지 '옹고집쟁이'로 낙인을 받고 그렇게 이미지화되었다. 그러나 주시경의 언어·민족 일체관에 서서 민족정신을 간직한 한글전용론자인 주시경의 제자와 후학들이 국한문혼용을 주장한 이희승, 이숭녕의 과학적 국어학을 일제 잔재,식 민 학문으로 비판하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주체적 인간으로 바로 서고 사회현안을 비판적으로 사고하며 사회적 약자와 연대할 줄 아는 이타적 학생상을 추구하는 민주시민교육은 추상적인 통치이념이나 건국이념으로 길러지거나 완성되지 않는다. 한국교육이 지향해야 할 궁극점이 왜 민주시민교육이어야 하는지 우리는, 우리 교육계는, 나아가 우리 어른들은 그 이유를 성찰해야 한다.

이미 교육선진국 핀란드, 독일은 50년 전부터, 프랑스는 36년 전부터 그리고 가장 늦은 영국은 20년 전부터 '민주시민교육'을 공통필수교육과정으로 가르쳐 왔다. 우리는 이제 시작이다. 아무리 식민사학에 호되게 당하고 주류역사학계에 밀린 처지라 해서 흑백논리로 이번 사건을 악의 이미지로 재단할 일은 아니다. 교육이념으로 홍익인간 대신 민주시민으로 대체하는 것이 어떻게 반민족적이고 반역사적인 불손한 태도인지 설득력 있는 논거를 제시해야 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아직도 우리 사회엔 '어린이'라는 아름다운 순우리말보다 일제 식민당국이 써왔던 '아동'이란 말을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있다. 아동심리, 아동학대, 아동복지 등은 물론 여전히 일제가 학교교육을 통제하기 위해 심어 놓은 '교감'(校監)이란 용어를 학교에선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있다. 하루 빨리 부교장으로 바꿔야 할 것이다. 우리가 흥분할 것에 흥분하고 분노할 것에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 교육법 개정안이 발의된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않은 채, 흥분하고 상처를 주는 공격적인 비난은 갈등만 임시 봉합한 채, 결코 생산적인 논의로 발전할 수 없다.

일본 천황의 충량한 제국신민을 양성하던 '국민학교' 명칭이 '초등학교'로 바뀐 게 해방 된 지 50년이 지난 1996년 일이다. 부끄러운 우리 민낯이다.

셋째, 21세기 다가올 미래사회, 미래교육은 과학기술이 놀라울 정도로 변화할 것으로 예측한다. 우리가 익히 접한 인공지능(AI), 로봇공학기술, 생명공학 등 바이오기술,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등은 미래사회, 우리의 생활 전반을 급격히 변화시킬 것이다. 학교교육도 예외가 아니다.

삶의 편리함을 더해주기도 하고 일자리가 감소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 변화 말고도 IT, 바이오 등 첨단과학기술의 발달은 국내외적으로 불평등 구조를 심화시킬 것이다. 나아가 인간의 도덕성 문제까지 야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통제되지 않은 과학기술이 가져올 미래사회는 디스토피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래교육은 높은 도덕성과 책임의식으로 무장한 '강력한 시민성'(citizenship)을 요구한다.

2018년 채택된 'OECD 교육 2030'에서 힘 있는 지식교육'을 강조하고 '학생의 행위주체성'을 강조하며 '사회변혁 역량'을 길러주는 게 학교교육의 중요한 지표로 제시된 것도 그러한 배경을 안고 있다고 본다. 민주시민교육이 다가올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 학교교육과정의 주요한 위치를 점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넷째, 산업화와 국가 간 극심한 경쟁구조는 기후위기를 자초했다. 중국은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 1위 국가이자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에서 이미 1/4을 넘어섰다. 미국이 2위이고 우리나라도 7위에 속해 있다. 이상 기후나 기후 위기는 '기후정의' 문제와 직결된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선 그레타 툰베리 같은 학생을 찾기 힘들다. 민주시민교육이 실종되고 입시경쟁교육이 학교교육을 질식시킨 결과이다. 지구의 안전과 인류의 진정한 행복을 지향하는 학교 교육이라면 오늘 날 생태, 인권, 노동, 기후, 공감, 배려, 자유, 평등, 차별에 반대하기, 자율, 타인 존중, 책임, 관용, 상생 등을 핵심가치로 하는 민주시민교육을 전면화해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지구를 살리고 우리 후손들의 삶의 안전을 보장하는 선택인지를 학교교육을 통해 시급히 가르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의 이념은 민주시민으로 바꾸어야 한다. 홍익인간은 최고의 통치이념이자 정치철학으로, 그리고 건국이념으로 그 위상을 높이되 하루빨리 학교교육의 이념을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교육지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시간이 없다.

태그:#민주시민교육, #민형배 교육법 개정안, #홍익인간, #교육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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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동기는 일제강점기 시절 가족의 안위를 뒤로한 채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항일투사들이 이념의 굴레에 갇혀 망각되거나 왜곡돼 제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점이 적지 않아 근현대 인물연구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복원해 내고 이를 공유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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