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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OECD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가진 나라다. OECD 회원국의 최근 자살률은 10만 명 당 11.1명인 반면, 한국의 자살률은 24.1명(2020년 기준)이다. 한국에서의 최근 5년간 자살자는 매년 평균 1만 3000명을 넘으며 2023년 자살시도자는 3만 665명이다. 2023년 기준으로 하루 84명이 자살을 시도하고, 35명 이상이 자해행위로 사망을 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경찰 통계에 따르면 이 중 직장 또는 업무상 문제로 자살하는 사람들은 매년 약 500여 명 이상이다. 직장 또는 업무상 문제로 인한 자살 유족의 산재 신청은 여전히 많지 않지만, 유족이 이를 산업재해로 인지하고 산재 신청을 하는 건수는 매년 조금씩 늘고 있다.

노무사로서 최근 들어 자살 산재 신청과 관련된 상담 및 사건을 다수 접하게 된다. 최근 몇 건의 자살 사건을 접해보며 느끼는 것은 자살하는 이유를 타인이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사건들을 정리하며 최대한 미루어 생각해 보면, 자살하는 사람들의 경우 각자 민감하게 다가오는 서로 다른 지점들이 있는 것 같다. 일을 하다 다양한 환경에서 본인에게 취약한 부분이 노출되는데, 업무와 관련되다 보니 노동자로서 이런 환경을 쉽게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민감한 부분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서 자살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글로는 이렇게 표현해 보지만, 나 역시 그들의 감정과 생각이 쉽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누군가가 자살한 이유를 이성적으로, 객관적 자료를 통해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리인으로서 나의 역할은 그들이 남겨놓은 발자취에 따라 그들의 업무와 관련된 주관적인 힘듦과 어려움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것이며, 사실 할 수 있는 일이 유일하게 그것 뿐이기도 하다.

자해행위의 업무관련성 판단
 
 누군가가 자살한 이유를 객관적 자료를 통해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누군가가 자살한 이유를 객관적 자료를 통해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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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자해행위와 업무와의 관계(업무관련성)를 어느 정도까지 보여주어야 하는가? 한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업무상 재해 보상에 대해 규정한 대표적인 법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아래 산재보험법), '공무원재해보상법', '사립학교교직원 연금법'(아래 사학연금법)이 있다. 산재보험법과 공무원재해보상법, 사학연금법에 따르면 노동자의 자해행위, 자해행위로 인한 재해는 원칙적으로 업무상·공무상·직무상 재해(아래 업무상 재해로 통일)로 인정되지 않는다. 다만, 예외적으로 업무상 사유로 발생한 정신질환으로 치료받았거나 받는 사람이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한 경우, 업무상 재해로 요양 중인 사람이 그 재해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한 경우, 그리고 정상적인 인식능력 등이 뚜렷하게 낮아진 상태에서 한 행위로 자해행위를 하였다는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경우"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상당인과관계는 어떻게 판단하는가?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상당인과관계는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며 규범적 관점에서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경우에는 그 증명이 있다고 본다. 여러 판례는 "근로자가 극심한 업무상의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정신적인 고통으로 우울증세가 악화하여 정상적인 인식능력이나 행위 선택 능력, 정신적 억제력이 현저히 저하되어 합리적인 판단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의 상황에 부닥쳐 자살에 이르게 된 것으로 추단할 수 있는 경우라면 망인의 업무와 사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될 수 있고, 비록 그 과정에서 망인의 내성적인 성격 등 개인적인 취약성이 자살을 결의하게 된 데에 영향을 미쳤다거나 자살 직전에 환각, 망상, 와해된 언행 등의 정신병적 증상에 이르지 않았다고 하여 달리 볼 것은 아니"라고 한다.

즉, 자살의 업무관련성은 객관적(의학적, 자연과학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극심한 업무상 스트레스가 있었는지, 그로 인한 정신적 고통으로 우울증세가 악화되어 정상적인 인식능력이 현저히 저하되어 합리적인 판단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인지를, 객관적이라기보다 고인을 중심으로 판단해야 한다. 고인에게 개인적인 취약성이 있었거나 자살 전 일반적인 정신병력 증상이 없다는 이유로 업무관련성을 부정할 수 없다.

자살하게 된 객관적 자료를 보여달라고요?

그런데 최근 일부 사건들이 질병판정위원회에서 고인이 자살에 이르는 과정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없고 "개인적인 취약성"이 있다는 이유로 업무관련성이 부정되는 경험을 하였다. 고인들은 생전 업무상 이유로 정신건강의학과를 내원하였거나 자해행위를 한 적이 있으며, 진료기록을 통해 그 사유를 파악할 수 있다. 이후 고인들은 각각 정신적, 심리적으로 부담을 가질 수 있는 취약한 지점에 노출되었고, 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노출되면서 스트레스와 업무상 부담이 급격히 가중되는 상황에서 자살하게 되었다.

고인의 동료들을 면담하고 고인의 업무 내역, 다이어리, 휴대전화를 뒤지고 또 뒤지며 고인들이 자살에 이르렀다는 자료를 객관적으로 보여주고자 준비하였다. 그런데도 더 객관적인 자료를 제출하라니? 어느 수준이 위원들이 만족하는 객관적 자료일까? 업무시간으로, 수치로, 통계적으로 표현되는 자료가 객관적 자료인가? 자살이라는 행위 자체가 정신적인 억제력이 현저히 저하된 상태에서,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인데 그들이 원하는 객관적인 자료가 존재하기는 할까?

위와 같이 객관적 자료와 개인적 취약성을 중심으로 업무관련성을 판단하는 것은 매우 쉽다. 그러나 객관적 자료와 개인적 취약성 중심으로 업무관련성을 판단하게 되면 고인이 자살하게 된 구체적인 과정 등 자살에 이르게 된 본질적인 내용을 배제한다. 이는 판례에 따른 업무관련성의 규범적 판단 원칙에도 반하는 것이다. 자살의 업무관련성 판단에 있어 고인의 주관적인 인식과 환경 등 본질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박경환 님은 공인노무사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 일터 7월호에도 실립니다. 한노보연 후원 문의 : 02-324-8633


#업무상재해#정신건강#자살#산업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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